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사고
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② 실제로 발생한 사건 사고에 관련된 내용을 다룹니다.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
파일: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 사진.jpg
▲ 당시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 사진
발생일
1971년 12월 25일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대연각 호텔
(現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고려대연각타워)[1]
국가
유형
화재
수사기관
천안서북경찰서
인명
피해
부상
63명
사망
163명
1. 개요2. 상세3. 원인4. 구조5. 수사6. 논란
6.1. 불구경6.2. 뒤늦은 제도 정비
7.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는 1971년 12월25일 서울 중구 충무로 소재 22층 규모 대연각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해 163명이 숨진 사고이다. 이 화재는 우리나라 최악의 화재 사건 중 하나로 당시 세계 최대 규모 호텔 화재 사고로 기록되기도 했다.

2. 상세[편집]

지상 22층 규모 고층 호텔은 불과 한 시간 남짓 만에 거대한 굴뚝으로 변했다. 불길은 계단과 복도를 차단했고 고층 투숙객들은 사실상 퇴로를 잃었다. 당시 호텔 내부에는 스프링클러가 없었고 화재 경보 설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비상 탈출용 밧줄이나 체계적인 피난 유도 장치 역시 없었다.

서울 시내 모든 소방력이 동원됐지만 기술적 한계가 명확했다. 고가 사다리차는 겨우 8층 높이까지만 접근할 수 있었고 고층 구조에 특화된 장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군 헬기와 미8군 헬기, 대통령 전용 헬기까지 투입됐지만 고열과 유독가스로 구조가 쉽지 않았다. 헬기들은 건물 주변을 선회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고층에 고립된 일부 투숙객들은 침대 매트리스나 담요를 붙잡고 뛰어내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연기에 질식하거나 불길에 휩싸였다. 불은 발화 약 10시간 만에 완전히 진압됐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이 화재로 163명이 숨지고 63명이 부상했다. 사망자 가운데에는 질식사와 추락사가 다수였다. 당시 호텔에는 성탄절을 맞아 222개 객실에 내·외국인 투숙객이 머물고 있었다.

피해액은 8억5000만원으로 추산됐다. 사고 당시인 1971년 기준으로도 막대한 액수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그 규모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3. 원인[편집]

화재 원인은 호텔 1층 커피숍에 있던 프로판 가스였다. 프로판 가스통이 터지면서 불길이 시작됐는데, 이 프로판 가스의 제조일은 1968년도로 약 3년 동안 내압 검사를 단 한 번도 받지 않은 채 방치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프로판 가스는 LPG 주원료로 냄새도 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공기보다 무거워서 바닥으로 가라앉는 성질이 있는데, 밀폐된 공간에서 유출되면 차곡차곡 쌓여 작은 스파크로도 쉽게 점화된다.

게다가 당시 호텔 건축 자재가 대부분 목재였으며 내부 천장과 벽지는 한지로 돼있어 쉽게 타는 자재들이 가득했다. 당시 건축법상 비상계단 방화문 설치는 의무였지만 돈을 아낀다는 이유로 대연각 호텔은 방화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피통로인 계단은 불이 번지는 통로 역할을 했다. 고층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인 옥상문도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옥상 출입구 앞에서만 2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4. 구조[편집]

소방은 곧바로 고가 사다리차를 준비시켰고, 옥상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침착하게 사다리차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7층 중간 옥상에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구조됐다.

군 헬기도 출동했다. 소방 헬기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 군 헬기가 구조에 나섰지만 따로 구조 장비랄 게 없는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구조팀은 최선의 방책을 짜냈다. 건물 옥상으로 밧줄을 던져보자는 것이었다. 군 헬기 조종사는 밧줄을 내린 채 최대한 대연각 호텔 옥상으로 하강했다. 꼭대기층까지 화염이 번진 상황에서 상승 기류가 지속됐던 터라 정확하게 밧줄을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옥상에 있던 사람들은 밧줄을 힘껏 잡았고, 군 헬기는 이 사람들을 옆 건물 옥상으로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총 6명이 구조됐다. 하지만 밧줄을 놓쳐 추락사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투숙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시도됐다. 양궁선수까지 투입된 것이다. 육교 위에서 양궁 선수들이 로프를 매단 화살을 호텔 창문으로 쏘아 올렸는데, 이는 로프를 연결해 투숙객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필사의 시도였다. 하지만 화살이 로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간혹 화살이 유리창을 깨고 실내에 도달하기도 했지만 이미 연기와 화마에 휩싸인 건물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당시 보유한 32m 고가 사다리차로는 7층까지만 구조가 가능했다. 장비의 한계로 인해 고층부 생존자들은 사실상 방치된 셈이었다.

화재가 발생한 지 12시간 만인 크리스마스 당일 밤 10시 불길이 완전히 잡혔다. 현장에 진입한 소방대원들을 맞이한 것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대부분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됐고, 신원 확인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유족들 사이에서는 육안으로 판별이 안 되는 시신 한 구를 놓고 내 가족이라며 실랑이가 벌어지는 비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5. 수사[편집]

대연각 호텔 사장 A씨가 관계자들과 결탁해 '방화문이 잘 설치돼 있다'고 준공 검사서를 허위로 작성한 정황이 포착됐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A씨가 소방법에 따라 방화 관리자를 선임하고 당국에 신고 절차를 밟았다는 점 등이 참작되면서, 정작 화재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아 논란을 남겼다.

6. 논란[편집]

6.1. 불구경[편집]

사고 당시 화재 현장 주변에는 수만명의 시민이 몰려들었다. 일부는 택시를 타고 현장을 찾았다. 구조보다 구경이 앞선 장면은 당시 사회의 재난 인식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연기 속에서 질식 직전의 투숙객이 매트리스를 들고 투신하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은 이후 보도사진상을 받으며 참사의 상징으로 남았다.#

6.2. 뒤늦은 제도 정비[편집]

대연각호텔 화재는 대한민국의 화재 안전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이 사고를 계기로 대형 건축물에 대한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화, 화재 경보 설비 전면 점검, 고층 건물 옥상 헬리패드 확보 등이 제도적으로 강화됐다.

특히 '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화재 피해 보상과 보험 가입이 법적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그러나 이 역시 참사 이후에야 마련된 장치였다.#

7.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현재 고려통상이 본사로 쓰고 있으며, 현재는 외국 대사관 및 공관과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