r3 vs 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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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랫동안 칩거하던 기존의 대선 패배 후보들과는 달리 빠르게 정계에 복귀하며 패배책임을 지고 물러나 있어야하지 않냐는 논란이 일었다.[46] 노무현 대통령 서거 4주기 추도식을 기점으로, 온라인, 오프라인을 통해 현안에 대한 입장도 자주 밝히며 대선 재도전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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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새로 창당된 새정치민주연합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문재인과 손학규를 공동 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49][50] 29일 경남도지사 후보 김경수와 구동태 목사를 방문한 뒤 "신당이 영남지역에서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며, "정당공천제 폐지가 통합의 고리"라는 입장을 보였다. 4월 18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사망자 수가 늘어난 것에 대하여 "왜이렇게도 무기력하냐"며 "우리의 수준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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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새로 창당된 새정치민주연합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문재인과 손학규를 공동 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29일 경남도지사 후보 김경수와 구동태 목사를 방문한 뒤 "신당이 영남지역에서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며, "정당공천제 폐지가 통합의 고리"라는 입장을 보였다. 4월 18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사망자 수가 늘어난 것에 대하여 "왜이렇게도 무기력하냐"며 "우리의 수준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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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통합진보당이 헌재 판결로 해산되자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민주주의가 상처를 입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는 이유는 다름을 포용하는 유일한 제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무렵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15.8%가 "다음에는 문재인을 찍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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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대표 재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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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9일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61] 그는 당 대표가 되면 2016년에 치러질 차기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출마 선언 이후 약 5개월 만에 박원순 서울시장을 제치고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탈환하였다. 이후 2015년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제1차 전당대회에서 41.8%를 얻은 박지원 후보를 앞선 45.3%를 얻으며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에 당선되었으며, 새정치민주연합이 더불어민주당으로 개편된 후에도 계속 대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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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국회의원 정수가 부족하다"며, "국민에게는 그렇게 인식되지 않고 있지만,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 주요 국가와 비교하면 (인구수 대비 의원 비율이) 낮다", "국회의원 수를 늘리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내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안철수는 이러한 문재인의 주장을 비판했으며, 새누리당은 그를 비판하는 논평을 냈다. 같은 날 해외자원개발 국정조사의 증인으로 서겠다고 밝혔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합류를 요구했으나, 새누리당은 이를 "정치 공세"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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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부터 메르스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6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의 메르스 대처에 대해 "정부의 대응을 보면 세월호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무능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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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다가오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은 분열조짐을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고, 이 무렵 안철수를 필두로 한 "신당 창당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문재인은 이에 대해 그런 일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당의 혁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후 분열조짐을 보이더니, 결국 12월 13일 안철수의 탈당을 필두로 당은 분열된다. 문재인은 이를 두고 "정말 정치가 싫은 날"이라고 말했으나, "아무리 파도가 높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총선승리에 이르는 새정치연합의 항해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포기하지는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당내의 비판이 계속되는 가운데, 27일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의원 67명이 문재인에게 "총선에서 공천 권한 일체를 선거대책위원회에 위임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날 새정치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으로 개명했는데, 이는 안철수계의 흔적을 지우는 행보라는 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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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를 사퇴한다고 말했으며, 이에 김종인은 "그러리라 믿어요", "시기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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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상임 고문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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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차기 정권교체를 위해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불출마선언을 하면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배재정이라는 훌륭한 사람을 사상의 차기 국회의원으로 예약해놓고 떠난다는 것"이라며 "배재정을 국회로 보내주시면 제가 함께 사상을 책임지고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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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행사에 참여했다. 27일 안동을 방문했고, 7월 25일 울릉도에 이어 독도를 방문했다. 