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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류:서재필]]
2[include(틀:상위 문서, 문서명1=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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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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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서재필]]의 사상과 신념을 서술한 문서이다.
7== 독립에 대한 실망과 좌절 ==
8개화당에 몸을 담고 갑신정변을 일으킬 당시 서재필은 급진적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여 언론과 교육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그는 일본의 후원을 얻어 친일적인 성격을 띄기도 하였다. 1896년, 고국에 돌아와 처음 발표한 글에서 조선 사람들이 과학이나 예술의 어느 분야라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고방식이 매우 논리적이라 조선이 동양 강대국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평하였는데, 10년간의 불운했던 미국 망명 후에도 조선의 민족성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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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04년 4월, 한성 감옥에 수감 중이던 청년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러일전쟁을 치르고 있는 일본은 옳은 쪽에서 모든 개명된 나라들이 지지하고 옹호하여야 할 원칙을 위해서 전쟁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정의와 문명을 위해 싸우는 나라와 같이 하기를 진정으로 기도한다고 하며 일본의 의도를 선의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1918년 11월,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한국이 일본의 밥이 되었고, 그 모든 권리가 박멸되고 백성들이 승전국의 노예가 되어 구차한 명을 보전하였다고 적었으며, 자신이 이 원통한 사정을 알리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그 사이에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3.1운동에 적극 호응했으며 1919년 4월, 한인연합대회(제1차 한국의회)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1== 국민 의식 개조론 ==
12그는 갑신정변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실패 원인을 지지 세력의 부족과 민중의 호응이 미진했던 탓으로 보았다. 따라서 부당한 정부와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려면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권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참정권과 민권 의식을 심어주고, 인권의 신성불가침을 말한 천부인권론과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을 소개했다. 모든 인간의 인권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며, 임금도 부모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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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또한 배재학당과 기독교청년회관, 원산학사의 학생들에게 토론의 방법을 가르쳤다. 회의에서 누군가 의견을 개진하면, 그 의견에 대한 반론과 반박을 제기하는 법을 가르쳤다. 양자의 생각과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면 그 중 한발 물러서서 절충적인 방법을 찾도록 하기도 했다. 그리고 토론 중에 감정적인 발언이나 인신공격은 하지말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시민이 합리적인 판단력을 갖춘 뒤에야 시민으로서 제 구실을 하여 참정권과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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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독립신문을 통해 국민 계몽과 민권 의식의 고취를 목적으로 움직였다. 밖으로는 열강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이를 국민에게 자세히 알림으로써 새로운 각성을 갖게 하고, 안으로는 국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국민 상하가 합심 협력하여, 충국 애국하되, 세계 대세와 신문명에 눈을 떠야만 된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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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그는 상호간에 인권을 존중하고 정부 관리나 일반 국민이 각자의 직책을 다하되 뜬 이름보다는 실천을 존중하도록 요청했다. 온 국민이 총력을 기울여 국민 교육을 장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권을 가졌으므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길을 닦고 수도 시설을 개선하는 동시에 의복, 음식, 거처를 깨끗이 하여 위생에 주의해야만 국민의 품위가 향상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온 국민이 뭉쳐서 국가 주권을 수호하도록 강력히 촉구했다.
19== 자유주의 ==
20그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아무도 상대방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자격은 없다고 역설했다. 이는 1896년 귀국 직후부터 1898년 5월까지 각지의 강연과 연설을 통해 천부인권설을 주장하며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역설하였다. 1897년 7월 30일의 한 강연에서는 '인간의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그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윤치호는 그의 이 발언을 일면 수긍하면서도 너무 나갔다고 평하기도 했다.
