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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관련된 내용을 다룹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발생 국가
발생일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7884일, 21주기)
발생 위치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 중앙로역
원인
방화
피의자
인명
피해
사망
192명
부상
151명
피의자
(김대한)
혐의
살인 외[1]
최종
형량
수감처
진주교도소에서 수감했었음
1. 개요2. 상세3. 사건 전개4. 시간대별 상황5. 인명피해6. 사고 이후
6.1. 관련자 처벌6.2. 중앙로역 통제 및 복구6.3. 희생자 유족 및 생존자들의 후유증6.4. 내장 불연재 교체6.5. 사고 전동차 고철 매각
7. 문제점
7.1. 낙후된 소방 기술7.2. 사고 관리 시스템 부재7.3. 부실한 사회 안전망과 저급 전동차7.4. 사고 후 전동차 훼손7.5. 휘발유를 함부로 판매하는 안전 불감증
8.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2003년 2월 18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 2.18 참사, 김대한 방화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2. 상세[편집]

사건의 발단은 개인택시 운전사 출신으로 우울증과 뇌졸중을 겪던 김대한이 사건 당일 오전 9시경 지하철 전동차 내에 휘발유를 뿌린 뒤 방화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불이 붙은 1079호 열차는 중앙로역에 진입하는 즉시 승객들에게 대피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화재 발생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종합사령실의 운행 중단 지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연기로 가득 찬 건너편 승강장에 1080호 열차의 역내 진입을 허용한 데 이어, 기관사의 탈출 지시와 함께 전동차의 문이 닫히면서 다수의 승객들이 탈출하지 못했다.

이 사고로 중앙로역에 정차했던 2개 편성 12량(118편성 1079열차, 130편성 1080열차)의 전동차가 모두 불타고 뼈대만 남았으며, 열차 내와 역내에 갇혀버린 승객 가운데 사망자 192명, 실종자 21명, 부상자 151명이 발생하였다. 중앙로역도 완전히 전소되어 2003년 12월 30일까지 복구를 위해 10개월 동안 무정차 통과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인명 피해가 큰 철도 사고이자, 세계적으로도 1995년 바쿠 지하철 화재에 이어 가장 큰 사고로 기록되었다. 이와 동시에 인위적 요소로 인한 재난사고로는 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역대 최대 규모의 사상자로 기록되었다.

3. 사건 전개[편집]

방화범 김대한(당시 56세)은 개인택시 운전을 하다가 우울증 증세를 보여 대구 시내 한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고 2001년 4월은 뇌졸중이 겹쳐 상·하반신 마비증세로 11월 지체장애 2급 판정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생계를 이어 왔던 개인택시를 무작정 세워둔 채 증세가 호전될 가망이 없자 김대한은 세상을 비관하게 되었고 방화를 일으키기 열흘 전은 자신이 다니던 중풍 치료병원을 찾아가 "불지르겠다" 소리치며 난동을 부릴 정도로 심리상태가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경 안방에서 1회용 라이터 2개와 자동차 세척 샴푸통(용량 4리터의 흰색 플라스틱 통)을 꺼내 검은색 가방에 넣고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가다가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송현역 부근에서 내린 다음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 7,500원어치 상당을 구입하여 샴푸 통에 담은 뒤 1호선 송현역으로 들어가 안심방향 승강장에서 9시 30분경 안심역 방면으로 운행되는 1079열차의 1호차에 탑승하였다.

9시 52분경 1079열차가 반월당역을 출발해 중앙로역에 도착할 무렵 2호차와 가까운 1호차 노약자석 옆 일반석에 앉아 있던 김대한은 1회용 가스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려고 망설이던 중 맞은 편에 앉은 승객으로부터 "왜 자꾸 불을 켜려고 하느냐"는 나무라는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불을 붙이기로 결심하고, 1회용 가스라이터를 켠 다음 샴푸통에 들어있는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방화범 김대한은 자신의 옷에 순식간에 불이 붙자 황급하게 가방을 객실 바닥에 던졌고 불길은 더욱 순식간에 객실 내로 번지면서 화재가 확산되었고 승객들은 우왕좌왕하며 혼란이 일어났다. 당시 주변 승객들이 김대한을 말리려 달려들었음에도 불이 빠른 속도로 번져 저지하는데 실패하였으나, 불이 붙는 순간 중앙로역에 열차가 도착함과 동시에 출입문이 열리면서 1079호에 탑승한 많은 승객들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

