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수군통제사

수정됨
삼도수군통제사
三道水軍統制使
파일:삼도수군통제사 사진.png
임명자
소속
조선 수군
임기
2년 (평균 6~12개월)
초대
관저
삼도수군통제영
1. 개요2. 상세3. 역사4. 지위5. 임명6.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조선 시대의 관직으로 관품은 종2품이다.

2. 상세[편집]

지휘 관청과 해군 기지로 삼도수군통제영을 두었다. 행정조직에서 관찰사급으로, 군사조직에서는 중앙 군영의 대장급으로 대우받았다.

다른 이름으로 삼도통제사, 통제공, 통제사또, 통곤이라고도 하였다.

처음 설치되었을 때에는 정3품 수군절도사가 통제사를 겸직하는 형태였으므로 정3품급 관직이었다. 그러나 통제사로서 휘하의 수군절도사를 통제해야 했으므로 예우나 권한은 그보다 한 단계 위인 종2품에 상당했으며, 실제로 통제사 관직에 임명된 인물들도 임명 당시에 이미 종2품 이상 품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선조 40년(1607년)부터는 통제사가 본직이고 수군절도사가 겸직으로 직함 표기가 변경되면서 명실상부하게 종2품 관직으로 설정되었다. 법전에서 종2품 관직으로 규정된 것은 1746년(영조 22년)에 반포된 《속대전》때였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그 직책 특성상 수군 총사령관급이며, 육군과 수군을 아우르는 전군 총사령관에 대응되는 도원수의 부하이다. 단, 도원수는 전쟁 발발 또는 사변이 있을 때만 임명되는 임시 관직이며, 삼도수군통제사는 항상 유지되는 상설 관직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통제사가 군정권 또한 행사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해군참모총장이 군정권 뿐만 아니라 군령권도 맡고 있는 형태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3. 역사[편집]

통제사 직제가 신설되기 전까지 조선 수군은 단일화된 최고 사령관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본과의 접경지인 경상도 방면에 설치되어 대일본 방어의 최일선을 맡을 경상좌수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영(우수사: 원균)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일본군과 제대로 된 교전도 없이 무너져 달아나다시피 했고, 사실상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이 조선 수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통제사 직제가 신설되고 이순신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것은 전쟁이 일시 소강 상태에 들어갔던 1593년 8월의 일이다. 당시 전라좌수영 함대는 임진왜란 발발 한 달 뒤에 벌어졌던 옥포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그 작전 지역은 전라좌수영 관할 해역이 아닌 경상우수영 해역이었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관할 해역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객장으로써 주장인 원균의 요청에 응하여 그와 연합해 작전을 수행하는 형태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시점에서 통합 지휘권은 존재하지 않았고,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은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의 '연합 함대'로써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또한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원균은 당시 옥포와 합포, 적진포에서 조선 수군(전라좌수군 선단 24척, 경상우수군 선단 3척)이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것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려는 이순신에게 연명 즉 이순신과 원균 두 사람의 공동 공적으로 조정에 보고하자고 제의했으나 이순신이 완곡하게 거절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었고, 한산도 전투 이후 이순신이 정2품 정헌대부로 승차한 것에 반해, 자신은 종2품 가선대부로 승차한 데에 그친 뒤에는 노골적으로 반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순신 역시 자신의 일기에서 원균을 언급할 때는 '원흉'(元兇)이라고 부르며, 그가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며 망언을 했다거나 죽은 적군의 시체를 건져 수급을 챙기는 꼴을 일기에서 비난하는 등 원균에 대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또한 별개로 작전을 수행하며 공로에 대한 보고서도 제각기 올렸다.

양자간 갈등이 위험 수위에 다다른 상황에서 수군 지휘권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서라도 조선 수군을 일괄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수군절도사 이상의 상위직이 요구되었다.

여기서 제2차 진주성 전투(1593.6.19~6.29)가 최종적으로 진주성의 함락으로 끝난 것도 삼도수군통제사직의 설치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진주성 함락 이후 7월 21일, 도체찰사 류성룡은 진주성 함락의 원인을 분석한 장계에서 "여러 장수들이 객병(客兵)을 거느리고 한 성안에 많이 모였는데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각각 제 주장만 고집하여 분란을 면치 못했던"[2] 것이 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순신과 원균이 화합하지 못하여 따로 작전을 펴는 상황인데, 진주성의 실패를 생각해서라도 수군을 일원화된 지휘권으로 통제할 필요성을 지적한 것이었다.

