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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사건 당시 경찰은 범행 발생 나흘 후인 1947년 7월 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필형)이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체포 후 한지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애국투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배후는 밝히지 않았다. 1974년 2월 공소시효가 지나자 유순필, 김흥성, 김훈, 김영성이라는 사람들이 서울지검에 출두해 "자신들이 몽양 암살에 가담했다."고 자백한다. 이들은 "민족분열의 책임자는 여운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극우 테러단체인 혁신탐정사와 비밀결사 백의사로부터 입수한 권총 2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한지근은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와 친분이 있는 사이이고, 사건 발생후 권총과 실탄 10발을 한현우 집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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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 역시 배후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여운형의 암살 배경과 그 배후는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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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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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의 주요 사상은 민족 자주 사상, 좌우 합작 사상, 민생 안전•사회 개혁 사상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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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자주 사상'''은 여운형은 무엇보다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을 중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해방 후에도 미국이나 소련 어느 한쪽에 종속되지 않고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강권했다. 그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세우며 "조선은 조선인의 손으로 세워야 한다"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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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합작 사상'''은 해방 직후 사회는 좌익(사회주의 계열)과 우익(민족주의·자유주의 계열)으로 극렬히 갈라져 있었는데, 여운형은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좌익과 우익의 통합(좌우 합작)을 추진하여, 민족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로 뭉쳐 독립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좌익 세력과 협력하는 동시에, 김규식 등 중도 우파 인사와도 긴밀히 협력했으며, 미소공동위원회 시절에도 좌우 합작 운동의 핵심 지도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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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 안정·사회개혁 사상'''은 여운형은 독립 후 조선 사회가 민생 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혼란 속에 굶주림과 실업이 확산되자, 그는 토지개혁, 경제 민주화, 노동자 권익 보호 등을 통해 민중이 안정된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단순히 정치적 독립뿐만 아니라,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정의를 수립해야 진정한 독립이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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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통일 지향 사상'''은 여운형은 해방 직후부터 남북이 분단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그는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체제를 강요받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된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특히 미국·소련의 냉전 구도 속에서도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고, 중도적 입장에서 민족의 통일을 도모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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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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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부터 술과 담배를 배워서 주량이 근동에 소문이 날 정도였으나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면서 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 담배를 않겠다며 끊었다고 한다. 독립이후 친지들이 이젠 마시라며 권했지만 나라가 통일된 다음에 마시고 피우겠다며 사양하였다고 한다. 연설하면서 자신은 술, 담배는 냄새만 맡아도 골치아프다고 한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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