이후 김대한은 다른 승객들과 함께 역사 밖으로 대피한 뒤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1079호 열차 기관사 최정환은 중앙로역에 도착해 출입문을 연 뒤 "불이야!"하는 소리를 듣고 운전실 앞에 있는 CCTV 화면에 객차 쪽에서 승객들이 서둘러 빠져 나온 모습을 보고 운전실 옆에 있는 소화기를 들고 나와 불을 끄려 했지만 가연성 소재로 가득한 전동차 객실 내부의 불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승객들에게 대피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 때 최정환 기관사는 화재 진화를 포기하고 대피할 때 중앙사령실에 제대로 신고를 하지 않고 대피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였고 이 때문에 중앙사령실에 화재 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후속 열차인 1080호 열차의 피해로 이어지게 된다.

중앙로역의 역무원은 9시 55분경 본역 화재를 종합사령실에 보고했지만, 화재의 규모와 정보를 알지 못했던 운전사령은 1080호에 진입하지 말라거나 무정차 통과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고 운행중인 전체 열차에게 "전 열차에 알립니다. 중앙로역에 진입시 조심해 운전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화재 발생하였습니다."라는 지시만 내렸다.

결국 9시 55분 30초경 1079호 열차와 반대 방향 대곡 방면으로 운행한 1080호 열차가 이전역인 대구역을 출발하여 9시 56분 45초경 현장상황을 알지 못한 채 상행선 승강장에 진입하여 정차함으로써 1079호 열차에서 발생한 불길이 순식간에 1080호 열차로 옮겨 붙으면서 화재가 더욱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미 1080호 열차가 대구역을 출발했을 당시 중앙로역은 유독가스로 인한 연기로 인해 대피가 불가능할 정도로 시야확보가 안되었고 대현프리몰 지하상가로 향하는 방화셔터가 차단되어 탈출 경로도 한정적이었던 상황이었다.

화재 발생 20여초 만에 대구지하철공사 종합사령실에 설치되어 있던 승강장 감시용 CCTV의 화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연기와 유독가스 분출량이 많았던 것으로 판단되며 화재가 진행되면서 지하 3층 승강장과 1079호와 1080호 열차 내부는 유독가스와 화재로 인한 열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피하거나 우왕좌왕하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다.

1079호 열차의 승객 거의 대부분은 정차 중으로 문이 열려 있고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대피를 지시하여 대피한 반면, 반대방향으로 운행 중이던 1080호 열차는 화재 상황을 잘 알지 못한 상황에서 역에 진입, 정차함에 따라 화재가 확산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080호 열차의 경우 중앙로역에 진입할 때 이미 승강장의 연기로 인해 전동차 외부의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았으며 1079호 열차 1호차와 인접한 1080호 열차 5~6호차의 승객들은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정차 후 전동차 외부상황에 대해 알 수 없을 만큼 이미 화재로 인한 연기가 지하 3층 승강장에 꽉 차 있는 상태였다.

중앙로역에 열차가 정차한 뒤 곧바로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렸으나 연기가 밀려들어오자 기관사가 수동으로 닫았고 승객들에게 "곧 출발하겠다" 라는 안내방송을 반복하는 동안 대피가 지연되면서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고 기관사는 급전을 받아 출발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1080호 열차가 도착하기 몇분 전 역사 두꺼비집에 스파크가 발생하여 모든 전기공급이 끊기면서 전동차는 전기가 들어왔다가 바로 전기가 나간 상황이 반복되었다.

결국 1080호 열차 내부는 연기로 가득차게 되었으며 대피하지 못한 승객들은 유독가스로 인한 연기로 질식하면서 사망했고, 당시 기관차 바로 앞 객차인 1,2호차에 타고 있던 승객 몇 명은 기관실로 진입하여 기관사와 함께 역 밖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뒷 객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화재 사실이 전혀 전달되지 않아 많은 희생자를 냈다.