21== 노비 해방 ==
221895년 12월, 서재필 귀국 이후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를 해방시킬 방안을 계획하고 이를 공론화하기로 작정하고 1897년, 이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상정한다. 1897년 11월 1일에 개최한 독립협회 토론회에서 주제를 노비제로 선정하여 그 부당함에 대한 논의를 개진케 하였다. 이때 주제가 '동포 형제 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 상에 대단히 불가하다는 문제'였다.[180] 이 토론회 에서는 일반 회중이 토론에 자유로이 참가하여 각자의 의견을 개진한 뒤 윤치호와 서재필이 각각 노비제에 대한 연설을 하였다. 여기서 윤치호는 노비 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지적하였으며, 서재필의 경우는 미국에 있어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참상을 이야기하였다. 이들의 연설을 마친 뒤 이날의 주제에 대한 청중의 의견을 물어 투표한 결과 '노비제가 의리상 불가하다.'는 주제에 만장일치로 찬성하였다. 주제에 찬성한 사람들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도 함께 가결시켜 토론회가 성황리에 끝나게 되었다. 당시 참관자에 의하면 토론이 매우 진지하였으며 토론회의 결과 100명 이상의 노비들이 자발적으로 해방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고 한다.
23== 보편교육론 ==
24그는 민중에 대한 평등한 교육 및 기회의 부여로 말미암아 국민 전체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국가 경제도 부강해지며 여성들의 권리도 향상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여자에게도 학문을 가르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여성 교육에 힘쓸 경우 어머니의 지식과 학문이 높아지게 되므로 자연히 우리의 후세들이 총명한 사람이 된다고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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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서재필은 국가와 개인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든지 배워야 함을 강조하였고, 그는 이러한 교육을 통해 국가의 산업을 일으키고 도덕과 사회 풍속을 개혁해 나갈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다만, 그는 배워서 힘쓸 것이 고답적인 이론이 아니라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는 기술, 실용적인 학문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27== 탈가족주의 ==
28서재필은 후사가 끊어진다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서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문중에서는 서재필이 아들이 없어 후사가 끊어짐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것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재필의 이와 같은 사상은 그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임을 말해 주었다. 그는 이미 가족관념을 청산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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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서재필이 귀국하자 서씨 문중에서는 들끓기 시작하였다. 서재필은 이러한 소란을 몹시 싫어하였다. 서재필은 서울의 친척집에도 다니지 않고 공무가 끝나면 조선호텔에서 혼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친척들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 역시 친척들의 존재를 외면하였다. 서재필이 양자 입양을 거절하자, 그에게 종증손 중 한명인 서동규를 봉사손으로 입양하라는 문중의 권고가 있었지만, 서재필은 그 권고 조차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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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문중에서 그가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여 양자를 세우려고 권고하였을 때, 서재필은 이 소식을 듣고 '쓸데없는 일들이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둘이나 있소. 이제 새삼스럽게 양자를 세운다니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소이다.'하고 사양하였다. 종증손 중의 한 명인 서동성을 봉사손으로 들이라는 조카의 부탁도 거절하였다. 서재필은 또 '이런 생각은 모두 고루한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오.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사상을 길러가는 것이 우리나라가 빨리 독립할 수 있는 길이오.'라며 '부지런히 일이나 하고 착실하게 살기 위한 새로운 힘을 연구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는 어설픈 온정주의와 가족주의가 사회를 폐쇄화시키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죽고 못살듯이 가족을 찾더라도 큰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터지면 자기 혼자 살려고 도망칠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대 근처에 있다가 이장된 어머니 성주 이씨의 묘소의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생모의 묘소에 참배하지 않았다. 종손 서명원에 의하면 이 일로 서재필의 조카들은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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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서재필은 한국인의 가족 관념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가족주의가 바로 끼리끼리 해먹는 패거리주의를 만드는 원인이며, 이방인을 배척하는 근간이라 생각하고 끔찍히 여겼다. 서재필은 지나친 형식 위주의 완고한 족벌의식은 조국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 송건호는 서재필이 형식과 금전과 동양적인 가족 관념을 청산한 크나큰 인물이었다 라고 칭송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재필은 탈조선화된 인간이라 하였다. 서재필은 가족주의와 혈연에 대한 집착이 사회를 폐쇄적, 배타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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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그는 두 딸을 아꼈지만 두 딸에게 공짜로 선물을 주지 않고, 두 딸이 구두를 닦거나 집안일을 하게 한 뒤에 그 대가로 용돈을 주었다. 서재필의 이러한 풍모를 두고 그의 둘째딸인 뮤리엘이 후에 지적하여 말하기를 '파파는 심플맨이에요.'라고 하였다. 또, 서재필은 윤치호가 1920년대부터 추진한 족보 폐지 운동, 제사 폐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독려하였다.
