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2 vs 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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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2차 진주성 전투(1593.6.19~6.29)가 최종적으로 진주성의 함락으로 끝난 것도 삼도수군통제사직의 설치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진주성 함락 이후 7월 21일, 도체찰사 류성룡은 진주성 함락의 원인을 분석한 장계에서 "여러 장수들이 객병(客兵)을 거느리고 한 성안에 많이 모였는데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각각 제 주장만 고집하여 분란을 면치 못했던"[2] 것이 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순신과 원균이 화합하지 못하여 따로 작전을 펴는 상황인데, 진주성의 실패를 생각해서라도 수군을 일원화된 지휘권으로 통제할 필요성을 지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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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전투를 전후한 1593년 7월에 이순신은 경상도 해역의 견내량 남쪽 한산도로 기지를 옮긴 것도 주전장을 관할하는 장수(주장)가 아니라는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로부터 한 달 뒤인 8월 15일 조선 조정은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신설하고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통제사 임명 교지가 이순신에게 전달된 것은 열흘 뒤인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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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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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는 선조 40년(1607년) 5월 6일, 기존에 경상우수사가 본직으로 통제사를 겸하게 하던 것을 바꾸어 통제사를 본임으로 삼으면서 경상우수사를 겸하게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는 수사를 본직으로 할 경우 각 도의 관찰사(감사)들이 간섭하고 통제하려 들며 서로 다툴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특히 경상도와 전라도는 조선 팔도 가운데 인구가 많기로 1, 2위를 다투는 곳으로 문관인 관찰사의 위상이 당당하였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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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조직에서, 통제사의 품계는 관찰사와 동급인 종2품 가선대부였다. 그러나 권력은 조금 더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광해군 12년(1620년) 사간원에서 "통제사는 순찰사(관찰사)와 함께 공문을 통함에 있어 서로 대등하게 하는 규례가 있기는 하지만, 통제사는 수군을 맡아 다스리고 순찰사는 전적으로 한 도를 다스리는 자리로 임무가 매우 중하니, 통제사는 순찰사에 대해서 그 차이가 참으로 현격"하다고 아뢰거나, 인조 6년(1628년) 전라감사 이성구가 통제사 이항이 각 읍에 거친 면포를 보내어 한 필 값을 정조(벼) 스무 말로 시장 가격(면포 한 필=정조 열 말)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매겨 사들이고 있는데도 감사는 통제사와 대등한 관계라 이를 금단할 길이 없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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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통제사는 경상우수사이면서 삼도수군의 연합작전에서 수위로 지휘권을 갖는 정도였으나, 관할 범위가 경상우도를 넘어 삼도 바닷가 전체를 관장하는 것으로 바뀌고, '수군절도사의 상관'이라는 위상을 확실히 하는 동시에 삼남 각도의 관찰사와도 대등한(실권은 우위) 위치에서 해방 업무를 관장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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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7년(1629년) 통제사 구굉이 경상감사 홍방과 좌석 배치를 놓고 다투다가 해결을 보지 못하자 마침내 조정에 품달하였는데, 조정이 옛 관례에 따라 감사는 동벽, 통제사는 서벽에 앉게 하였다. 이는 동반(문신)인 관찰사는 동쪽 벽에 앉게 하고 서반(무신)인 통제사는 서쪽 벽에 앉게 함으로써 상호 대등한 관계임을 확인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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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통제사의 직무 교대는 통제영의 원문에서 이루어졌는데, 통영시 시내와 북쪽 외곽을 구분하는 고개의 이름인 '원문고개'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신임 통제사와 전임 통제사 모두 안장 얹은 타고 교대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가마를 탄 일로 심문을 받거나 유배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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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가 중앙 5군영의 대장과 동등하게 된 것은 고종 2년(1865년)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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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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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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