겨우 문을 열고 빠져나온 사람들도 이미 암전되어버린 중앙로역 내부에서 해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연기에 질식하거나 승강장이나 지하상가인 대현 프리몰 셔터 입구에서 쓰러져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오전 9시 57분 32초, 1080호의 기관사 최모씨는 종합사령실 운전사령에게 열차무선으로 "엉망입니다. 빠른 조치 바랍니다."라고 요청하였고, 운전사령은 "대기하고 승객들에게 안내방송하라."는 지시를 받고 기관사는 "잠시후 출발할 것이니 기다려달라."고 안내방송을 하였다. 이 때 잠시 전력이 공급되어 1080호 기관사가 출발을 시도했으나 전력이 다시 끊기는 일이 반복되었고, 운전사령의 지시를 받았으므로 승객들에게 전동차 안에서 대기하도록 승객들에게 안내방송을 했다.

오전 10시 2분 종합사령실 운전사령이 1080호 기관사에게 "승객들을 승강장 위로 대피시키라"고 지시했고 기관사는 출입문 개방스위치를 누른 후 대피안내방송 실시, 객실로 들어가 대피하라고 소리치면 2번 객실로 이동 중 승객 3,4명에게 대피시켤 줄것을 요청하며 계단 입구까지 유도 후 다시 운전실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8분 후인 10시 10분 종합사령실 운전사령이 기관사에게 "전동차 판 내리고(열차 전원내리고/마스콘키를 빼고) 탈출하라"는 지시를 받고 마스콘키를 뽑아 일부 승객과 함께 탈출해버렸다. 이에 대해서 참사 초기 언론에서는 마스콘키를 뽑아 문이 열리지 않아 시민들이 죽었다라며 책임을 1080호 기관사에게 떠 넘겼고 전동차는 공기로 출입문을 여닫는데 기본적인 상태가 출입문이 닫혀있지만 당시 대구시가 예산이 모자라 전동차를 싸게 만들기 위해 내장재 등 부품들이 거의 불연재를 쓰지 않았다. 출입문을 여닫게 하는 공기호스도 불연재가 아니다 보니 화재로 녹아내려 열차에서 개방을 해도 문을 열 수 없는 상태였고 마스콘키를 뺀 것은 메뉴얼상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이고 운전사령의 지시로 메뉴얼상 1080호 기관사는 지시를 따랐을 뿐이었다.

대법원 판결에서도 출입문이 닫힌 것은 기관사 책임이 아니라고 했지만[출처 필요] 누구하나는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고 언론이 이미 뿌린 상황에서 1080호 기관사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최고형인 금고 5년형을 선고받았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1차 원인은 방화였지만 대구시의 예산절감을 위한 저질 전동차 도입, 안전에 취약한 지하철 역사 건설, 인력 감축 등이 참사를 키운 원흉이 되었다.

다만 1080호 열차에 타고 있던 대구선의 권춘섭 금호역장이 비상 개방 장치를 취급하여 문을 열고 주위 승객들을 대피시켜 피해를 다소나마 줄일 수 있었고훗날 권 씨는 이 활동을 인정받아 2013년 6월 7일 개설된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또한 일부 역무원이나 승객들은 선로로 대피하여 700m 떨어져 있는 대구역까지 걸어와서 대피하기도 하였다.

일부 승객들은 시야가 차단되자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 불빛으로 시야를 확보하여 탈출하려 하였으나 당시 피쳐폰의 저열한 밝기로는 시야확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당시는 불빛 없는 흑백폰이 여전히 사용되던 시절이라 전혀 탈출 도구로 쓰지 못하기도 하였지만 이 후 2016년부터 스마트폰에는 탈출용 목적으로 휴대전화 손전등이 탑재되어 있다.

결국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이라는 대형참사가 발생했고 사고 당시 화재가 처음 발생한 안심행 1079호 열차엔 방화범을 포함한 250여명이 대곡행 1080호 열차엔 180여명의 승객이 탑승했는데 이 중 1080호에서만 142명의 사망자가 나온 반면 1079호 열차에서는 단 1명의 사망자도 없다.

