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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r3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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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이전·이후 대통령
김대중
노무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문노무현
文在寅 | Moon Jae In
파일:노무현 사진.jpg
신상 정보
출생
1946년 9월 1일
미 군정 조선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사망
2009년 5월 23일 (향년 62세)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 양산부산대학교병원
묘소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국적
학력
진영대창국민학교 졸업
진영중학교 졸업
부산상고 졸업
경력
대전지방법원 판사
제13·15대 국회의원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
가족
아버지 : 노판석
어머니 : 이순례
배우자 : 권양숙
자녀 : 노건호(아들), 노정연(딸)
종교
불교
군사 경력
복무
복무기간
1968년 ~ 1971년
소속
최종계급
상병
근무부대
대통령 정보
재임기간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
전임
김대중
후임
소속 정당
무소속
1. 개요2. 상세3. 생애4. 대통령 취임식5. 제16대 대통령6. 언론7. 종교8. 별명9.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10. 상훈11. 사망12. 평가13. 여담14.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노무현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2. 상세[편집]

판사로 재직 후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제13·1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김대중 정부에서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경상남도 김해 출생이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는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려 대통령 당선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에는 "대통령 못 해먹겠다",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며 보수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합법화, 국가보안법 폐지 검토,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NLL에 관한 발언이 오해를 불러 일으켜 보수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이며 좌파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으나, 실제 임기 중에 펼친 정책은 그러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신자유주의 우파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진보 언론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고, 보수 언론에게는 반미주의자라며 양측 진영에서 모두 비판받은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으나 세종특별자치시의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행정도시로 선회하였다.

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었고, 노무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박연차로부터 노무현 일가가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으며, 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아내가 받았다는 노무현의 주장과는 달리, 박연차는 검찰 조사에서 노무현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집 장만을 위한 100만달러를 요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비서관을 통해 요청을 받고 차명계좌에서 노무현의 아들 노건호와 조카사위 연철호가 동업하는 기업에 500만 달러를 송금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노무현 일가의 640만 달러 수수 의혹은 현재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같은 뇌물 수수 직접 개입 의혹이 수면으로 부상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노무현은 그 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과 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내렸다. 노무현이 사망하면서 법무부는 노무현의 뇌물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시켰다. 사후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노무현 재단의 주장에 따르면 500만여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노무현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3. 생애[편집]

노무현은 1946년 9월 1일에 경상남도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 있는 형 2명 중 맏형 영현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작은 형 건평은 현재까지 살아있다. 노건평은 1968년 세무직 9급 공무원이 되어 10년간 지방 세무서에서 근무하였다. 노무현은 광주 노씨 광주군파 31대 손으로 광주 노씨는 광주광역시 일곡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가문이다.

1953년에 진영대창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 6학년 때 담임교사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맡았다. 1959년 3월에 진영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재학 당시 노무현은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는 외상으로 입학하였다고 한다. 1학년 말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노무현은 백지동맹을 일으키다가 정학을 당하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간 휴학한 뒤 부일장학회의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에 다니다가 1963년에 가까스로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여 1966년에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과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결국 그만두었다. 이후 막노동과 사시 공부를 병행하였다.

1968년 군에 입대하여 제12보병사단 을지부대에서 육군 상병으로 만기전역하였다. 1972년 27세에 권양숙과 결혼하였고 1973년에 아들 건호를, 1975년에 딸 정연을 낳았다.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는 4번째 도전에서 이루어진 성과였고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에서 유일하게 고졸 출신 합격자였다. 이후 1977년 대전지방법원의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5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4. 대통령 취임식[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노무현/취임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제16대 대통령[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노무현/제16대 대통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언론[편집]

노무현이 3당 합당을 거부하고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된 직후인 1991년 10월 조선일보는 주간조선 보도를 통해 이력과 재산을 문제 삼았다. 노무현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 정치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에 나서 승소했다. 국민의 정부 때 해양수산부 장관으로서 언론사 세무조사를 앞장서 지지하고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언론사 소유 지분 제한에 공개 찬성했다. 보수 언론과의 적대적 관계가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처음 '이인제 대세론'에 묻혀 있다가 2002년 3월 16일 광주 지역 경선부터 본격적인 노풍을 일으켰고, 언론들은 이 현상을 신기한 듯 부쩍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 바람에 심상치 않은 무게가 실리자 보수 언론의 견제가 본격화됐다. 대선 당일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 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라며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라고 방점을 찍은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대권을 잡은 이후에는 집권 1년 만에 보수 언론의 포화 속에 헌정 사상 유례없는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탄핵 반대 촛불 여론으로 권좌를 되찾은 후에도 보수 언론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으며, 여기에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협정 추진, 대연정 구상 등으로 인해 진보 언론도 노무현에게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임기 말에는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 기자실 폐쇄로 이어지면서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은 모든 언론이 비판을 퍼부었다.

'박연차 회장 비리 사건'에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진보 언론마저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언론들은 검찰발로 노무현의 가족과 관련된 비리를 낱낱이 보도하며 노무현을 부도덕과 비리의 몸통인 양 매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망으로 노무현의 생애가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가면서 언론의 긍정적인 평가들이 등장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언론과의 관계가 가장 순탄치 않았던 정치인으로 평가되었다.