진주성 전투를 전후한 1593년 7월에 이순신은 경상도 해역의 견내량 남쪽 한산도로 기지를 옮긴 것도 주전장을 관할하는 장수(주장)가 아니라는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로부터 한 달 뒤인 8월 15일 조선 조정은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신설하고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통제사 임명 교지가 이순신에게 전달된 것은 열흘 뒤인 25일).

4. 지위[편집]

통제사는 선조 40년(1607년) 5월 6일, 기존에 경상우수사가 본직으로 통제사를 겸하게 하던 것을 바꾸어 통제사를 본임으로 삼으면서 경상우수사를 겸하게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는 수사를 본직으로 할 경우 각 도의 관찰사(감사)들이 간섭하고 통제하려 들며 서로 다툴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특히 경상도와 전라도는 조선 팔도 가운데 인구가 많기로 1, 2위를 다투는 곳으로 문관인 관찰사의 위상이 당당하였던 곳이었다).

행정조직에서, 통제사의 품계는 관찰사와 동급인 종2품 가선대부였다. 그러나 권력은 조금 더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광해군 12년(1620년) 사간원에서 "통제사는 순찰사(관찰사)와 함께 공문을 통함에 있어 서로 대등하게 하는 규례가 있기는 하지만, 통제사는 수군을 맡아 다스리고 순찰사는 전적으로 한 도를 다스리는 자리로 임무가 매우 중하니, 통제사는 순찰사에 대해서 그 차이가 참으로 현격"하다고 아뢰거나, 인조 6년(1628년) 전라감사 이성구가 통제사 이항이 각 읍에 거친 면포를 보내어 한 필 값을 정조(벼) 스무 말로 시장 가격(면포 한 필=정조 열 말)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매겨 사들이고 있는데도 감사는 통제사와 대등한 관계라 이를 금단할 길이 없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때까지 통제사는 경상우수사이면서 삼도수군의 연합작전에서 수위로 지휘권을 갖는 정도였으나, 관할 범위가 경상우도를 넘어 삼도 바닷가 전체를 관장하는 것으로 바뀌고, '수군절도사의 상관'이라는 위상을 확실히 하는 동시에 삼남 각도의 관찰사와도 대등한(실권은 우위) 위치에서 해방 업무를 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인조 7년(1629년) 통제사 구굉이 경상감사 홍방과 좌석 배치를 놓고 다투다가 해결을 보지 못하자 마침내 조정에 품달하였는데, 조정이 옛 관례에 따라 감사는 동벽, 통제사는 서벽에 앉게 하였다. 이는 동반(문신)인 관찰사는 동쪽 벽에 앉게 하고 서반(무신)인 통제사는 서쪽 벽에 앉게 함으로써 상호 대등한 관계임을 확인해준 것이었다.

한편 통제사의 직무 교대는 통제영의 원문에서 이루어졌는데, 통영시 시내와 북쪽 외곽을 구분하는 고개의 이름인 '원문고개'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신임 통제사와 전임 통제사 모두 안장 얹은 타고 교대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가마를 탄 일로 심문을 받거나 유배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통제사가 중앙 5군영의 대장과 동등하게 된 것은 고종 2년(1865년)에 이르러서였다.

5. 임명[편집]

삼도수군통제사는 무관 출신 가운데 종2품 가선대부가 부임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가선대부보다 높은 고위직에서 행직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초대 이순신이 정2품 정헌대부로 통제사직을 수행한 이래 행직자로 확인된 경우는 54명에 이르고, 1대부터 30대까지로 한정하더라도 17명이 행직으로써 통제사직을 수행하였다.

통제사들의 전임직을 살펴보면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등 중앙 군영의 2인자급 막료나 육군의 병마절도사로 있다가 영전되어 온 경우가 가장 많았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군절도사로 근무하다 승진하여 부임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또한 조선 후기 군부의 실권을 쥐고 있던 중앙 5군영의 대장들 상당수가 이전에 통제사를 역임한 인물임이 지적되고 있다.

통제사의 직무 교대는 통제영의 영문인 원문에서 이루어졌다. 통제영이 소재했던 경남 통영시 시내와 북쪽 외곽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인 '원문고개'의 지명은 과거 이곳에 통제영의 원문이 위치하고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통제사가 부임할 때는 최소 25명의 수행원과 다수의 마필을 거느리고 위엄을 과시하였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