실제로 나머지 사망자 50명은 중앙로역과 연결된 대현프리몰 상가의 방화 셔터 앞과 중앙로역 곳곳에서 발견되었고 지하철에서 불이 나자 중앙로역 일대는 환풍구와 출입구 등에서 나온 시커먼 연기로 인해 유독가스가 시내 전체를 뒤덮어 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정도였으며 사고 소식을 접한 뒤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과 지켜보는 시민들로 아수라장을 이뤘다.

또한 지하철에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 승객 가족들은 현장에 나와 오열하였고 일부 가족들은 경북대학교 병원과 동산병원 등을 뛰어다니다 눈물을 흘리며 현장으로 되돌아오기도 하였으며 사고수습대책본부와 언론사엔 사고경위와 사상자 명단을 알 수 없겠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하였다.

사고가 나자 경찰관과 소방관이 긴급 출동하여 현장지휘소를 설치함과 동시에 중앙로 일대 차량 출입을 전면 통제하고 소방인력과 장비를 동원하여 화재진화와 구조작업을 펼쳤으나 화재와 유독가스로 현장접근이 힘들어 구조가 지연되자 지켜보던 많은 시민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4. 시간대별 상황[편집]

사고 발생 초기 대구지하철공사 종합 사령실의 전동차 운행 및 통화 기록, 대구시 소방 본부 119 종합 상황실의 119 신고접수 및 무전상황 기록, 생존자들의 진술내용, 언론 보도내용 등을 종합하여 시간대별로 상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 9시 30분 정각
  • 방화범 김대한이 방화를 목적으로 주유소에 방문하여 휘발유 7500원 어치 상당을 구입한 뒤 1호선 송현역 안심방면 승강장에서 안심행 1079열차 1호차에 탑승함.
  • 9시 52분 32초 - 1079열차 중앙로역 도착
  • 안심행 1079열차가 중앙로역에 도착
  • 9시 53분 정각 - 화재발생
  • 안심행 1079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는 순간 전동차에 타고 있던 방화범 김대한이 휘발유에 라이터를 켜 불을 붙임
  • 불이 방화범의 옷으로 옮겨 붙자 방화범이 휘발유통이 든 가방을 전동차 바닥에 던져 불이 전동차 벽면과 천장 등에 옮겨 붙음
  • 전동차 내부가 급속히 타들어 갔고, 많은 양의 검은 연기와 유독성 가스가 분출되어 승강장과 지하 1~2층의 대합실 등에 급속히 확산.승객들은 주출입구 쪽의 계단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
  • 1079열차 기관사는 소화기로 불을 끄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화재발생 사실을 종합사령실에 보고하지 않은 채 역사 밖으로 대피
  • 종합사령실 기계설비사령 주컴퓨터에 중앙로역 화재경보 문구가 뜨고 경보음이 울렸으나, 종합사령실에서는 확인을 하지 않음
  • 9시 53분 35초 ~ 9시 54분 40초
  • 1079열차의 40대 남자승객이 중앙로역 전동차 안에서 화재가 발생되었다는 내용을 소방본부 종합사령실에 최초 신고, 이후 역시 밖으로 탈출한 승객들과 전동차 안에 갇힌 승객들과 휴대전화 통화를 한 가족 등이 현장의 상황을 소방본부 종합상황실에 신고
  • 소방본부 종합상황실에서는 삼덕파출소 등 8개 출동대에 출동명령
  • 9시 55분 정각
  • 중앙로역 역무원이 종합사령실에 "중앙로역 실제 화재입니다. 전혀 앞이 분간이 안 됩니다. 신고 좀 부탁드립니다."라며 중앙로역 화재사실을 신고하였으나, 종합사령실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119 신고를 하지 않았음
  • 9시 55분 30초
  • 1080열차가 대구역에서 중앙로역으로 출발
  • 중앙로역 역무원이 초기 소화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부 직원이 승객 대피 유도
  • 9시 55분 36초
  • 종합사령실 운전사령이 전체 열차에 "중앙로역 진입 시 조심하여 운전하여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화재가 발생했습니다."라고 열차무선 전체 호출을 통하여 통보
  • 9시 56분 45초 - 1080열차 중앙로역 도착
  • 대곡행 1080열차가 이미 검은 연기가 가득 차 있던 중앙로역 승강장에 도착하여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림
  • 승강장에 있던 연기가 전동차 안으로 밀려들자 기관사가 즉시 출입문을 닫음
  • 9시 57분 07초
