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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유년기3. 학창 시절4. 군 복무5. 인권변호사 활동6. 참여 정부7. 정치 활동
7.1.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7.1.1. 대선 패배
7.2. 당 대표 재임7.3. 당 상임 고문 시절7.4.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8. 문서 출처

1. 개요[편집]

문재인의 생애를 다룬 문서이다.

2. 유년기[편집]

문재인은 1952년 1월 24일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면 명진리 694-1번지에서 아버지 문용형(文龍炯)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한옥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용형은 함경남도 흥남의 남평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으로 함흥농고 졸업 후 일제시대 흥남읍사무소에서 농업계 계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한국 전쟁 발발 후 1950년 12월 23일에 흥남 철수 작전 무렵에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가족과 함께 탑승했다. 문용형은 거제에 정착한 후 공무원 경력을 제시하며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노무자로 일자리를 얻었고 그의 부인은 계란 행상을 했다. 이후 문씨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했다. 문재인은 남항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극심한 가난 때문에 학교 바로 위의 '신선성당'에서 양동이를 들고 줄을 서서 정기적으로 배급을 타먹어야 했다고 말했다. 문재인은 천주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았다.

3. 학창 시절[편집]

1965년에 남항초등학교를 졸업한 문재인은 경남중학교에 입학했고, 1968년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경남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했다. 고교 시절 초기에는 학내에서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말기에는 극도로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 낙망, 술·담배에도 손을 대며 방황을 하다 끝내 대학 입시에 실패하였다. 문재인은 졸업 후 1971년 종로학원 진입 시험에서 일등을 하며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하였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서울에서 계속 재수 생활을 이어갈 만큼의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이후 경희대학교 설립자이자 당시 경희대 총장이었던 조영식이 문재인에게 '4년 전액 장학금'을 약속하며 경희대 입학을 권유하였고, 문재인은 그 권유를 받아들여 1972년 경희대학교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고 알려졌으나, 이런 일화의 사실관계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의혹도 존재한다. 문재인은 경희대학교 법대 시절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예비 검속에 걸린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집회를 주도하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그 해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도 제적당했다.

4. 군 복무[편집]

출소 후 신체검사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로 군에 징집된 문재인은 1975년 8월 육군에 입대하였고 대한민국 39향토보병사단 신병훈련소를 거쳐 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 제3특전대대 대대본부 작전과에서 복무했다. 문재인은 특수 훈련에서의 우수한 평가 결과로 인해 특전사 복무 중 당시 특전사령관 정병주와 공수여단장 전두환으로부터 두 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5. 인권변호사 활동[편집]

전역 후에는 경희대학교에 복학해 1980년 복학생 대표로 신군부 세력에 항거하다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하루 전에 시행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시행 당일 밤 형사들에게 권총이 겨누어진 채로 긴급 체포되었고 바로 청량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풀려난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동기였던 박원순, 고승덕, 조영래 사이에서 1등을 했으나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성적이 차석으로 밀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검증되지 않았다는 의혹도 존재한다. 사법연수원에서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도 수상했다고 알려졌으나, 희망하던 판사 임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문재인은 몇몇 로펌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변호사 노무현을 만나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 생활을 했다. 또한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합동 변호사 사무소에서 노무현과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30년 가까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하여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부산변호사협회 인권 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 변호사로 일했으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동의대학교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론했다. 그는 1996년 8월 발생한 페스카마호 사건에서 조선족 선원들의 변호를 맡았다.

1988년에는 김영삼으로부터 노무현, 김광일과 함께 국회의원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문재인은 3명 중 유일하게 정치입문을 거절했으며, 정계입문을 결심한 노무현과 김광일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계진출을 거절한 문재인은 이 후 1990년대부터 2002년까지 부산 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여러 시국, 노동 관련 사건들을 맡으며 활발히 활동했다. 1990년에는 '낙동강변 살인사건'으로 불리는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의 피고인을 변호하였고 당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사건 31년 후인 2021년 검찰의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 사실이 인정되어 피고인 전원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 외에도 동의대학교 사건에서도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을 진두지휘했으며 2002년에는 1980년 가족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5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신귀영 씨의 재심에 변호인단으로 참여하기도 했다.[26] 1995년 문재인은 노무현과 함께 운영했던 기존의 합동 사무소를 '법무법인 부산' 으로 개칭하고 대표 변호사로 이름을 올렸다.