37== 유교 및 동도서기론에 대한 관점 ==
38서재필은 유교 사상에 대해 환멸감을 드러냈다. 그는 동도서기론조차도 부정적으로 판단하였다. 서재필은 '동도서기론'이 아니라, 서양의 생명과학의 문명을 인문, 문화 과학에 직접 수용하려 했던 것이다. 서재필은 동양의 가치관과 도덕을 버리거나 포기하거나 재실험하였다. 그는 동도서기론의 전통과 보수성, 그리고 유교적 인간관계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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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 '조선에 아들과 딸, 친구들이 환자의 병구완할 생각들을 아니하고, 남의 일 보듯이 보고들 있어서, 조선 인민이 인정있고, 의리있고, 경계가 없다고 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186] 그는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이지만 중병에 걸리거나 아쉬운 처지에 놓이면 수시로 표변하는 인심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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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서재필은 병이 없어지면, 나라가 태평하고 군민이 안락하게 된다고 보았다. 실학파, 개화파는 정신과학(道)에서 경제 사상을 도출하였지만, 서재필은 자연과학에서 병을 직접 치유할 과학 기술과 학문을 도출한 것이다. 또한 그는 유교 사상이 말하는 계급적 인간관계가 인간의 평등권과 존엄성을 침해하고 나이나 지위로 다른 사람을 깔아뭉개는 권위주의와 폐쇄성 등 악습의 근간이 되었다고 역설했다.
43== 기술, 노동 장려론 ==
44서재필은 농·공·상을 천시하는 고루한 전근대적 사고와 전통을 비판했다. 글공부와 고답적인 철학 이론만을 숭상하고 노동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며, 물자와 노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글공부와 고상한 이론이 있을 수가 있겠느냐며 반문하였다. 서재필은 땀흘려 노동하는 것은 창피스러운 일이 아니며, 노동을 천시하고 창피하게 여기는 인간이야말로 천박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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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그는 기술 도입과 신기술 개발 역시 국력을 부강하게 하는 지름길임을 역설하였다. 농사의 후진성이 농사 짓는 법과 종자 개량에 소홀한 때문 임을 지적 하면서 농사에 관해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선진 기술 등을 배워 소득을 높일 것을 주장하였다. 특수 작물이나 과실수 기르는 법, 묵혀 둔 농토와 산지를 개발하여 이용하는 법, 고기 잡는 기술과 해양 자원 개발, 그리고 제조업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등 을 익혀 실행할 때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농사 외에도 그는 자원의 개발과 제조업 등의 기술 역시 중요함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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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그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 정립에 관심을 가졌다. 농사의 후진성이 농사 짓는 법과 종자 개량에 소홀하기 때문임을 지적하면서 농사에 관해 학문으로 연구하고, 선진 기술을 배워 소득을 높일 것을 권장하였다. 서재필은 제조업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등을 익혀 실행할 때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됨을 강조 하였다. 그는 노동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며, 국가가 부강해지려면 제조업 기술과 지식 등을 힘써 익혀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고 해도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론, 학문은 좋은 이론, 좋은 학문이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49== 민중 계몽 운동 ==
50서재필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바탕 삼아 민중을 지도,'자주독립의 완전한 국가'를 만든다는 뜻으로 독립협회를 1896년 7월 2일 창립했다. 독립협회는 초기에는 개혁 인사와 고급 관료들의 사교모임 수준이었으나, 점차 개혁을 추구하는 관료와 지식인층이 모이는 사회단체로 변화했다. 협회가 만민공동회 개최를 시작으로 민권을 지키기 위한 사회운동을 벌이자, 보수세력은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협회 요인 17명을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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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그는 개혁 이전에 민중들의 의식 수준이 개화되고 합리적으로 변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배재학당과 협성회를 통해 토론을 보급하려 했다.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 그는 토론하는 문화가 백성들 사이에 정착되기를 바랬고, 자신의 토론회에 참석하는 젊은이들을 통해 토론문화가 확산되기를 기대하였다. 또한 그는 유길준의 민중계몽 주장에 적극 공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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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한편 일본 외상은 일본제국 의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조선이 '언제든지 타국에 의지하여 지내온 버릇이 있어 국가 간의 평화를 얻는 데 있어서도 타국에만 의지하고 외교를 하는 데도 일관성이 없다'는 식으로 당시 조선 왕조의 주체성 결여와 무능력을 비웃었다. 