  • 전동차 전원이 끊어짐에 따라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됨.
  • 9시 57분 39초
  • 1080열차 기관사가 운전사령에게 열차무선으로 "엉망입니다. 빠른 조치바랍니다."라며 적정한 지시를 내려주도록 요구
  • 운전사령은 상황판단을 하지 못한 채 "대기하고 승객들에게 안내 방송하라"고 지시하여 1080열차 기관사는 "잠시 후 출발할 것이니 기다려 달라"고 안내방송
  • 중부소방서 서문로파출소 소방대원 현장 도착 및 인명구조 시작
  • 9시 57분 40초
  • 중앙로역 역무원이 화재 사실을 119 신고
  • 9시 58분 28초
  • 1080열차 기관사가 종합사령실에 연락하여 승객 대피 여부를 결정하여 줄 것을 요구하던 중 전동차에 잠시 전력이 공급되어 출발시도
  • 1080열차에 전력이 공급되어 기관사가 출발을 시도하면 전력이 다시 끊기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승객대피 여부를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됨
  • 1080열차 기관사는 전동차가 곧 출발할 예정이므로 전동차 안에 대기하도록 승객들에게 방송
  • 1079열차에서 1080열차로 불이 옮겨 붙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
  • 종합사령실과 1080열차간 열차무선 통화 두절
  • 10시 2분 48초
  • 종합사령실에서 1080열차에 전력이 공급되지 않고 중앙로역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고 1080열차 기관사에게 "승객들을 승강장 위로 대피시키라"고 지시
  • 1080열차 기관사는 출입문을 개방하고 승객대피 안내방송 실시하나, 일부 차량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았고 승객들이 수동으로 출입문을 여는 방법을 몰라 전동차 안에 갇혀 있게 됨
  • 소방파출소 및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구조 활동 시작
  • 10시 4분 정각
  • 소방본부 종합상황실에서 복현파출소 등 16개 파출소 달서구조대, 동부구급구조대 등에 구급차와 물탱크차 출동 요청
  • 지하 1층과 지하 2층에서 인명구조 계속 실시
  • 10시 10분 정각
  • 1080열차 기관사는 운전사령의 "전동차 판(팬터그래프의 줄임말) 내리고 차 죽이고 가라"는 지시를 받고 승객들의 안전과 대피를 확인하지 않은 채 전동차의 마스터 키(주간제어기 키 즉 마스터키)를 뽑아 역사출입구를 통해 탈출.(원칙상 타인이 운전실에 들어가 운전하는 것을 막기위하여 기관사는 비상상황발생시 마스터키와 제동핸들을 가지고 나가게 되어있음)마스터 키를 빼면 문이 안 열림
  • 10시 12분 정각
  • 소방본부 종합사령실에서 대구시내 병원 구급차 동원 요청
  • 10시 17분 정각
  • 종합사령실에서는 다른 전동차의 운행을 통제하면서 모든 전동차의 운행을 정지시켰고 중앙로역 역무원들은 탈출후 모두 병원으로 이송됨
  • 중부소방서장이 자체 비상소집 명령
  • 10시 25분 정각
  • 소방본부장이 경북소방본부에 구조대 및 구급 대 지원요청
  • 10시 28분 정각
  • 종합사령실에서 전 전동차 운행중지 및 승객하차 지시
  • 10시 52분 정각
  • 소방본부장이 소방본부 전 직원 비상 소집명령.
  • 11시 11분 정각
  • 경북소방본부 6개 대의 구급차 12대 지원출동
  • 13시 38분 정각
  • 화재 완전 진압

5. 인명피해[편집]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 화재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으로 총 343명에 달한다. 사망자 192명중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가 186명, 신원미확인 사망자가 6명이었고 신원미확인 사망자 6명 중에서 DNA가 확인된 사망자가 3명, DNA 확인이 불가능한 사망자가 3명이었다.
성별 기준
(신원미확인 사망자 6명 제외)
성별
사망자 수
남성
61명
여성
125명
연령대 기준
연령대
사망자 수
0~9세
4명
10대
30명
20대
52명
30대
28명
40대
15명
50대
12명
60대
11명
연령대 기준
연령대
부상자 수
0~9세
3명
10대
18명
20대
38명
30대
39명
40대
30명
50대
12명
60대
11명

지하철이 대중교통수단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고 발생시간이 9시 53분경으로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바쁜 시간이었기 때문에 인명피해의 규모가 컸다.

