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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 90 | 파병기간 중 패전도 없었는데 예하 군 장병들로부터 인망은 크게 잃었다.(특히 식수가 부족한데도 혼자 진중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업무를 전부 회식으로 도배하거나 암시장에서 무기를 사와 전리품으로 상부에 보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귀국과 함께 훈장을 주려 했으나, 월남전에서의 그의 직속상관들은 그의 훈장수여를 반대하였다.) 1971년 11월 귀국하였다. 이때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일본에서 3대오물로 유명한)츠지 마사노부라는 일본군 대위가 있었다. 그는 동남아 일대를 돌며 나쁜 것은 하나도 배우지 않았어, 돌아다닌 나라의 지형과 풍속을 그는 소상이 머리에 넣고 왔지, 전쟁이 일어나자 그 대위의 정보만으로 일본은 초기의 태평양전쟁을 수유히 수행했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왔다. |
91 | 91 | == 10•26 사태 전 후 == |
92 |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건[ | |
92 |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건[* 10·26 사건 또는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朴正熙大統領被擊事件), 궁정동 사건(宮井洞事件)은 1979년 10월 26일에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및 안가 경비원들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차지철 경호실장, 정인형 대통령 경호처장, 안재송 대통령 경호부처장, 김용섭 대통령 경호관, 김용태 대통령 경호실 차량운행계장 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했다. 이 날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의 설치 기안을 명령했다. 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유고안이 내려졌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자 전두환 소장은 곧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돼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수사 지시 명령을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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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 94 | 10월 27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 국내담당차장 전재덕, 검찰청 총장 오탁근, 치안본부장 손달용 등을 보안사 2층 사령관 접견실로 불렀다.[31] 전두환은 이들을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했으며, 상석에 앉아 박정희의 서거를 알린 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고 지목하고 박준광 육군 소령을 통해서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곧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에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합수본부의 허가를 받으면 집행할 수 있다'라며 행동에 제한을 두었다. 그 뒤 "앞으로 모든 정보 보고는 오후 5시, 오전 8시에 합수부에 제출하라"라고 지시했다. "정보부는 전재덕 차장이 당분간 장악하라" 라고 지시했다가 선임자가 해외담당차장임을 알고는 수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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