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1 vs r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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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영조 51년) 봄, 영조는 82세의 나이로 노환에 시달려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그러나 세손이 대리청정을 할 경우 입지가 궁색하게 될 것을 염려한 노론 벽파는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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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자의 나이는 24세였다. 영조는 홍인한을 파직시키고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겨 대리청정을 맡겼다. 장조(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홍계회, 김상로, 정후겸, 김귀주 등 노론 벽파는 정조의 즉위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영조는 세손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때 세자시강원의 홍국영이 이들을 탄핵하여 세손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영조 또한 순감군의 수점권을 세자에게 주어 만약을 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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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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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정조 24) 음력 6월 초 정조는 종기를 앓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종기는 얼굴과 등으로 번졌고 종기의 크기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피고름이 나올 정도로 상태가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좌의정 심환지와 우의정 이시수의 지휘 아래의 내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여 치료하였고, 정조 역시 매번 처방을 묻고 확인하였다. 정조는 차도가 없자 수은 증기를 쐬는 연훈방을 받기로 하였고, 연훈방을 시술하면서 탕약도 곁들였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하여 미음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은 정조는 음력 6월 28일 유시 (양력 8월 18일 오후 5시 ~ 7시) 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정조가 죽자 어의 강명길은 죽임을 당한다. 정조가 승하하기에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 (상복을 입은 벼)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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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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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정조 24) 음력 6월 초 정조는 종기를 앓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종기는 얼굴과 등으로 번졌고 종기의 크기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피고름이 나올 정도로 상태가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좌의정 심환지와 우의정 이시수의 지휘 아래의 내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여 치료하였고, 정조 역시 매번 처방을 묻고 확인하였다. 정조는 차도가 없자 수은 증기를 쐬는 연훈방을 받기로 하였고, 연훈방을 시술하면서 탕약도 곁들였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하여 미음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은 정조는 음력 6월 28일 유시 (양력 8월 18일 오후 5시 ~ 7시) 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정조가 죽자 어의 강명길은 죽임을 당한다. 정조가 승하하기에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 (상복을 입은 벼)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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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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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사후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그 근거는 연훈방을 써서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방법을 주선한 심환지와 이시수가 노론의 벽파라는 것과 정순왕후가 정조를 독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가 사망하였다는 것이 이러한 독살설을 부추겼다. 남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정황 때문에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파다하였다. 정약용은 솔피시를 지어 이러한 독살설을 은유적으로 암시했다. 그 해 8월 18일 경상도 안동의 남인 출신 거족 여현 장현광의 후손 장현경과 그의 친족인 장시경 3형제 등은 정조의 독살을 주장하며 원수를 갚겠다고 거병하였다가 실패하고 일족이 처형당하였다.정약용은 여성 유배인이 현지에서 성희롱을 당하는 일을 개탄한 고금도장씨녀자사를 적으면서 심환지가 심인을 추천하여 정조를 독살하였다는 의심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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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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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동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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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또한 아이들에 대한 정책들을 제시하였다."모든 부모들은 아이들을 임금님을 대하듯이 우러보아야 하며 이는 아이들이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라는 이 말은 실천 되고있지 않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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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의 권한이 커지고 실제 정조의 친위세력으로 등장하자 반대파의 반발 역시 끊임 없이 제기되었다. 1782년(정조 6년), 이택징은 상소를 올려 규장각의 각신은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이지 조정의 신하가 아니며 일이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경비를 많이 쓴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외척이 발호하여 자신을 해치려 하였기에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규장각에서 인재를 살펴 사대부를 가려뽑아 직책에 발탁하고 퇴폐한 문풍을 진착시키기 위해 규장각을 운용한 것이니 결코 폐지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이는 규장각의 설치가 근위세력 육성임을 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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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규장각의 검서와 초계문신 가운데는 당대에 실학을 주장한 문인들로 북학파나 남인 실학자들이 많았지만, 정조는 이들의 문체나 사상에 공감하지는 못하였다. 정조는 새로운 문체로 지어진 글들을 잡스럽다고 비판하였고, 문체반정을 통해 옛 문체를 지키지 않은 글을 쓴 문인들에게 자송문(반성문)을 지어 올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박제가는 자송문을 지어 올리라는 이덕무의 권유에 “학식이 높지 않은 것은 분명 제 잘못이나 남과 다른 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 소금과 매실에게 왜 너희는 기장과 좁쌀과 같지 않느냐하고 책망하면 …… 이로 인해 천하의 맛있는 음식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답하여 불만을 드러내었고, 당시 재야에 있었으나 박제가 등과 교류가 깊었던 박지원은 “견책을 당한 사람이 새로 글을 지어 이전의 잘못을 덮을 수 없다”며 끝내 자송문을 쓰지 않았다.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진작시키고자 한 것은 새로운 학문이 아니라 성리학에 기반한 옛 사상의 부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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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통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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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통편은 1785년(정조 9년) 발간된 법전으로, 정조는 대전통편의 편찬에 관심을 기울이고 직접 편찬 사업에 관여, 보고를 받았다. 대전통편은 모두 723조로서, 그 가운데 이전이 2112조, 호전(戶典)이 73조, 예전이 101조, 병전이 265조, 형전이 60조, 공전이 12조 등이다. 조선의 법제는 경국대전 이후 대전속록(1492년)이나 경국대전주해(1555년)와 같이 해석이 어려운 조항에 주를 달거나 판례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정비되어 오다가, 영조 대인 1746년에 이르러 경국대전 가운데 영구히 지킬것을 가려 속대전을 만들었다. 속대전에는 탕평책 추진으로 인한 권력구조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정조는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통합하여 대전통편을 만들면서 각각의 조항에 대해 경국대전의 것은 원, 속대전의 것은 속, 그 이후에 재정한 조항은 증으로 표시하는 한편, 폐지한 조문도 그대로 실으면서 그 아래에 금폐라 표기하였다. 대전통편은 새롭게 도입한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가 한층 강화된 법령이었다. 대전통편 은 이후 고종 2년(1865년) 대전회통이 발간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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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한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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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조정의 중신들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어 막후에서 정치를 조정하였다. 정조가 보낸 편지 가운데 현재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채제공, 조심태, 홍낙임, 심환지 등에게 보낸 것이 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 문제를 논의하고, 상소로 제기된 민감한 현안이나 인사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가하면, 자신의 건강 상태, 신하의 대소사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정조의 편지는 대부분 직접 쓴 것으로 봉인하여 비밀리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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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새로운 문체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박지원을 지목하여 연암체라 지목하며 문체반정을 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편지글에서 비속어, 속담, 욕설, 이두 등을 가감없이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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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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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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