2002년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새천년민주당 부산 선대위원장직을 맡아 노무현의 당선에 기여했다. 문재인은 노무현의 당선 이후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려 했으나, 당선 직후 노무현의 민정수석비서관 제의를 받고 "정치하라고 하지 마라, 그리고 민정수석으로 끝내겠다"는 2가지 조건을 내걸고 민정수석비서관직을 수락하였다.

6. 참여 정부[편집]

문재인은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 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러나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 산행 도중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영자 신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렸으며[28],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정무특보를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 안에서 이정호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이호철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장 등과 함께 PK인맥을 대표했는데, '왕수석'으로 불리며 한나라당으로부터 '왕수석인 문재인 수석의 월권과 청와대의 시스템 경시로 인해 국정 원칙이 파괴됐다'는 비난을 받으며 2인자로 주목받기도 했다.[29] 비서실장 시절 이해찬 국무총리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는 인사들과 내기 골프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고심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해임을 촉구하기도 했으며,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내는 업무 스타일을 보였다는 평이 있다. 또한 참여정부 들어 검사장으로 승진한 17명 중 문재인과 이호철 비서관의 경남고등학교 동문은 한 명도 없었는데, 두 사람은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고, 고등학교 동창인 고위 공직자가 문재인의 방에 들렀다가 얼굴도 못 본 채 나온 바가 있으며,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식사나 환담 자리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

2006년 11월 6일 국정자문회의 의원 138명을 보궐할 때 국정자문위원으로 추가 보선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문재인에 대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말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은 노무현에게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어갈 것을 제의하였고, 노무현이 이를 받아들여 방북 당시 노무현은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어갔다. 군사분계선에서는 별도의 철책선이 없었으므로, 도로에 노란색 페인트로 임시 선을 그렸다. 문재인은 당시 노무현과 함께 남북출입사무소까지 동행한 뒤, 다시 서울로 돌아와 남북정상회담의 진행을 총괄했다.

7. 정치 활동[편집]

2008년 참여정부가 끝난 뒤 경남 양산시로 내려가 칩거하였고, 동년 9월부터 자신이 세운 법무법인 부산으로 5년만에 복귀하여 대표 변호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듬 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자, 담당 변호사를 맡았으며 노무현의 검찰 출석 당시에도 직접 변호인단으로 조사에 입회하였다. 1달 뒤인 5월 23일 노무현은 결국 서거하였고, 그는 국민장 위원회에서 상주를 맡아 장례절차 전체를 총괄하였다. 서거 이듬 해인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았다. 그후 2011년 8월 신동아 여론 조사에서 '당신이 원하는 국회의원' 부문에서 지지율 1위를 차지했고,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통합당의 대선 예비주자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다가 6월 초 출마를 발표했다.

7.1.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편집]

2012년 6월 17일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보통 사람이 중심 된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라고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36] 슬로건은 "사람이 먼저다", 캠프명은 "담쟁이 캠프"로 정해졌다. 이후, 8월 25일부터 9월 16일까지 열린 국민참여경선에서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과 겨루어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의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2012년 11월 18일 2기 지도부 총사퇴에 의해 민주통합당의 대표권한대행이 되었다.

유력 대권후보로 떠오른 안철수와 단일화를 추진하였지만, 단일화 과정을 둘러싼 문제로 11월 23일 안철수가 대선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진보정의당의 심상정 대선 후보도 후보 등록을 앞두고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며 대선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또, 상도동계인 김현철, 김덕룡, 문정수의 지지를 받았으며, 대선후보급인 문국현, 박찬종의 지지를 받았다. 또, 보수인사로 알려졌던 윤여준의 찬조연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40] 그밖에 김영삼의 측근으로 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폭로한 것으로 유명한 강삼재 또한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다.