사상자 가운데 동구 주민이 가장 많았던 것은 안심역에서 출발한 1080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의 인명피해가 컸고, 달서구 대곡역에서 동구 안심역으로 가던 1079열차에 동구 지역 주민들이 많이 탑승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고가 발생한 뒤 중앙로역 일대는 실종된 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플랜카드를 붙히기도 하였으며, KTF와 LG텔레콤, SK텔레콤 등 통신사들은 중앙로역 기지국 데이터를 조회, 탑승객들의 마지막 휴대전화 신호 위치를 조회해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청~장년층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시기적으로 봄방학 기간이었던 점과 사고 당일 계명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가족이 함께 탑승하였다가 사고를 당한 사례가 18가족이나 되어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하였다.

이번 지하철 사고에서는 부-모, 모-자, 처-자 등 1가구에 2명 이상의 가족이 동시에 참변을 당한 유가족이 12가구나 되었으며, 특히 두 딸을 동시에 잃었던 모친 김○○의 경우 보상합의 후 두 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제를 지내기 위해 경남에 있는 한 사찰을 찾았다가 9월 한반도 남부를 강타한 태풍 "매미"로 인해 사찰내 요사체가 붕괴되면서 모친도 두 딸의 뒤를 따라갔다.

6. 사고 이후[편집]

6.1. 관련자 처벌[편집]

2003년 2월 18일 참사 당일 전동차 안 최초 목격자인 전융남 씨의 증언을 비롯해서, 사고 발생 2시간 뒤, 북구 노원동3가 조광병원에서 치료 하고 있는 50대 남자를 유력한 용의자를 지목하였다.

같은 해인 4월 23일은 대검찰청 특별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방화범 김대한을 현존 전차 방화 치사상죄로, 기관사, 관제사, 역무원, 시설 책임자 등 지하철 직원 8명을 업무상 중과실 치사상죄로 각각 구속 기소하고, 2명을 업무상 과실죄로 불구속 기소했다.

같은 해 8월 6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방화범 김 씨에 대해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였으나, 김 씨는 심신 장애는 없으나 범행 당시의 정신 상태 등을 감안하면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일으킨 범행이라 보기 어려운 점과, 직접 방화한 1079호 열차에서는 인명피해가 그다지 없었던 점(1080열차의 진입으로 사고가 크게 확산) 등이 감안되어 2004년 1월 7일에 대구고등법원에서 무기 징역이 선고되었다.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김대한은 2004년 3월 8일 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가, 같은해 8월 30일에 지병 악화로 사망했다.

한편, 검찰이 일괄하여 법정 최고형인 금고 5년을 구형했던 사고 대처를 미흡하게 했던 지하철 직원들에 대해서는 금고형이 다음과 같이 선고되었다.
  • 1080열차의 기관사 최상열은 열차의 출입문을 닫아 버려 승객들의 탈출을 막아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한 점에서 구형대로 5년 금고형이 선고되었고, 2008년에 집행 기간이 끝나 출소했다.
  • 1079열차 기관사 최정환과 가장 먼저 화재 사실을 연락받은 관제사 방정민에 대해서는 초동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각 금고 4년이 선고되었다. 홍순대, 손영일 등 나머지 관제사들에 대해서는 각각 금고 3년이 선고되었다.
  • 시설사령 2명 및 중앙로역 역무원에 대해서는 직접 책임이 없음을 이유로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선고 공판 직후 재판부의 양형에 불만을 품은 유족들이 격렬히 항의하며 법정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6.2. 중앙로역 통제 및 복구[편집]

사고가 난 중앙로역을 전후한 교대~중앙로~동대구역 구간이 불통되어 양쪽 구간만이 운행되었고, 동대구역은 큰고개역에 설치된 회차선을 통해 단선으로 운행했다. 교대역에서 동대구역까지는 시내버스 중 일부 차량들을 가져와서 셔틀버스로 수송하는 파행 운행이 이어졌다. 중앙로역이 운전취급 및 관리역인 관계로, 중앙로역 반복 운전을 하지 못해 상당한 구간이 불통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게다가 중앙로역의 구조물이 손상되어 2월 25일에 반월당네거리와 중앙네거리 사이가 전면 통제되어 시내버스들이 반월당역에서 우회 운행했다.
차량 통행금지는 같은 해 4월 10일에 전면 해제되었다.

