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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류:고령 신씨]] [[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조선의 학자]] [[분류:조선의 외교관]]
2||<-3><tablealign=right><tablewidth=420><tablebgcolor=#fff,#1c1d1f><tablebordercolor=#b82642><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3'''{{{#f0ad73 조선 종묘배향공신}}} [[영의정|{{{#f0ad73 영의정}}}]][br]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문충공(文忠公)[br]{{{+1 신숙주}}}[br]申叔舟'''}}} ||
4||<-3><nopad> [[사진|[[파일:신숙주 사진.jpg|width=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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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width=22%> '''출생''' ||1417년 8월 11일 ||
6||전라도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br](現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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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 '''[[사망|{{{#f0ad73 사망}}}]]''' ||1475년 8월 1일 (향년 5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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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
9||<-2> '''[[묘소|{{{#f0ad73 묘소}}}]]'''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 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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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본관''' ||[[고령 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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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28대 영의정부사 → 영의정 ||
12||1462년 6월 26일 ~ 1466년 6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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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bgcolor=#f5f5f5,#2d2f34>제40대 [[영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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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471년 12월 13일 ~ 1475년 8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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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국적|{{{#f0ad73 국적}}}]]''' ||[[파일:조선 국기.png|width=20px]]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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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width=9%> '''이름''' ||<width=70><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호''' ||보한재, 희현당 ||
17|| '''자''' ||범옹 ||
18|| '''봉호''' ||고령군 → 고령부원군 ||
19|| '''시호''' ||문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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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학력''' ||1439년 친시문과 을과 급제[br]1447년 중시문과 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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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가족''' ||아버지 신장, 어머니 나주 정씨 정유의 딸[br]형 신맹주, 신중주[br]남동생 신송주, 신말주[br]여동생 창녕 조씨 조효문의 처, 화순 최씨 최선복의 처[br]배우자 무송 윤씨[br]자녀 9남 2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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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종교|{{{#f0ad73 종교}}}]]''' ||유교 {{{-2 (성리학)}}} ||
2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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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개요 ==
26신숙주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문신·[[정치인|정치가]]이며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27== 상세 ==
28본관은 고령(高靈), 자(字)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장(申檣)의 아들이자 윤회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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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438년(세종 20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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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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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사육신과 함께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결국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 이후 [[단종(조선)|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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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 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회, 정인지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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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생애 ==