이를 두고 "오래전부터 한·일 역사 문제의 상징인 독도 방문을 추진해 왔다"며, "이번 방문은 8·15 광복절을 앞두고 영토 주권을 확고히 하자는 목적"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이번 독도 방문에는 최낙정 전 해양수상부 장관이 동행했다. 안동 방문에 대해서는 TK 민심을 잡으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8월 6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모행사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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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말부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알려지면서 박근혜 정권을 향한 민심이 폭발했고, 이때 문재인은 박근혜 정부에 거국중립내각을 요청했다. 안철수 등 일부 야권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 나왔으나 별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 무렵 문재인은 실권자로 떠올랐다는 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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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6일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하여 "200만 촛불이 세상을 바꾸는 횃불이 될 것"이라고 발언했으며,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내려오든 탄핵으로 끌려 내려오든 박 대통령 퇴진은 시간 문제",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한시라도 빨리 스스로 내려오는 것이 국민들을 덜 고생시키고 국정 공백과 국정 혼란을 최소화하는 길"이라고 박근혜의 하야를 촉구했다. 이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대통령은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었다. 최순실 일가의 대통령이었다. 돌이켜보면 2012년 12월부터 오늘까지 지난 4년 동안 대한민국에 대통령은 없었다"라며 박근혜 정부를 규탄했다. 3일 후에는 "국회는 흔들림 없이 탄핵 절차를 밟아야 한다. 우리당과 저는 퇴진운동과 탄핵추진을 흔들림 없이 해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의 탄핵안이 가결되자 "국민이 이겼다"고 주장했으나, 그러면서도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이 무렵부터 문재인은 지지율 1위로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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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0일 [[박근혜]]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통해 최종 파면되었다.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면서 "문재인 대세론"이 굳어지는 등 차기 유력한 대권주자로 굳어졌다. 그러나 이에 기타 야당들의 반문연대 논의가 진행되면서 다소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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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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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4일 동영상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바라는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이제 정권교체의 첫발을 내딛는다"라고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상도동계인 김현철, 김덕룡, 문정수, 박종웅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캠프 자문그룹 출범식에는 장·차관급 인사 49명이 참석했다.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네이버 미디어서비스 실장(미디어 담당 이사),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한 윤영찬 네이버 부사장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담당본부장으로 영입했고, 주요 여성계 인사인 남인순 의원을 여성본부장으로 영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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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내 경선은 이재명, 최성, 문재인, 안희정의 4자 구도 대결이 확정되었다. 3월 22일에는 전국 동시투표소 투표를 진행하였고, 3월 25일 호남 지역을 시작으로 각 지역별 ARS 투표와 순회투표를 차례로 진행하였다.[96] 4월 3일 수도권 지역 경선에서 문재인은 60.4%를 득표하며 1위에 오르는 동시에, 전 지역에서 1위 압승을 거두면서 과반 이상 득표로 인해 최종결선 투표 없이 곧바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경선 승리 후 "오늘 우리에게 승자와 패자는 없다. 승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촛불을 밝힌 국민들"이라며 "국민의 명령을 받들어 국민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하는 동시에 "세 동지가 저의 영원한 정치적 동지로 남기를 소망한다"며 "그 동안 어느 캠프에 있었든, 누구를 지지했든,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다"라고 강조하며 세 후보 지지세력 결집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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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하며 "남녀 동수 내각"을 공약했으며, "준조세 금지법을 만들어 기업을 중앙 정부 권력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개성공단 확장"을 추가적으로 공약했고,[100] 아울러 댓글공작, 정치개입 등으로 논란이 된 국가정보원을 개혁하겠다고 나섰다. 이 외에도 "공공부문 81만개 일자리 창출", "광화문 대통령 시대" 등을 공약했다. 안보에 있어서는 "6자 회담을 비롯한 다양한 양자·다지회담을 적극 활용해 한반도 비핵화·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고 약속했으며,[103] 이 외에도 북핵에 관해서는 이에 대응할 우리 군의 핵심전력을 조기에 전력화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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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정의당 심상정 후보와 함께 4월 23일, 4월 28일, 5월 2일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토론에 참석했다. 5인 구도로 이루어진 토론을 거치면서 여러 분야에서 서로 간의 공방이 오갔다. 이후 5월 9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41.1%를 득표해 24%를 득표한 홍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미 이어져온 1강 구도를 통해 개표 초반부터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었으며, "함께 경쟁한 후보들에도 감사와 위로를 전한다"며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그 분들과도 함께 손잡고 미래를 위해 같이 전진하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궐위선거인 관계로 별다른 인수위원회 없이 곧바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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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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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내용은 위키백과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https://ko.m.wikipedia.org/wiki/%EB%AC%B8%EC%9E%AC%EC%9D%B8|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