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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상세3. 개신교의 기원4. 전통5. 대한민국의 개신교6.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개신교 또는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은 16세기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교회의 개혁가들의 종교개혁을 통해 생겨난 기독교의 한 전통이다.

2. 상세[편집]

11세기 교회 대분열로 공교회(보편교회) 중심이었던 지금의 동방교회에서 서방교회가 분리되었고, 이후 16세기 서방교회 내에서 종교 개혁 운동의 '반대파'인 천주교회와 '찬성파'인 개신교가 분리되었다. 이후 기독교의 가장 주된 종파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에서 정교회, 천주교회, 개신교회로 형성되었다.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정통적인 프로테스탄트는 루터교,개혁파(장로교회,개혁교회),성공회가 있다. 감리교,오순절교회,성결교는 추후에 생겨났다.

대한민국에서 말하는 '기독교', '교회'는 일반적으로 '개신교'를 가리킨다.

16세기 서방교회의 사회, 정치적 문제로 인한 개혁, 즉 종교개혁 요구에 대하여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었고, 서방교회의 종교개혁을 찬성하고 주도한 성직자들이 '개신교회'로, 서방교회 종교개혁을 반대하고 기존 제도를 지지한 성직자들은 '천주교회'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루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나, 사실 10세기 창부정치에 대한 비판, 12세기 정치화한 서방교회에 대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정화 운동, 14세기 아비뇽 유수 사건 비판 등으로 서방교회 개혁 주장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5세기와 16세기 서방교회의 심각한 문제로 인해 루터 전후에 다양한 지역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운동들이 전개되었다. 개신교는 초창기에는 특정 교파를 중심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복음'을 다시 회복하고 '복음'을 교회의 중심에 두고자 하는 변혁 활동으로 서방교회 내부의 기독교 운동이었다.

유럽지역에서 유럽 본토인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지역에서는 개혁반대파 전통고수의 교황중심주의자들이 '복음주의'로 개혁 찬성파들의 주장을 지적하며 찬성파를 '복음주의자'로 칭했으며, 현재도 유럽 본토에서 '복음주의 교회'는 개신교회 전체를 의미한다. 영국 지역에서는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와 연계된 정치제도에 '항의(Protest)'하며 등장한 모든 운동과 전통을 가리키며 항의자를 뜻하는 '프로테스턴트'(protestant)로 칭하였고, 영어권에서 현재 개신교회 전체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한다.

3. 개신교의 기원[편집]

'개신교(改新敎)'라는 표현은 고칠 개(改)와 새롭게 할 新을 쓴 한자어 표현 즉 종교개혁 전통을 강조한 표현이다.

개신교도를 16세기에 칭하던 용어인 '복음주의자', '복음주의'(Evangelicalism)를 개신교로 사용하기도 한다. 유럽지역에서 사용하는 '에반겔리세'(Evangelische)라는 용어는 개신교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16세기 전통 복음주의와 19세기에 영미의 보수적 개신교회가 중도 및 진보적 개신교회와 분리하기 위해서 자칭하는 용어에서 등장한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에서 주장하는 복음주의와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개신교를 뜻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자'의 의미)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곳이 독일의 슈파이어(Speyer)이다.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Reformation)이 1517년에 시작되었다. 1529년 증오심을 가진 가톨릭 실세들과 독일 제국의 일부 군주들이 슈파이어에 모여 제국 의회를 열고 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는 루터주의자들의 활동을 복음주의자로 부르지 않고, 제국회의의 의회의 지침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지칭하며 사용했고, 이 활동을 금지하는 행위로 포고문에 기록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샤를르5세(카를로스5세) 치하에서였다. 슈파이어 의회(Diet of Speyer)의 명목상 목적은 터키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키 위해 모인 회의였지만, 실제로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거나 추종자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복음주의자, 즉 프로테스탄트의 탄생은 종교개혁가들을 핍박하려고 했지만 그들이 칼 5세에게 교황파, 즉 종교개혁 반대파들의 주장이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항의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김현배에 따르면 제국 의회는 더 이상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공포하면서, 명령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황제의 처벌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또한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1521년 5월 ‘보름스 칙령’을 강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압박하였다. 이에 루터의 추종자들은 다수의 가톨릭파에 의해 결정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의사항을 반대하였다. 루터 지지파 제후들 역시 침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종교개혁 진영 전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판단했으며,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권위에 복종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그들은 루터파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던 1526년 의회 결정을 유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1529년 4월 25일,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칼 5세의 종교정책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문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일치단결해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정에 대해 황제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황제와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항거했으나 이들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항의한 사람들은 “Protestant”(항의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것이 현재 영어권과 대한민국의 '개신교'가 되었다. 당시 항의서에는 작센의 선제후 요하네스, 헤센의 영주 필립, 브란덴부르크-안스바하의 게오르크, 뤼네부르크의 에른스트, 안할트의 볼프강 등 5명의 군주들과 독일 14개 제국 도시들의 대표들이 서명했다.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지했던 '복음주의자'들이다. 14개 도시는 스트라스부르크, 뉘른베르크, 울름, 콘스탄츠, 린다우, 켐프텐, 뇌르들링엔, 하일브론, 이스니, 생 갈렌, 로이틀링엔, 바이센부르크, 빈추하임, 멤밍엔 등이다.