운행 재개는 가복구가 이루어진 2003년 10월 21일에 이르러 중앙로역을 무정차 통과하는 형태로 교대~동대구역 구간의 운행을 참사 8개월 만에 재개 하였고, 12월 31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중앙로역에 정차가 가능해져 완전히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화재 참사 후 대구 도시철도의 모든 역에는 안전시설이 촘촘하게 갖춰졌고, 2009년 5월 29일에 중앙로역 승강장에는 완전 밀폐형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었다.

6.3. 희생자 유족 및 생존자들의 후유증[편집]

희생자들과 관계된 유족들은 참사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현재도 사고를 잊지 못하고 있으며, 생존자들의 상당수가 정신적 트라우마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2005년 참사 2주기를 맞아 MBC에서 생존자들을 취재할 결과, 절대다수가 PTSD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사고 당시 유독가스를 과다 흡입한 영향으로 기도 화상을 입어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는 생존자도 많았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한국 사회에서 PTSD가 처음 소개되고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이 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등 각종 대형참사가 발생했을 때 PTSD에 대한 의학적이고 효율적인 접근과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사고 발생한날 2월 18일에는 매년 추모식이 열리고 있으며, 최근에 중앙로역에 2.18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기억하는 공간이 조성되었다.

6.4. 내장 불연재 교체[편집]

사고 이후 정부는 전국 대도시의 각 지하철 운영 주체와 광역철도 운영 주체인 한국철도공사에 2006년까지 전 차량에 대한 내장재 교체를 완료하라고 지시하였다. 기존 차량은 좌석, 벽 내부 단열재 등에 가연성 소재인 천이나 면 따위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조의 시작은 승객들이 직접 사용하게 되는 좌석이었다. 수도권 전철 운영기관 중에 서울메트로,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현재 서울교통공사로 통합)를 비롯한 부산교통공사, 인천교통공사의 경우, 견고하고 불에 전혀 타지 않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금속으로 교체하였고 한국철도공사는 불연재 모켓시트로 교체하였다. 다만,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는 이후 전동차 의자에 모켓시트를 덧씌웠다.

그 후 시공사와 예산을 확보하여 2003년 하반기부터 2006년까지 로윈, SLS중공업, 흥일기업에서는 해당 차량기지에 출장 나오는 방식으로 실시하였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철도차량과 현대로템에서 제조된 전동열차는 당시의 로템 의왕공장, 창원공장으로 회송되어 내장재를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대구도시철도공사도 이후에 모두 불연재 시트로 교체하였다.

한편, 지하철 승강장에 인공암벽을 사용하는 모든 지하철역(충무로역, 마천역, 가산디지털단지역 등)에 대해 철거 및 리모델링 하는 데 간접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인공암반이 FRP(유리섬유 강화 플라스틱)라는 마감재를 사용하여 화재 시 유독가스를 발생하고 많은 인명피해를 야기한다는 지적을 받게되어 인공암반을 사용하는 모든 역사에 대해 불연소재로 교체하게 되었다.

사고가 났던 대구 지하철은 2005년 4월 1일 전량 불연재 개조를 완료하였으며, 서울지하철의 경우 퇴역 예정이었던 차량은 2009년까지 가연재 시트를 달고 운행하였다.