이에 서재필은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그 뜻을 해석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감정적인 대응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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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그는 청년들에게 각지를 여행하고 외국 여행도 다녀올 것을 권고했다. 보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봐야 사람의 시야와 눈이 트이게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에 따라 이승만과 김규식에게 해외 유학을 권고하고 그들의 학비와 경비를 대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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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한편 독립협회를 통해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반역자로 취급당하자 그는 상당히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갑신정변과 독립협회의 실패 이후 그는 민중에 대해 냉소적으로 보게 된다. 그는 사고방식의 개선과 합리성 없이는 개혁도, 독립도 달성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59== 민중 경멸론 ==
60그는 개혁이 실패한 것은 무조건 변화를 거부, 적대시하는 민중들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을 너무 믿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 때문이었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이 없고, 잘 훈련된 후원이 없이 다만 몇몇 사람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로마 사람에게 처형되었으나 로마 사람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하기는 유대 사람이었다. 즉, 그의 동포가 그를 알지 못한 탓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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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그는 갑오경장이나 을미개혁 이후로도 서양의 것, 외부의 것을 두려워하고 배타적으로 행동하는 민중들을 경멸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사설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벼슬하고 백성된 이들은 눈을 뜨고도 눈먼 판수(盲人)요, 귀가 있고도 귀먹은 사람들'이라고 개탄하면서 갑오경장 이후의 조선의 모습이 '외면은 개화, 내면은 미몽'이라고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63== 국민성에 대한 지적 ==
64서재필은 한 때 '세계에서 제일 불쌍하고 더러운 백성은 조선 백성'이라 했다. 그리고 한국인은 속임수와 협잡, 뒤통수에 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늘 '대한 사람은 외국에 가서도 협잡을 하려 하고 남을 속이려 든다'고 지적하였다. 또 '한국의 독립이 일본의 힘으로만 될 것이며 따라서 한국인은 이와 같은 일본의 덕택을 인정하여 일본에 감사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허례허식으로 가득찬 유교 사상 대신 미국을 개척한 청교도의 합리성과 시민윤리를 보급해야 함을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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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한편 서재필과 윤치호의 한국인의 국민성 경멸에 대해 1990년대 초, 미국의 휘튼 대학 동양사 담당 교수인 비판 찬드라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경멸로 변한 것으로 봤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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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필자는 서재필, 윤치호 양 씨의 몇가지 극단적인 친일적 진술과 한국을 경멸하는 발언이 그들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발언은 어떤 순간적인 좌절감이나 안타까움으로 인한 감정의 폭발이라고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힘이 압도적으로 약할 때 사람들은 가끔 이런 태도를 나타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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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이들의 친미 내지는 친양적 자세는 제도적인 문제이다. 그들은 유교 사상을 극력 반대하면서 적극적으로 서양 문화를 도입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개신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필자는 그들의 애국심, 즉 민족주의적인 정신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71== 지방 자치제도 실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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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서재필은 '백성이 뽑은 사람이 천거받은 사람보다 열번에 아홉번은 나으리라'며 공직자를 백성들이 선거로 선출할 것을 주장했다. 1896년 4월 독립신문 창간 직후부터 그는 국민들 스스로가 생각해야 하고, 스스로 비판하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감사나 군수 등의 지방관을 백성들이 직접 선거하는 것이 임금이나 조정에서 임명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을 앉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선거로 뽑은 지방관은 임금이나 정부에서 임명한 지방관과는 달리 자기 소신껏 백성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서재필의 주장이었다.