문재인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6·15 공동선언, 10·4 공동선언에 기초해 대북 포용 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또한 외교정책과 관련,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관련국가들과 한반도 문제를 함께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후 12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와 함께 토론에 참석했다. 문재인 측은 국가정보원에서 자신을 비방하는 여론조작을 벌인다고 12월 11일 공개하였다. 문재인 측은 그런 활동을 벌인 직원 중 한명을 지목했다. 3차 TV 토론이 끝난 12월 16일 오후 11시 서울지방경찰청은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는데, 이러한 경찰의 발표는 뒤에 허위로 밝혀졌다. 이후 2012년 12월 19일 선거에서 탈락 후보 사상 최다이자,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의 후보들 중 두 번째로 많은 14,692,632표(48.0%)를 득표했지만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 약 100만 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다음날 문재인은 패배를 승복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7.1.1. 대선 패배[편집]

2013년 4월 9일 발표된 민주통합당의 대선평가보고서에 따르면, 패배의 주원인은 캐릭터 정립 실패로 국민들에게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또한, 설문조사 결과 당내에서 4번째로 패배의 책임이 크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칩거하던 기존의 대선 패배 후보들과는 달리 빠르게 정계에 복귀하며 패배책임을 지고 물러나 있어야하지 않냐는 논란이 일었다.[46] 노무현 대통령 서거 4주기 추도식을 기점으로, 온라인, 오프라인을 통해 현안에 대한 입장도 자주 밝히며 대선 재도전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2014년 3월 새로 창당된 새정치민주연합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문재인과 손학규를 공동 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29일 경남도지사 후보 김경수와 구동태 목사를 방문한 뒤 "신당이 영남지역에서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며, "정당공천제 폐지가 통합의 고리"라는 입장을 보였다. 4월 18일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사망자 수가 늘어난 것에 대하여 "왜이렇게도 무기력하냐"며 "우리의 수준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12월 19일 통합진보당이 헌재 판결로 해산되자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민주주의가 상처를 입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는 이유는 다름을 포용하는 유일한 제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무렵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15.8%가 "다음에는 문재인을 찍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7.2. 당 대표 재임[편집]

2014년 12월 29일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61] 그는 당 대표가 되면 2016년에 치러질 차기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출마 선언 이후 약 5개월 만에 박원순 서울시장을 제치고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탈환하였다. 이후 2015년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제1차 전당대회에서 41.8%를 얻은 박지원 후보를 앞선 45.3%를 얻으며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에 당선되었으며, 새정치민주연합이 더불어민주당으로 개편된 후에도 계속 대표를 지냈다.

4월 6일 "국회의원 정수가 부족하다"며, "국민에게는 그렇게 인식되지 않고 있지만,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 주요 국가와 비교하면 (인구수 대비 의원 비율이) 낮다", "국회의원 수를 늘리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내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안철수는 이러한 문재인의 주장을 비판했으며, 새누리당은 그를 비판하는 논평을 냈다. 같은 날 해외자원개발 국정조사의 증인으로 서겠다고 밝혔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합류를 요구했으나, 새누리당은 이를 "정치 공세"라고 비난했다.

5월 말부터 메르스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6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의 메르스 대처에 대해 "정부의 대응을 보면 세월호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무능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은 분열조짐을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고, 이 무렵 안철수를 필두로 한 "신당 창당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문재인은 이에 대해 그런 일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당의 혁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후 분열조짐을 보이더니, 결국 12월 13일 안철수의 탈당을 필두로 당은 분열된다. 문재인은 이를 두고 "정말 정치가 싫은 날"이라고 말했으나, "아무리 파도가 높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총선승리에 이르는 새정치연합의 항해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포기하지는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당내의 비판이 계속되는 가운데, 27일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의원 67명이 문재인에게 "총선에서 공천 권한 일체를 선거대책위원회에 위임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날 새정치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으로 개명했는데, 이는 안철수계의 흔적을 지우는 행보라는 평을 받는다.

2016년 1월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를 사퇴한다고 말했으며, 이에 김종인은 "그러리라 믿어요", "시기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7.3. 당 상임 고문 시절[편집]

3월 19일 차기 정권교체를 위해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불출마선언을 하면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배재정이라는 훌륭한 사람을 사상의 차기 국회의원으로 예약해놓고 떠난다는 것"이라며 "배재정을 국회로 보내주시면 제가 함께 사상을 책임지고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행사에 참여했다. 27일 안동을 방문했고, 7월 25일 울릉도에 이어 독도를 방문했다. 이를 두고 "오래전부터 한·일 역사 문제의 상징인 독도 방문을 추진해 왔다"며, "이번 방문은 8·15 광복절을 앞두고 영토 주권을 확고히 하자는 목적"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이번 독도 방문에는 최낙정 전 해양수상부 장관이 동행했다. 안동 방문에 대해서는 TK 민심을 잡으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8월 6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모행사에 참여했다.

