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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大韓民國 | Republic of Korea | |
기본 정보 | |
존속 기간 | 1981년~1988년 |
제8차 개헌 이전 | 대한민국 제4공화국 |
제8차 개헌 이후 | |
수도 | |
공용어 | 한국어 |
총인구 | 4189만명 (1987년 어림) |
정치 | |
정치체제 | 공화제, 대통령중심제, 군부 독재 |
대통령 | 전두환 |
경제 | |
통화 | 대한민국 원 |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5공화국은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공화국이다.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존속했다.
2. 상세[편집]
10·26 사건으로 새로 등장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1979년 12월 12일에 병력을 동원하여 군사권을 차지했고,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로 정권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이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제5공화국 헌법을 공포했다.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는 제11대 전두환이 선출되었으며, 정의사회구현, 복지사회건설, 선진조국창조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1980년대의 시대상을 대표하는 정권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5공화국은 제4공화국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제5공화국은 영구 집권이 가능했던 제4공화국의 6년 연임제 대신 7년 단임제를 고수했으며, 통금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취했다. 전두환 정권은 제3공화국, 제4공화국의 색체를 지우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모식을 8년동안 금지시키고 과거 공화당 출신의 김종필 등을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 해외로 출국시키는 등 과거 3공, 4공 시절과의 완전한 단절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이후 6월 민주 항쟁과 6.29선언을 통하여 제5공화국은 소멸하였고 개헌으로, 국민이 직접 뽑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 제6공화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제5공화국은 제4공화국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제5공화국은 영구 집권이 가능했던 제4공화국의 6년 연임제 대신 7년 단임제를 고수했으며, 통금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취했다. 전두환 정권은 제3공화국, 제4공화국의 색체를 지우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모식을 8년동안 금지시키고 과거 공화당 출신의 김종필 등을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 해외로 출국시키는 등 과거 3공, 4공 시절과의 완전한 단절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이후 6월 민주 항쟁과 6.29선언을 통하여 제5공화국은 소멸하였고 개헌으로, 국민이 직접 뽑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 제6공화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3. 공화국 성립[편집]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였으나 곧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3월 보안사에서는 정보처를 부활하고,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가 정치에 나서는 것을 정당화하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K공작계획을 실시했다. 1980년 4월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어 국내의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신군부 세력(하나회)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리고, 광주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정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주체로 실시된 간선제에 따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0월 27일에는 임기 7년의 단임제 대통령제 등을 골자로 하는 제8차 헌법 개정을 했으며, 1981년 2월25일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0년 5월 신군부 세력(하나회)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리고, 광주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정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주체로 실시된 간선제에 따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0월 27일에는 임기 7년의 단임제 대통령제 등을 골자로 하는 제8차 헌법 개정을 했으며, 1981년 2월25일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4. 정치[편집]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을 전면 부정했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는 헌법 개정 과정에서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했다. 또한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면서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전두환 정권은 더 나아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공식적인 추모식을 금지시켰고, 공식 추도식은 민주화가 된 1987년에야 다시 재개될 수 있었다. 1980년부터 1986년까지의 추도식은 박정희의 자녀인 박근혜 등이 가족끼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갈음했다.
제5공화국 정권은 형식 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였다. 일단 대통령의 임기를 6년에서 7년으로 늘린 대신 영구집권이 가능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연임제 대신 중임 제한을 기본으로 하는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한 단임제를 택했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 중에 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과 국회의원을 임명하게 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을 삭제했으며, 국회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유신체제 당시에는 야당인사의 대선 출마가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으나 (명목 상으로는 허용했으나 정부기관이 이를 방해했기 때문에 금지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5공화국은 야권의 출마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유지를 위한 확고한 보장을 위해, 제4공화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변형시켜 새롭게 대통령 선거인단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제5공화국은 유신체제처럼 간선제를 고수했다.
그럼에도 국가의 사회복지 의무에 대한 규정을 설치하고(헌법 제32조), 경제 질서에 대한 공법적 규제를 확대했다. 기본권에 대해서도 대체적으로 제3공화국의 조항 수준으로 회귀했고, 행복추구권(헌법 제9조)이나 연좌제의 금지(헌법 제12조 3항), 사생활의 보호(헌법 제16조), 환경권(헌법 제33조) 등의 조항도 신설됐다. 헌법 개정에는 국민 투표를 통한 개정만 가능하도록 규정해 절차를 일원화시켰다(헌법 제131조).
제5공화국은 김영삼, 김대중 등을 비롯한 주요 야당 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채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등의 이른바 관제야당을 내세워 정당정치를 형식화하는 등 사실상의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야당 참여자를 미리 선별했을 뿐 아니라, 일부 운영비를 보조하고 전국구 후보들의 당비 헌금 한도액(1억원)까지 친절하게 정해줬다. 정치규제자의 친인척, 친 김대중 인사, 해직 언론인 등은 공천에서 제외하도록 엄격히 관리하기도 했다. 대선 때는 야권의 입후보를 허용하면서도, 정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 가능했다. 제5공화국은 임기 내내 정권 성립 과정에서 발생한 5·17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등 정통성 없는 정권 창출 과정에 대해 재야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김영삼은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했다.