6.5. 사고 전동차 고철 매각[편집]

대구도시철도공사는 총 12량의 사고 전동차 중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 보존될 1량을 제외한 11량을 안심차량기지 보관공간 부족과 재원마련을 이유로 들어 2008년 6월 26일 경기도 고철처리업체에 매각했다.
하지만 유족들의 반발이 커지자 사고 전동차 반출을 중단하고 6량을 남겨 두었다. 이후 추모사업추진위와 협의 끝에 2008년 7월 25일 3량을 더 반출하여 사고 전동차는 118편성 1량, 130편성 2량이 남게 되었다.(1818호는 시민안전테마파크에, 1130호, 1730호는 안심차량기지에 사실상 방치)

7. 문제점[편집]

7.1. 낙후된 소방 기술[편집]

초기 신고자로부터 현장상황에 대한 정보파악 시도가 전혀 없이 무작정 현장으로 출동하였다. 절박한 신고자에게 '출동했다.','예, 갑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녹음자료로 확인된 사실) 또한 지하철 화재진압 기술 및 대비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분진 마스크, 방독면, 산소통, 방열복, 연기 강제배출 장비 등이 절대 부족하여 사고 발생 후 3시간 이상이나 구조대 현장진입 불가능 상태였다. 소방차 84대, 소방관, 경찰 등 3200명이 출동했지만 실속 있는 조치는 전무하였다.

7.2. 사고 관리 시스템 부재[편집]

사고발생의 원인을 구조적 문제와 같은 근본 원인보다는 하위직의 개인 실수에서 찾아 처벌하려고 하였다. 또한 사망자, 실종자 파악, 현장수습, 유가족 대책수립, 행정처리 절차가 미흡하였다. 결정적으로 현장 보존에 실패하였다. 소방관의 진화, 구조 활동에 의한 훼손, 취재 기자들에 의한 훼손방치, 고위 정치인의 이튿날 현장방문에 대비한 현장 훼손 군 병력 투입, 물청소 실시, 뚫린 창문에 대한 응급조치도 없이 소실된 전철 차량의 이동 등 사고 관리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7.3. 부실한 사회 안전망과 저급 전동차[편집]

대중교통수단인 전철의 객차가 화재에 매우 취약한 가연성 재질인, 폴리우레탄 폼 재질의 시트, FRP 소재로 구성된 내장재, 폴리염화비닐 재질로 된 내부 통로 자바레 및 바닥재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특히 시트가 빠른 속도로 불에 타면서 치명적인 유독가스를 발생시켰다. 당시 열차 차량에 대한 소방안전대책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고작 소화기 비치가 전부였고 객차의 경우 건축법, 소방법 및 전기사업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기관사와 종합사령실 관계자 몇 명 정도만 과실과 직무유기로 처벌되는 수준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또한 1993년 대구광역시지하철공사(현 대구교통공사)에서 매입한 전동차량의 단가는 1량 당 5억 원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낙찰 이후 예산부족을 이유로 대금을 더 삭감하였다. 이는 전동차를 부실한 재질로 제작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선진국에 수출하는 전동차의 단가는 약 17억, 서울 및 부산, 인천 도시철도의 단가는 약 8억이었던 것에 비해 무척 싼 가격이었다.

7.4. 사고 후 전동차 훼손[편집]

참사 이후 화재 전동차를 바로 월배차량사업소로 이송하여 물청소를 하여 그을음을 씻어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전동차의 화재 흔적이 심하게 훼손되었기에, 따라서 방화 범인은 알 수 있었지만, 전동차의 화재 상황, 흔적에 대한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없었다.

7.5. 휘발유를 함부로 판매하는 안전 불감증[편집]

사건이 발생하기 전, 김대한은 방화를 목적으로 주유소를 방문하여 자동차 세척용 샴푸통 용량 4리터의 흰색 플라스틱 통에 휘발유를 구입해 갔다. 한편, 주유소 측에서는 정확한 확인을 하지 않은 채 인화성과 폭발 위험이 높은 휘발유를 용기에 담아 판매함으로써 사건이 일어나는 데 한 몫을 한 셈이었다. 석유관계법에 따르면 자동차용 휘발유는 절대로 변형된 방법으로 임의의 용기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적발될 경우 해당 주유소에 강력한 행정 처분이 내려지게 된다. 그렇지만 기름보관용 플라스틱통에는 휘발유는 20리터까지, 경유는 30리터까지 구매&운반이 가능하다.

8.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현존전차방화치사[2] 2004년 3월 8일 정신 질환 치료를 위해 경상남도 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2004년 8월 30일 오전 8시 45분경(한국 표준시) 지병인 뇌졸중 악화로 인한 호흡곤란과 의식혼미 증세를 보여 경상남도진주의료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