73==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
74해방 후의 서재필의 사상의 핵심은 한국이 통일 독립되고 번영하려면 자유민주주의를 착실하게 운영해야 한다는데 있었다. 그 때 온 겨레가 열망하던 민족통일의 비결도 자유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고 그는 외쳤다. 따라서 그는 일본 제국주의는 물론이고 히틀러의 나치, 무솔리니의 파시즘,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등은 봉건제도 만큼이나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말살시키는 악마의 사상으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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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서재필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혐오하였다. 그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히틀러의 나치와 같은 유해한 집단이라고 반복해서 언급, 지적하였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당 독재체제 아래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독립된 인격을 가질 수 없는 만큼 국민의 힘이 모아지지 않음에 반해, 자유민주주의 아래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됨으로써 국민의 힘이 저절로 모아져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사상이라며 반대 의사를 여러번 반복하였다.
77== 강력한 치안사회 주장과 징병론 ==
78서재필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라고 결론내린다. 서재필은 인간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욕망이 있고, 금전, 수단과 방법의 유무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봤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통제, 제재되어 마땅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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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구한말의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의 정치적 입장과 세계관이 각자 달랐지만 일본식의 강력한 경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점과 모든 ‘역적’(동학·의병)들을 모두 소탕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봤다.[199] 이러한 이들의 강력한 경찰권 주장은 당시 사회에서 유일하게 반발없이 제대로 채택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경무부 대신(경찰청 총장) 서리 이근택(1865~1919)이 서너명 이상이 모여서 속닥거리면 엄벌하겠다는 계엄령을 내린 것은 식민화 훨씬 이전인 1901년 6월 22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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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한편 1895년~96년 조선에 체류할 무렵 서재필은 징병제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서재필이 징병제를 주장한 것은 양반의 자제라는 이유로 빠지는 조선의 농병제도는 부당한 차별대우라 판단하고, 누구나 공정하게 병역의 의무를 짊어져야 된다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징병제 군대에 끌려간 1940년대보다 훨씬 이른 1890~1900년대에 서재필이나 유길준은 “징병제가 곧 국민을 만든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권리의 소중함을 모르는 자들에게 억지로 권한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봤다. 또한 그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인간은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대접 받을 권리가 없다고 봤다.
83== 정부 맹신에 대한 비판 ==
84서재필은 한국이 봉건 왕조체제였던 1894년 무렵부터 강연과 글을 통해 인간의 평등, 자유의 필요성, 신분 차별 철폐, 국민의 참정권을 요구하였다. 갑신정변으로 그는 민중들을 대상으로 한 개혁 설득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였으나, 1895년 12월 귀국하면서 다시 평등, 자유, 차별철폐, 참정권 요구를 강연과 글을 통해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6년 10월의 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와, 각 지역민의 시도지사 선거 때에도 국민들은 선거를 자신을 다스려 줄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서재필은 선거를 통해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자신을 다스릴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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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정부를 맹신하고 관리들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1948년 9월 11일 다시 출국하면서 서재필은 '인민들은 정부에 맹종만 하지 말것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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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그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관존민비 사상과 고루한 봉건적 유습이었으며, 스스로 개척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과 게으름과 의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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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독립운동에 대한 관점 ==
90그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함부로 약탈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살하는 인사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과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 1928년 박용만이 의열단원 박인식과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료에게 누명을 씌워서 살인을 한다며 의열단을 성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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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서재필은 독립운동이니 무슨 사업이니 한다면서 자기는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생활의 길에 힘쓰지 않고, 순전히 남의 재산, 남이 벌어놓은 것을 빼앗아 먹고 지내는 것을 보고 심한 구토를 느꼈던 것이다.[56] 아무리 국가나 민족을 위한다고 떠들고 있으나, 실은 비양심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56] 그리하여 서재필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그 경비 조달을 위해서 자신의 집까지도 저당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소모만 되는 독립운동 비용을 전혀 보충할 길이 없었다. 