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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50 | 그는 학문을 연마하면서도 동리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서당을 열고 천자문과 소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독서와 학문을 좋아하여 천하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시문을 잘 지어서 묘사를 잘 하고 분방하였다. 그는 일찍이 탐진강과 영산강의 강물이 황해로 흐르는 것을 보며 바다는 산골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든 말과 소를 씻은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다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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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52 | 1438년(세종 20년) 21세의 나이에 시와 부로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가 그해의 진사시에도 모두 합격하여 바로 진사가 되었다. 그 뒤 초시에 장원한 뒤, 복시에도 장원하였다. |
| 53 | === 외교 활동 === | |
| 54 | 그 무렵 신숙주는 과로로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그 무렵 병이 나아 일어난 직후였다. 형제나 친구들이 여위고 피곤한 몸으로 어찌 먼 곳을 가겠느냐며 감당 못하리라 하여 힘써 말리고 저지하였으나 그는 자청해서 가겠다고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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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신하된 사람에게는 평탄하거나 험한 것이 한 가지이다. 어찌 제 몸이 편안할 것만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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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먼 길을 일가친척이 모두 말렸으나 신하된 사람으로 험하고 편한 것을 가릴 수 없다 하고 스스로 나섰다. 세종이 인견하면서 병이 들었다 하는데 갈 수 있겠느냐고 염려하자 그는 나아졌다며 어찌 회피하겠느냐며 일본으로 가기를 자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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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 1443년 2월 21일에 부사직이던 그는 다시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어 조선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 겸 종사관으로 선발, 통신사가 파견되자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고, 언어와 한자, 유학을 가르쳤다. [[일본]]을 여행할 때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들 감탄하였다.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되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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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 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을 50척, 세사미두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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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 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을 50척, 세사미두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 |
| 53 | 65 | == 사망 == |
| 54 | 66 | 1473년 충훈부 당상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1474년(성종 5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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