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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를 맹신하고 관리들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1948년 9월 11일 다시 출국하면서 서재필은 '인민들은 정부에 맹종만 하지 말것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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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관존민비 사상과 고루한 봉건적 유습이었으며, 스스로 개척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과 게으름과 의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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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에 대한 관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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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함부로 약탈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살하는 인사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과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 1928년 박용만이 의열단원 박인식과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료에게 누명을 씌워서 살인을 한다며 의열단을 성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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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독립운동이니 무슨 사업이니 한다면서 자기는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생활의 길에 힘쓰지 않고, 순전히 남의 재산, 남이 벌어놓은 것을 빼앗아 먹고 지내는 것을 보고 심한 구토를 느꼈던 것이다.[56] 아무리 국가나 민족을 위한다고 떠들고 있으나, 실은 비양심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56] 그리하여 서재필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그 경비 조달을 위해서 자신의 집까지도 저당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소모만 되는 독립운동 비용을 전혀 보충할 길이 없었다. 그의 집은 3.1운동 이후 사업이 파산하면서 가난에 허덕여야 했고, 생계는 그가 의사로 활동하거나 취직하거나 아내 뮤리엘이 회사에 다니면서 조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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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애국 운동, 민족 운동을 한다 하면서 동포들의 성금에만 의존하는 것은 애국심을 가장한 민폐라고 규탄하였다. 애국과 민족 운동은 순수한 봉사여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그는 자신이 직접 일하여 생활비와 활동비를 조달했고, 자신의 재산도 대부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서재필이 안창호를 만난 1925년은 그가 60대의 노인이었을 때였다. 안창호가 서재필을 남달리 존경하게 된 것은 3.1 운동 당시 갸륵한 봉사자로서 그의 재산과 몸을 다 바쳐 패가망신하다시피 한 헌신자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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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안창호와 같이 독립된 문명국가를 건설하되 서두르지 말고 국민을 계몽시켜 가며 민주주의 방식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다. 또한 안창호는 서재필을 끝까지 스승으로 섬겼다.[202] 서재필은 늘 조선인들이 요령과 술수, 협잡에 능하면서도 자신들은 피해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며,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기르기 전까지는 독립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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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임통치론, 자치론에 대한 관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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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박용만이 베이징에서 이해명 등 의열단원에게 암살당했다. 이에 분개한 서재필과 이승만은 삼일신보에 박용만 암살을 규탄하는 장편의 글을 기고했다. 중외일보 기자 이우섭이 그를 만나서 국내에서 자치운동을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자 서재필은 '나는 오래 해외에 있어서 국내 사정을 모르니 그것이라도 하여야 되겠다면 반대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국내에서 자치운동이라도 해보겠다고 하자 서재필은 반대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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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그것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해보라며, 그것이 독립을 위한 첫 번째 단계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박용만 암살은 암살이 아니라 처형인데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하는 동시에 자치운동이라도 해보라는 발언이 사실이냐고 추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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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UN]] 위임통치론이 나왔을 때 그는 이승만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이 위임통치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나오자, 서재필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에 대하여 별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당시 한국은 독립할만한 힘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으므로 그러한 방편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서재필은 어떠한 형태로든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자유를 되찾는 길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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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균 애국자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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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김옥균을 위대한 애국자라고 칭송하였다. 한편 1894년 3월 김옥균이 암살당한 뒤, 그해 5월 조선조정에서 그의 시신을 능지처사한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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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옥균을 '대인격자였고 진정한 애국자였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회고갑신정변'에서 당시까지도 역적으로 인식되던 김옥균이 역적이 아니라 진정한 애국자요 혁명가였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비록 때를 잘못타고나 불행히도 현대식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려 노력했고 조선도 힘 있는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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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이 김옥균을 대 애국자라고 칭송한 이유로 그가 안동김씨라는 당대의 명문 세도가문의 자제로 편안히 고위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는데도, 자신에게 주어진 영예를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서재필은 '회고갑신정변'에서 김옥균의 당시 심경을 이같이 대변했다. '김옥균은 서구가 몇 세기에 걸쳐 이룬 문명을 일본이 불과 한 세대에 달성한 사실을 알고는 일본을 모델로 하여 조선을 개혁시키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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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는 한때 조선이 열강에 휘둘리지 않는 영세중립국이 되기를 희망했는데, 이는 김옥균의 영향이라 밝혔다. '김옥균은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조선을 아세아의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그의 원대한 꿈이었고 유일한 야심이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믿고 우리의 책임을 완수하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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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용에 대한 경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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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평생 이완용을 경멸하였다. 서재필은 한때 이완용을 애국자라고 생각하였으나 그가 친러파와 친일파로 변신하자 그를 혐오하였다. 그는 한 때 독립협회장을 지내고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논설은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그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친러파가 되어 독립협회를 공격하고, 나중에는 한일 합방에도 참여하자 그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한층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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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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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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