4. 전통[편집]

개신교회의 신앙고백은 믿음의 새로운 조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서 안에 증언된 복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방법이므로 서방교회의 신학적 기반과 보편교회 신학적 전통을 성서에 비추어 올바른 교리와 제도를 재조명하였고 서방교회 전통 중 성경에 따르지 않는 조항은 폐기하였다. 초대교회와 보편교회의 신앙고백과 서방교회 전통 중 개신교 신앙고백에 따라 새롭게 조명된 교회 전통과 새롭게 형성된 교회의 역할을 개신교회의 전통으로 본다. 교회구조 이해, 성찬식의 변화, 교회학교, 성경 연구, 사회운동에서 사회제도까지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여기서는 종교적 사안인 교회 전통으로만 좁혀서 종교개혁 신학, 성찬 예식, 교회 구조, 성직자 이해, 성경 연구만을 범위로 살펴본다.
개신교회의 전통은 종교개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복음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온건적 개혁과 급진적 개혁의 주장이 등장하였다. 온건적 개혁의 '개선주의' 신학과 급진적 개혁의 '재건주의' 신학의 흐름이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점차 구분되었다. 종교개혁 초기 시절에 초대 교회와 공교회의 전통을 따라 서방교회의 전통의 잘못을 개선하고자 하는 '개선주의' 신학으로 루터를 따르는 루터교회가 형성되었다. 초대 교회와 공교회 전통을 강조하며 서방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재건주의' 신학에서 츠빙글리, 칼빈 등을 통해 '개혁교회'와 급진적 재건주의인 '재세례파 교회'가 형성되었다.

이후 개선주의 신학적 교단으로 루터교회를 필두로 성공회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구세군교회, 오순절교회 등이 형성되었고, 재건주의 신학적 교단으로 개혁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회중교회, 퀘이커 교회, 메노나이트 교회 등이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주요 교단 형성의 신학적 배경 이외에도 시대적인 신학적 흐름과 변화인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오순절주의, 미국의 대각성 (운동) 같은 흐름들도 모두 개신교 전통에 포함된다. 이처럼 정교회나 천주교에 비해 다양한 흐름들이 공존하고 서로 영향을 주며 분류/합류되는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개신교 내의 교파 분열의 역사와 신학 논쟁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복잡하지만, 대체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동의, 수직적이고 계층적인 성직 구조나 정치제도 보다는 만인 제사장설을 따르는 성직 이해와 그에 따른 교회제도인 감독제(루터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등)와 원로제(개혁교회 장로교회 등), 회중제(회중교회, 침례교회 등)의 다양한 교회제도를 채택하였다. 성서에 나오지 않는 성례전에 대한 반대(천주교회는 세례, 성체, 고백, 견진, 혼배 등 7개, 개신교의 성례전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성만찬, 세례 2개이며 그 외는 예식임) 등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5. 대한민국의 개신교[편집]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여러 차례 외국 선교사들이 선교를 시도했지만 직접적인 선교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만주 지역에 있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전도가 이루어졌다. 조선의 개신교는 신앙 공동체 형성 직후부터 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1882년 함경도 방언으로 된 <예수성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했다.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 전래는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1883년 이수정이 일본에서 야스가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글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해 1885년에는 〈마가의 전복음셔언해〉을 출판해 냈다. 성서를 한글로 옮긴 실천은 일본에서 체류하고 있던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선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수정은 미국에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1885년 4월 5일 같은 날 장로교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광혜원을 설립하였고, 아펜젤러 목사는 배재학당(現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밖에 침례교는 캐나다의 맬콤 팬윅에 의해 전래되었으며,재림교회(또는 안식일교회, 안식교회)는 1904년 이응현, 손흥조가 하와이로 이민 도중 일본 고베에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들어왔다. 1905년 구세군교회도 구세군 사관 허가두 중령에 의해 들어왔다. 한국의 자생 개신교단으로 1935년에 설립된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있다. 한국에서는 개신교와 기독교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교를 뜻하므로 개신교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