381417년(태종 17년) 음력 6월 20일 희현당 신숙주는 고령신씨 신포시의 손자이며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의 아들로 그의 외가가 있던 전라남도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주 정씨는 지성주군사를 지낸 정유의 딸이다. 위로 형 신맹주, 신중주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인 신송주·신말주가 태어났다. 또한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인 부부인 신씨는 신숙주의 삼촌 신평의 딸로, 신숙주는 연산군에게는 외외재종조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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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그의 조상들은 본래 경상북도 고령현의 향리였으나 신숙주의 7대조가 되는 신성용이 처음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 벼슬이 검교 군기감에 이르렀다. 증조부 신덕린은 전의 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신포시는 공조참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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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아버지 신장은 남에게 맞서기를 싫어하는 온화한 성품의 문인이었으나 술을 좋아하였는데 동료 문인인 허조는 "이런 어진 사람을 오직 술이 해쳤다."며 한탄할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사람됨이 온후하고 공순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사장(詞章)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므로, 임금이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가도록 친히 명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신장은 아들들의 이름에 술을 뜻하는 의미의 주 자를 붙였는데, 다섯 아들들의 이름이 신맹주·신중주·신숙주·신송주·신말주였다. 아버지가 관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고향 나주를 떠나 본가인 한성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신장은 글씨를 잘 썼는데 숭례문의 현판 글씨 중 하나는 그의 글씨체라는 전설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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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동생 신말주의 손자 신공섭은 조선후기의 유명한 화가 신윤복의 선조로, 신윤복은 신공섭의 서자 신수진의 7대손이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의 직계 18대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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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신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기억력이 남달랐다. 자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는 했다. 성격은 침착하여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 말을 하였다. 신숙주는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는데, 글재주에 뛰어났다. 뒤에 윤회와 정인지의 문인이 되어 그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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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첫 스승인 윤회는 하륜과 정도전의 문인으로, 그를 통해 이색과 백이정, 안향의 학통을 사사하였다. 뒤에 그는 스승 윤회의 손녀사위가 되는데, 신숙주는 윤회의 아들인 증 영의정부사 윤경연의 딸 무송윤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뒤이어 정인지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는데 그를 통해 정몽주의 학문도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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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그는 학문을 연마하면서도 동리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서당을 열고 천자문과 소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독서와 학문을 좋아하여 천하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시문을 잘 지어서 묘사를 잘 하고 분방하였다. 그는 일찍이 탐진강과 영산강의 강물이 황해로 흐르는 것을 보며 바다는 산골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든 말과 소를 씻은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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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438년(세종 20년) 21세의 나이에 시와 부로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가 그해의 진사시에도 모두 합격하여 바로 진사가 되었다. 그 뒤 초시에 장원한 뒤, 복시에도 장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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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외교 활동 ===
54그 무렵 신숙주는 과로로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그 무렵 병이 나아 일어난 직후였다. 형제나 친구들이 여위고 피곤한 몸으로 어찌 먼 곳을 가겠느냐며 감당 못하리라 하여 힘써 말리고 저지하였으나 그는 자청해서 가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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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신하된 사람에게는 평탄하거나 험한 것이 한 가지이다. 어찌 제 몸이 편안할 것만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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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먼 길을 일가친척이 모두 말렸으나 신하된 사람으로 험하고 편한 것을 가릴 수 없다 하고 스스로 나섰다. 세종이 인견하면서 병이 들었다 하는데 갈 수 있겠느냐고 염려하자 그는 나아졌다며 어찌 회피하겠느냐며 일본으로 가기를 자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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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443년 2월 21일에 부사직이던 그는 다시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어 조선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 겸 종사관으로 선발, 통신사가 파견되자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고, 언어와 한자, 유학을 가르쳤다. [[일본]]을 여행할 때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들 감탄하였다.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되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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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을 50척, 세사미두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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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을 50척, 세사미두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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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사망 ==