그의 집은 3.1운동 이후 사업이 파산하면서 가난에 허덕여야 했고, 생계는 그가 의사로 활동하거나 취직하거나 아내 뮤리엘이 회사에 다니면서 조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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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서재필은 애국 운동, 민족 운동을 한다 하면서 동포들의 성금에만 의존하는 것은 애국심을 가장한 민폐라고 규탄하였다. 애국과 민족 운동은 순수한 봉사여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그는 자신이 직접 일하여 생활비와 활동비를 조달했고, 자신의 재산도 대부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서재필이 안창호를 만난 1925년은 그가 60대의 노인이었을 때였다. 안창호가 서재필을 남달리 존경하게 된 것은 3.1 운동 당시 갸륵한 봉사자로서 그의 재산과 몸을 다 바쳐 패가망신하다시피 한 헌신자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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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서재필은 안창호와 같이 독립된 문명국가를 건설하되 서두르지 말고 국민을 계몽시켜 가며 민주주의 방식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다. 또한 안창호는 서재필을 끝까지 스승으로 섬겼다.[202] 서재필은 늘 조선인들이 요령과 술수, 협잡에 능하면서도 자신들은 피해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며,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기르기 전까지는 독립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97== 위임통치론, 자치론에 대한 관점 ==
981928년, 박용만이 베이징에서 이해명 등 의열단원에게 암살당했다. 이에 분개한 서재필과 이승만은 삼일신보에 박용만 암살을 규탄하는 장편의 글을 기고했다. 중외일보 기자 이우섭이 그를 만나서 국내에서 자치운동을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자 서재필은 '나는 오래 해외에 있어서 국내 사정을 모르니 그것이라도 하여야 되겠다면 반대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국내에서 자치운동이라도 해보겠다고 하자 서재필은 반대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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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서재필은 그것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해보라며, 그것이 독립을 위한 첫 번째 단계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박용만 암살은 암살이 아니라 처형인데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하는 동시에 자치운동이라도 해보라는 발언이 사실이냐고 추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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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이승만의 [[UN]] 위임통치론이 나왔을 때 그는 이승만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이 위임통치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나오자, 서재필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에 대하여 별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당시 한국은 독립할만한 힘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으므로 그러한 방편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서재필은 어떠한 형태로든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자유를 되찾는 길이라고 봤다.
103== 김옥균 애국자론 ==
104서재필은 김옥균을 위대한 애국자라고 칭송하였다. 한편 1894년 3월 김옥균이 암살당한 뒤, 그해 5월 조선조정에서 그의 시신을 능지처사한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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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그는 김옥균을 '대인격자였고 진정한 애국자였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회고갑신정변'에서 당시까지도 역적으로 인식되던 김옥균이 역적이 아니라 진정한 애국자요 혁명가였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비록 때를 잘못타고나 불행히도 현대식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려 노력했고 조선도 힘 있는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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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서재필이 김옥균을 대 애국자라고 칭송한 이유로 그가 안동김씨라는 당대의 명문 세도가문의 자제로 편안히 고위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는데도, 자신에게 주어진 영예를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서재필은 '회고갑신정변'에서 김옥균의 당시 심경을 이같이 대변했다. '김옥균은 서구가 몇 세기에 걸쳐 이룬 문명을 일본이 불과 한 세대에 달성한 사실을 알고는 일본을 모델로 하여 조선을 개혁시키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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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이어 그는 한때 조선이 열강에 휘둘리지 않는 영세중립국이 되기를 희망했는데, 이는 김옥균의 영향이라 밝혔다. '김옥균은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조선을 아세아의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그의 원대한 꿈이었고 유일한 야심이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믿고 우리의 책임을 완수하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이다.
111== 이완용에 대한 경멸 ==
112서재필은 평생 이완용을 경멸하였다. 서재필은 한때 이완용을 애국자라고 생각하였으나 그가 친러파와 친일파로 변신하자 그를 혐오하였다. 그는 한 때 독립협회장을 지내고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논설은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그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친러파가 되어 독립협회를 공격하고, 나중에는 한일 합방에도 참여하자 그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한층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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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본 문서 정보 ==
114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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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E%AC%ED%95%84|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