제5공화국 정권은 형식 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였다. 일단 대통령의 임기를 6년에서 7년으로 늘린 대신 영구집권이 가능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연임제 대신 중임 제한을 기본으로 하는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한 단임제를 택했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 중에 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과 국회의원을 임명하게 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을 삭제했으며, 국회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유신체제 당시에는 야당인사의 대선 출마가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으나 (명목 상으로는 허용했으나 정부기관이 이를 방해했기 때문에 금지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5공화국은 야권의 출마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유지를 위한 확고한 보장을 위해, 제4공화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변형시켜 새롭게 대통령 선거인단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제5공화국은 유신체제처럼 간선제를 고수했다.
그럼에도 국가의 사회복지 의무에 대한 규정을 설치하고(헌법 제32조), 경제 질서에 대한 공법적 규제를 확대했다. 기본권에 대해서도 대체적으로 제3공화국의 조항 수준으로 회귀했고, 행복추구권(헌법 제9조)이나 연좌제의 금지(헌법 제12조 3항), 사생활의 보호(헌법 제16조), 환경권(헌법 제33조) 등의 조항도 신설됐다. 헌법 개정에는 국민 투표를 통한 개정만 가능하도록 규정해 절차를 일원화시켰다(헌법 제131조).
제5공화국은 김영삼, 김대중 등을 비롯한 주요 야당 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채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등의 이른바 관제야당을 내세워 정당정치를 형식화하는 등 사실상의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야당 참여자를 미리 선별했을 뿐 아니라, 일부 운영비를 보조하고 전국구 후보들의 당비 헌금 한도액(1억원)까지 친절하게 정해줬다. 정치규제자의 친인척, 친 김대중 인사, 해직 언론인 등은 공천에서 제외하도록 엄격히 관리하기도 했다. 대선 때는 야권의 입후보를 허용하면서도, 정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 가능했다. 제5공화국은 임기 내내 정권 성립 과정에서 발생한 5·17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등 정통성 없는 정권 창출 과정에 대해 재야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김영삼은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했다.
5. 경제[편집]
1980년대 전반기에는 1960·70년대 경제개발의 후유증으로 외채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고, 장영자 사건, 명성그룹 사건, 국제그룹 해체 등 많은 문제가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로 정부의 긴축정책과 국제 유가의 하락, 달러 가치의 하락, 금리의 하락 등 3저현상이 지속되어 물가가 한 자리수로 잡히고, 수출이 호조를 보였으며, 부가가치가 높은 자동차·전자·기타 반도체 첨단산업이 활기를 띠고 성장했다.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와 엑셀이 미국으로 수출된 것은 우리나라가 자동차 산업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게 되는 첫 신호탄이었다. 한편, 선진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높아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축산물도 수입자유화의 폭이 확대되어 1986년 기준 수입자유화율은 91.5%에 도달했으며, 외국자본의 투자비율도 점차 확대하여 100%까지 허용하였다. 정부의 시장개방정책은 대기업에는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으나, 값싼 외국산 농.축산물의 수입으로 농촌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양곡자급률은 1970년의 86%에서 1985년에는 48.4%로 낮아졌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밥상에는 외국산 농.축산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0대 대기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9년의 33%에서 1989년에는 54%로 증가하고, 30대 대기업의 계열기업은 1970년 126개, 1979년 429개, 1989년 513개로 늘어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촌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고, 이농민의 대다수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여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산업노동자 혹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다. 수출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가 1987년 기준 3천 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와 엑셀이 미국으로 수출된 것은 우리나라가 자동차 산업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게 되는 첫 신호탄이었다. 한편, 선진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높아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축산물도 수입자유화의 폭이 확대되어 1986년 기준 수입자유화율은 91.5%에 도달했으며, 외국자본의 투자비율도 점차 확대하여 100%까지 허용하였다. 정부의 시장개방정책은 대기업에는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으나, 값싼 외국산 농.축산물의 수입으로 농촌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양곡자급률은 1970년의 86%에서 1985년에는 48.4%로 낮아졌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밥상에는 외국산 농.축산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0대 대기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9년의 33%에서 1989년에는 54%로 증가하고, 30대 대기업의 계열기업은 1970년 126개, 1979년 429개, 1989년 513개로 늘어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촌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고, 이농민의 대다수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여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산업노동자 혹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다. 수출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가 1987년 기준 3천 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
6. 외교[편집]
반공의 기치 아래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했다.[6] 제5공화국은 전 정권에 이어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 또는 방조 의혹은 이 시기 학생운동의 한 테마였다. 일본과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제도, 일본의 대북 접근 등 주로 일본이 야기시킨 각종의 현안 때문에 갈등을 빚었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과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하였으나, 북한은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서유럽과는 정치적 이슈가 크지 않았고, 경제·통상 부문에 집중하였다.
7. 복지[편집]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끄럽던 1987년 1월 16일 검찰이 부랑아 수용소 부산 형제복지원의 원장실 압수 수색을 하는데 원장 책상의 서랍 안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친필 서신이 발견된다. 거리의 부랑아를 소탕하라는 지시사항의 내용이었다. 형제복지원의 운영 주체는 박인근 원장이 아닌 전두환 정권이었다고 당시 담당 검사는 증언했다.
8.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