7. 종교[편집]

  • 천주교 : 1986년 당시 천주교 부산교구 당감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송기인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얻었지만 열심히 신앙생활도 못하고 성당도 못 나가 프로필의 종교란에는 무교로 쓴다고 밝힌 적이 있다. 대통령 후보 시절인 2002년 6월 20일에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주교관이던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노무현이 먼저 신앙 문제를 화제로 꺼냈다. 노무현은 "1986년 부산에서 송기인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얻었다."라고 소개하고 "하지만 열심히 신앙생활도 못하고 성당도 못 나가 프로필 쓸 때 종교란에 '무교'로 쓴다."라고 고백했다. 이에 김수환은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고, 노무현은 "희미하게 믿는다."라고 답했다. 김수환이 "어려울 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말하자 노무현은 "앞으로는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다."고 대답했다.
  • 불교 : 노무현은 자택 옆에 있던 정토원이라는 사찰에서 사시 공부를 하였다. 이후에는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에 머무르면서 사시를 준비했으며, 틈틈이 불교 경전을 탐독했다. 9년간 사시 공부를 하여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평소 불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 아내 권양숙은 2002년 10월 1일 당시 대선을 앞두고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조계종 종정인 법전 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대덕화'는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가 받은 법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법명 수계는 불교계의 민심이 실린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불교계의 기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재임 기간 동안 해인사를 무려 세 차례나 방문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을 하였다.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은 아내와 함께 경남 합천 해인사를 불시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환담한 뒤 오찬을 함께 했다. 사패산 터널 문제에 대한 공약을 지키게 못하게 되었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또한 노무현은 2005년 8월 30일에 T-50 골든이글 양산 1호기 출고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목조 불상인 쌍둥이 비로자나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해인사에 들러 비행기 사고 없이 잘 날아다니고 잘 팔아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를 했다. 취임 이래 2번째로 해인사를 방문했고 해인사 대비로전 건립에 30여억 원의 국고 지원을 즉석에서 약속했다. 2007년 11월 24일 해인사 대비로전 낙성 대법회에 참석하면서 축사를 하였는데 3번째로 해인사를 방문했다. 2009년 5월 23일에 과거 사시 공부를 했던 정토원의 법당에 모셔진 부모와 장인의 위패에 예를 표한 뒤 그 옆의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봉하마을 뒤편 봉화산에 자리 잡은 정토원은 그가 투신한 부엉이 바위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한 사찰이다. 2009년 5월 24일 해인사의 승려 300여 명이 분향소를 찾아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했다.

8. 별명[편집]

노짱은 노무현의 애칭이다. 노무현 짱의 줄임말로, 한국어 '짱'이 아닌 일본어: ちゃん 짱, 쨩을 붙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사용하는 의미는 ちゃん(친하게 부르는 접미사)와 같아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2000년대 초, 노사모의 사람들은 노무현을 노무현 짱이라는 말을 줄인 '노짱'으로 친근하게 불렀다. 또한 노무현 자신도 자신을 노짱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일베저장소와 같은 곳에서 사용되기 시작하며 나쁜 뜻인 줄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9.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편집]

2009년 9월 23일, 참여정부 시절 인사들로 구성된 재단준비위원회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을 출범시켰다. '사람사는세상' 은 노무현의 정치 슬로건 중 하나였으며, 1989년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을 때부터 사용했다. '사람사는세상' 의 어원은 노무현이 생전 즐겨부르던 민중가요 《어머니》의 가사 첫 줄인 '사람사는세상이 돌아와~'이다. 2000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 노무현은 개인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했고, 홈페이지의 이름 역시 '사람사는세상' 이었다. 이 홈페이지는 2003년 2월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일시 폐쇄되었다가, 노무현이 임기를 마치고 봉하마을로 낙향한 뒤 다시 개설하여 서거 직전까지 사용하였다. 노무현의 서거 이후 노무현재단이 출범한 뒤에는 노무현재단의 홈페이지로 개편되었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관련 법률에 의거, 전직 대통령 기념사업 및 민주당계 정치세력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다. 초대 이사장은 한명숙이 맡았으며, 이 후 문재인, 이병완, 유시민 등이 이사장직을 거쳐갔다. 2022년 9월 정세균이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길 73에 있으며, 노무현시민센터 건물 내에 위치해있다.

한편 '재단법인 봉하'는 부인 권양숙이 이사장을 맡아 출범시켰다. 재단법인 봉하는 봉하마을 내 대통령 묘역 및 시설 관리 등을 주된 업무로 두고 있으며, 재단의 성격상 노무현재단과 분리되어 운영된다.

10. 상훈[편집]

  • 2004년 - 영국 최고 훈장 배스 대십자훈장(GCB)
  • 2004년 - 폴란드 흰 독수리 훈장(Order Orła Białego)
  • 2005년 - 미국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밴 플리트’ 수상
  • 2007년 - 카타르 독립대훈장
  • 2007년 - 스페인 시민 훈장
  • 2007년 10월 8일 - 덴마크의 코끼리의 기사 수훈
  • 2008년 - 무궁화대훈장

11. 사망[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노무현/사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평가[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노무현/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여담[편집]

  • 노무현은 생전 노래를 즐겨불렀고, 대중문화에 큰 관심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그가 생전 자주 즐겨부르던 노래는 양희은의 《상록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민중가요 《어머니》, 《바위처럼》, 《작은 연인들》, 문성재의 《부산갈매기》 등이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은 대선 광고에서 직접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불렀고, 《사랑으로》는 연주자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불렀다. 또한 부산에서 열린 유세에서는 《부산갈매기》를 직접 부르며 지지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또한 2002년 11월 9일 서울극장에서 열린 '문화예술인의 밤' 에 참석하여 직접 문화융성정책을 발표하고 《상록수》를 부르기도 했다.

14.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