661473년 충훈부 당상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1474년(성종 5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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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474년 4월 24일 공혜왕후의 국상 시 국장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그해 6월까지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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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475년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계속 영의정직에 있었다. 왕이 그에게 특별히 궤장과 안대를 하사하려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궤장을 받을 나이는 아니라며 조용히 사양하였다. 한편으로 일본과 여진을 경계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주력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임종 직전에 문병 온 성종이 조언을 묻자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하였다. 그러고는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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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서예로도 재능을 발휘해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그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고 등의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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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많은 시와 다양한 저작과 작품을 남겼으나 후일 사림파에 의해 역적으로 단죄되면서 그의 저서와 작품, 시, 글씨들 중에는 중종 때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다수 소각되거나 인멸되었다. 또한 그가 사후 변절자, 배신자로 매도당하면서 그의 작품과 저서, 시, 그림 등은 대부분 외면당하고 말았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저서인 보한재집, 북정록, 사성통고, 농산축목서, 해동제국기 등이 있고, 글씨로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의 찬문과 해서체의 작품 화명사예겸시고 등이 현전한다. 특히 보한재집은 1644년(인조 22년) 신숙주의 6대손인 신숙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문집의 완질을 빌려서 모사한 것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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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사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현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에 안장되었으며 부인 무송군부인 무송윤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후일 그의 자손들 묘소도 근처에 조성되면서 묘역이 되었다. 묘비문은 이승소가 썼고, 신도비문은 정난종이 찬하였다. 이후 종의 묘정에 종사되고, 문충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충북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 청주시 낭성면 관정리의 묵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보사공신, 좌리공신 등에 책록되었으므로 성종은 그에게 부조지전을 내려 불천지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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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그의 초상화는 1445년경 명나라 화공에 의해 그려진 저본설색에 견장족자로 된 영정과 15세기 후반, 사망 직후에 그려진 영정, 1445년 명나라화가본 및 기타 영정들을 참고로 그린 1749년본 영정 등이 전한다. 1445년경 명나라 화공본 영정은 현 청주시에 위치한 구봉영당에 봉안되어 있다가 1970년 이후 공개되었고, 모사본은 묵정영당과 고잔묘 등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 중 1445년에 명나라 화가가 그린 원본 신숙주 영정은 1977년 11월 15일 [[대한민국]] 보물 제 61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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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업적 ==
80그는 다국어에 능하였고, 탁월한 학식과 문재로써 다양한 책을 편찬하고 역사적, 학문적 소양이 깊어 학문 교육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는 유교의 사서육경 외에도 풍수지리학과 노장 사상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세조의 문화 통치를 위해 왕들의 귀감이 될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하였으며, 사서 오경의 구결을 새로이 만들었다. 또한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동국통감의 편찬을 총괄하였고, 동국정운, 영모록 등을 찬수하였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일본에 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 온 후 몇번 일본을 왕래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 이를 토대로 일본의 풍물과 관습, 언어, 정치 세력, 일본의 기후, 자연 조건, 일본과의 외교시 필요한 사항 등을 상세하게 밝혀 놓은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여 향후 일본과의 교린외교에 참고가 되게 하였다. 또 신숙주는 그림을 잘 그려서 일본과 여진의 지도, 베이징의 지도를 만들었으나 후에 모두 실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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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그의 저서 중 사성통고는 후대에 실전되었지만, 중종 때의 한어 통역관이자 언어학자인 최세진이 그의 사성통고를 참조하여 사성통해를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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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그는 퇴청 후에도 별도의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길러냈다. 세조 때에 과거 시험의 주시관을 13회나 과거 시험을 하여 합격자들을 선발하여, 좌주 문생관계를 형성하니 직접 길러낸 제자들 외에도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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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또한 훈민정음의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 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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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평가 ==
88=== 긍정적 ===
89사돈이기도 한 용재 이행은 그를 많은 지식을 집대성하고 실전, 실무에 적용시키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연구에 오래 참여하였고 집현전에 근무하는 동안 퇴근도 잊고 독서실에서 연구로 밤을 새는 일이 허다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당직을 자청하였고 당직이 아니라도 서고에서 날을 새는 그의 열정을 세종은 높이 평가했다. 세종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신숙주는 문무에 두루 능하여 국사를 부탁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고,[2] 세조를 만나서는 계책이 행해지고 말은 받아들여졌다. 세종과 세조는 그를 각별히 신뢰하여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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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건국 초기 불편했던 조일 관계를 정상화시켰고, 강원도와 함길도의 체찰사로 파견되어 여진]의 침략을 막았으며, 몇 십 년 동안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 국가에 봉사하는 등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어학자, 외교가, 저술가, 번역가, 경륜가, 군사전문가, 명재상으로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세조의 반정공신이라는 이유로 사림파에 의해 그 공로가 폄하되었다. 왕정의 비능률성이 인위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신숙주가 일신의 영달 만을 도모했다고 보기는 어렵는 견해도 있다. 사후 50년 뒤에 편찬된 1525년의 용재총화에는 신숙주를 가리켜 '그 문장과 도덕에서 모두 일대의 존경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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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그는 정난에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아 한글 연구와 보급, 전승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대의를 따른 과감한 인사라는 평가도 있다. 그는 세조가 즉위하는 것을 돕고 많은 중요한 직책에 올랐기 때문에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가장 위대한 신하 중 하나였고, 훈민정음을 창조할 때 크게 공헌한 신하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에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의 공이 있다는 얘기는 어떤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94=== 부정적 ===
