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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편집]
취임 초 노무현은 노무현 정부, 즉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은 크게 12개의 국정 과제로 제시됐다. 외교안보 분야와 정치행정 분야의 기조로 부패 없는 사회 봉사하는 행정, 지방 분권과 국가 균형 발전, 참여와 통합의 정치 개혁이 경제 분야에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 미래를 열어가는 농어촌이 제시되었다. 사회 문화 여성 보건 분야로는 참여복지와 삶의 질 향상, 교육 개혁과 지식문화 강국 실현, 국민 통합과 양성평등의 구현, 사회 통합적 노사관계 구축 등을 제시하였다.
2. 외교정책[편집]
외교 방식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표방하였다.
그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영국, 스페인 국빈 방문과 동남아시아, 남미,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바티칸 순방을 위한 23차례에 걸쳐 총 49개국을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국가는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6개국이다.
그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영국, 스페인 국빈 방문과 동남아시아, 남미,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바티칸 순방을 위한 23차례에 걸쳐 총 49개국을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국가는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6개국이다.
2.1. 대미 관계[편집]
그는 대선 전부터 반미주의자로 여겨졌는데,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는 약점보다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 협정 등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은 "미국에 할 말은 한다"며 대미 관계에 있어 독자노선을 갈 것처럼 보였다.
당시 미국은 조지 W. 부시를 위시한 네오콘이 장기 집권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참여정부와 미국 정부와의 정책적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취임 후 부시 행정부와 대북 정책의 입장 차이가 발생하자 미국의 공화당 보수파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에 가세하여 그를 좌파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대북 정책 이외엔 독자노선을 걸었던 흔적은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부시 행정부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 문제, 한미 FTA의 추진 등에서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실리는 챙기지 못했다.
2007년 9월 호주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당시 노무현은 부시에게 "평화조약에 대해 더 분명히 말해 달라"고 여러 차례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요구를 하자, 부시가 짜증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워싱턴 정가의 소식을 전하는 넬슨리포트는 "노 대통령의 의전상 결례에 대해 부시 대통령뿐 아니라 현장의 (미국) 기자들도 놀란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 양국의 외교관들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두 정상 간의 껄끄러운 궁합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2008년 2월 마이클 그린 전 미 NSC 선임보좌관은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노 대통령은 미국·영국 다음 가는 대규모 이라크 파병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등 정책적으로 한미 동맹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라고 평가하였다.
당시 미국은 조지 W. 부시를 위시한 네오콘이 장기 집권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참여정부와 미국 정부와의 정책적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취임 후 부시 행정부와 대북 정책의 입장 차이가 발생하자 미국의 공화당 보수파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에 가세하여 그를 좌파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대북 정책 이외엔 독자노선을 걸었던 흔적은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부시 행정부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 문제, 한미 FTA의 추진 등에서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실리는 챙기지 못했다.
2007년 9월 호주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당시 노무현은 부시에게 "평화조약에 대해 더 분명히 말해 달라"고 여러 차례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요구를 하자, 부시가 짜증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워싱턴 정가의 소식을 전하는 넬슨리포트는 "노 대통령의 의전상 결례에 대해 부시 대통령뿐 아니라 현장의 (미국) 기자들도 놀란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 양국의 외교관들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두 정상 간의 껄끄러운 궁합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2008년 2월 마이클 그린 전 미 NSC 선임보좌관은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노 대통령은 미국·영국 다음 가는 대규모 이라크 파병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등 정책적으로 한미 동맹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라고 평가하였다.
2.2. 대일 관계[편집]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 추세에 맞물려서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4년 3·1절 치사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을 일으켰던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의 지도자(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문맥상 고이즈미를 가리킨다고 판단됨)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국민 감정을 대변하려는 것이었지만, 보수 언론 및 야당으로부터 감정적 대응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2005년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한국의 야당 의원들과의 대담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대북 유화 정책을 지속하려는 노무현 행정부를 비판하자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외교적 결례로서 공식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2006년 일본의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등 독도 문제에 관해 일본과의 긴장이 높아가자 4월 25일에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로도 점점 우경화되는 일본과 마찰을 빚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는 또 3월 23일에 일본의 행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태"로 규정하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날 침략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성토하면서 외교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2006년 11월 APEC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열린 아베 신조 총리와의 양자 회담에서 동해를 예를 들어 '평화의 바다' 또는 '우의의 바다'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 청와대가 확인했다. 그러나 청와대측은 정식으로 제안한 것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의 한 예로 든 것을 언론이 전격 제안으로 보도했다"라고 해명했다.
미국의 UPI 통신은 '한국, 동해를 놓고 제안을 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명칭)에 대한 타협안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평화의 바다'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했다"라고 보도했다.[80] 이 같은 제의는 외교ㆍ안보 라인과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은 돌출 발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문가들은 국제무대에서 국가 수장의 돌출 발언은 국익에 적잖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의 일관성 없는 대일 영유권 시각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81]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은 국민의 자존심과 역사의식에 상처를 입혔다"며 "반역사적 발언에 대해 깊이 반성하라"고 지적했다. 네티즌들도 "한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적절치 못한 역사관 표명이었다"며 노 전 대통령을 비난했었다. 2007년 10월 발행한 '2007 방위백서'의 한글 번역본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2003년 한일 정상회담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라며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었다. 일본 언론들이 이를 "한국 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했다는 식의 보도를 했다.[84]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도 논평에서 "일제 강점기 만행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가 '다케시마 문제'라고 질문에 언급해서 이를 받아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케시마'라는 언급이 한 번 있었다"면서 기자의 질문을 받아 대답하는 과정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표현했다고 이를 왜곡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2005년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한국의 야당 의원들과의 대담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대북 유화 정책을 지속하려는 노무현 행정부를 비판하자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외교적 결례로서 공식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2006년 일본의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등 독도 문제에 관해 일본과의 긴장이 높아가자 4월 25일에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로도 점점 우경화되는 일본과 마찰을 빚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는 또 3월 23일에 일본의 행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태"로 규정하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날 침략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성토하면서 외교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2006년 11월 APEC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열린 아베 신조 총리와의 양자 회담에서 동해를 예를 들어 '평화의 바다' 또는 '우의의 바다'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 청와대가 확인했다. 그러나 청와대측은 정식으로 제안한 것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의 한 예로 든 것을 언론이 전격 제안으로 보도했다"라고 해명했다.
미국의 UPI 통신은 '한국, 동해를 놓고 제안을 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명칭)에 대한 타협안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평화의 바다'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했다"라고 보도했다.[80] 이 같은 제의는 외교ㆍ안보 라인과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은 돌출 발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문가들은 국제무대에서 국가 수장의 돌출 발언은 국익에 적잖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의 일관성 없는 대일 영유권 시각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81]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은 국민의 자존심과 역사의식에 상처를 입혔다"며 "반역사적 발언에 대해 깊이 반성하라"고 지적했다. 네티즌들도 "한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적절치 못한 역사관 표명이었다"며 노 전 대통령을 비난했었다. 2007년 10월 발행한 '2007 방위백서'의 한글 번역본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2003년 한일 정상회담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라며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었다. 일본 언론들이 이를 "한국 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했다는 식의 보도를 했다.[84]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도 논평에서 "일제 강점기 만행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가 '다케시마 문제'라고 질문에 언급해서 이를 받아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케시마'라는 언급이 한 번 있었다"면서 기자의 질문을 받아 대답하는 과정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표현했다고 이를 왜곡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3.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