2016년 10월 말부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알려지면서 박근혜 정권을 향한 민심이 폭발했고, 이때 문재인은 박근혜 정부에 거국중립내각을 요청했다. 안철수 등 일부 야권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 나왔으나 별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 무렵 문재인은 실권자로 떠올랐다는 평이 있다.

11월 26일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하여 "200만 촛불이 세상을 바꾸는 횃불이 될 것"이라고 발언했으며,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내려오든 탄핵으로 끌려 내려오든 박 대통령 퇴진은 시간 문제",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한시라도 빨리 스스로 내려오는 것이 국민들을 덜 고생시키고 국정 공백과 국정 혼란을 최소화하는 길"이라고 박근혜의 하야를 촉구했다. 이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대통령은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었다. 최순실 일가의 대통령이었다. 돌이켜보면 2012년 12월부터 오늘까지 지난 4년 동안 대한민국에 대통령은 없었다"라며 박근혜 정부를 규탄했다. 3일 후에는 "국회는 흔들림 없이 탄핵 절차를 밟아야 한다. 우리당과 저는 퇴진운동과 탄핵추진을 흔들림 없이 해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의 탄핵안이 가결되자 "국민이 이겼다"고 주장했으나, 그러면서도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이 무렵부터 문재인은 지지율 1위로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꼽혔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통해 최종 파면되었다.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면서 "문재인 대세론"이 굳어지는 등 차기 유력한 대권주자로 굳어졌다. 그러나 이에 기타 야당들의 반문연대 논의가 진행되면서 다소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7.4.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편집]

2017년 3월 24일 동영상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바라는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이제 정권교체의 첫발을 내딛는다"라고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상도동계인 김현철, 김덕룡, 문정수, 박종웅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캠프 자문그룹 출범식에는 장·차관급 인사 49명이 참석했다.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네이버 미디어서비스 실장(미디어 담당 이사),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한 윤영찬 네이버 부사장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담당본부장으로 영입했고, 주요 여성계 인사인 남인순 의원을 여성본부장으로 영입했다.

당내 경선은 이재명, 최성, 문재인, 안희정의 4자 구도 대결이 확정되었다. 3월 22일에는 전국 동시투표소 투표를 진행하였고, 3월 25일 호남 지역을 시작으로 각 지역별 ARS 투표와 순회투표를 차례로 진행하였다.[96] 4월 3일 수도권 지역 경선에서 문재인은 60.4%를 득표하며 1위에 오르는 동시에, 전 지역에서 1위 압승을 거두면서 과반 이상 득표로 인해 최종결선 투표 없이 곧바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경선 승리 후 "오늘 우리에게 승자와 패자는 없다. 승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촛불을 밝힌 국민들"이라며 "국민의 명령을 받들어 국민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하는 동시에 "세 동지가 저의 영원한 정치적 동지로 남기를 소망한다"며 "그 동안 어느 캠프에 있었든, 누구를 지지했든,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다"라고 강조하며 세 후보 지지세력 결집에 나섰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하며 "남녀 동수 내각"을 공약했으며, "준조세 금지법을 만들어 기업을 중앙 정부 권력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개성공단 확장"을 추가적으로 공약했고,[100] 아울러 댓글공작, 정치개입 등으로 논란이 된 국가정보원을 개혁하겠다고 나섰다. 이 외에도 "공공부문 81만개 일자리 창출", "광화문 대통령 시대" 등을 공약했다. 안보에 있어서는 "6자 회담을 비롯한 다양한 양자·다지회담을 적극 활용해 한반도 비핵화·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고 약속했으며,[103] 이 외에도 북핵에 관해서는 이에 대응할 우리 군의 핵심전력을 조기에 전력화하겠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정의당 심상정 후보와 함께 4월 23일, 4월 28일, 5월 2일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토론에 참석했다. 5인 구도로 이루어진 토론을 거치면서 여러 분야에서 서로 간의 공방이 오갔다. 이후 5월 9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41.1%를 득표해 24%를 득표한 홍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미 이어져온 1강 구도를 통해 개표 초반부터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었으며, "함께 경쟁한 후보들에도 감사와 위로를 전한다"며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그 분들과도 함께 손잡고 미래를 위해 같이 전진하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궐위선거인 관계로 별다른 인수위원회 없이 곧바로 취임했다.

8. 문서 출처[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내용은 위키백과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