95성종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신숙주는 세종의 유언을 저버린 배신자, 동료들을 배신한 변절자로 지목되어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이라는 용어는 중종 이후 사림파가 만들었다. 이는 사림파의 대의 명분이라는 가치관에 입각한 폄하였다. 또한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출처불명의 소문이 돌면서 김시습 등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세조의 공신으로 있을 때는 왕의 뜻에만 편승하여 승순만을 힘썼고, 예종 때에는 형벌을 내릴 때 공정함을 잃었으며, 남이와 강순의 억울함을 구제하지 않았다 하여 당대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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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유자광 등이 남이를 처형할 때 동조한 점 역시, 남이에 대한 동정론과 함께 맞물려서 그에 대한 비난의 소재의 하나로 활용됐다. 민족적 절의를 고양시킬 필요가 절실했던 일제강점기에는 쓰여진 일종의 비공식 역사서인 김택영의 한사경에는 세조 즉위 전후의 생사를 오가는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신숙주가 미모에 끌려 단종비 송씨를 노비로 들이겠다고 청했다는 허구적이면서도 다소 선정적인 이야기가 등장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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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한때 신숙주는 지조와 의리가 강조되던 시대에 쓰여진 이광수의 단종애사 나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 목메이는 여자 등의 작품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단종애사는 널리 읽히는 소설이었고 이는 광복 이후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단종애사의 유행 역시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는 사람들이 드라마와 야사,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만을 신뢰하여 신숙주를 일방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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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또한 소설 단종애사 속에서 절개를 지키지 않은 남편을 부끄러워해 부인 윤씨가 자살했다는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윤씨는 자연사로 죽었으며 사망 시기도 신숙주가 사신으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이었다.
102===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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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한 후로 그에 대한 비판은 다소 수그러들었고,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조명 여론도 나타났다. 그의 묘소인 경기도 의정부의 신숙주 묘는 1970년대까지도 버려졌다가 1980년 이후부터 신숙주의 역할에 대한 조명과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면서 비로소 사료와 신숙주의 작품, 저서들도 정리, 재출간되고 버려져 있던 묘소도 정비되었다. 전남 나주군 오룡동에 있던 그의 외가와 생가도 [[대한민국]] 수립 이후 1980년대부터 성역화와 재정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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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한글학회에서는 1971년 10월 9일 한글날에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53번지에 위치한 신숙주 묘정에다 ‘한글 창제 사적비’를 건립했다. 충북 청원군(현재는 청주시로 승격)에서는 신숙주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 등을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 하였다. 문화관광부는 2002년도 10월의 문화인물로 신숙주를 선정했다. 2007년 9월 15일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고잔리에 신숙주 문학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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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묘소는 의정부 교도소 건너편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에 있다.
108== 여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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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 신숙주에게는 평생 그를 주변에서 호위하며 미래를 예지해준 청의동자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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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 세조는 그를 놀려줄 생각으로 구치관을 불러서 구정승이라 불렀다. 그러자 구치관이 대답하자 구 정승을 불렀는데 왜 새 정승이 대답하느냐며 구치관, 신숙주에게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신정승을 부르자 신숙주가 대답했는데 새 정승을 불렀는데 신숙주가 대답했다며 벌주를 내렸다. 구정승을 부르자 신숙주가 대답하자 구 정승을 불렀는데 신숙주가 대답했다며 벌주를 내렸고, 신정승을 찾아 구치관이 답하자 신 정승을 찾았는데 구정승이 답한다며 벌주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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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 한번은 신숙주가 술좌석에서 세조의 비위를 건드리는 발언을 하였다. 화가 난 세조는 참고 있었는데, 그는 평소 새벽에도 일어나 책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한명회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왕이 사람을 보낼 것이니 불을 끄고 자라고 일러주었다. 그 날 새벽 그는 책을 읽지 않고 불을 끄고 있었고, 세조가 보낸 승지와 내관은 그가 취해서 자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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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 야사에 의하면 그는 노비가 된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를 자신의 집 노비로 달라고 세조에게 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이는 소문으로만 전해지다가 후에 김택영은 자신의 저서 한사경에 이 야사를 기록해두었고, 후일 일제강점기 때 문인 춘원 이광수는 자신의 작품 단종애사에 이 야사를 수록하여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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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본 문서 정보 ==
117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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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88%99%EC%A3%BC|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