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명성황후
1. 개요[편집]
명성황후의 생애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2. 출생[편집]
민씨는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 섬락리 사저 (현재의 여주시 능현동 250-1)에서 민유중의 6대손으로 사도시 첨정이었던 민치록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자영이었다.
아버지 민치록의 전 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한산 이씨에게는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 민기현은 예조참판과 개성부유수를 지냈으나 아버지 민치록은 정3품 사도사첨정에 이르렀고 만년에 낙향하여 여주에서 선영을 돌보며 소일하고 있었다. 뒤에 대를 잇기 위해 위해 11촌 아저씨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였다.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인데, 1874년 권력을 쟁취하려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폭탄으로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그녀의 5대 고모뻘로, 5대조 민진후의 누이였다. 생가 감고당은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지를 지키기 위해 지은 묘막집으로 이후 민유중의 종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민치록은 문음으로 나가기에 앞서 감고당에 거주하며 민유중의 묘를 지키는 일을 했다.
숙종비 인현왕후의 친정이라 했으나 그녀의 집안은 빈곤하였고, 경기도 여주의 산골 민유중의 묘지 근처에서 지냈다. 그녀의 생가 근처 200m 즈음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임원준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아버지 민치록의 전 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한산 이씨에게는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 민기현은 예조참판과 개성부유수를 지냈으나 아버지 민치록은 정3품 사도사첨정에 이르렀고 만년에 낙향하여 여주에서 선영을 돌보며 소일하고 있었다. 뒤에 대를 잇기 위해 위해 11촌 아저씨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였다.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인데, 1874년 권력을 쟁취하려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폭탄으로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그녀의 5대 고모뻘로, 5대조 민진후의 누이였다. 생가 감고당은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지를 지키기 위해 지은 묘막집으로 이후 민유중의 종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민치록은 문음으로 나가기에 앞서 감고당에 거주하며 민유중의 묘를 지키는 일을 했다.
숙종비 인현왕후의 친정이라 했으나 그녀의 집안은 빈곤하였고, 경기도 여주의 산골 민유중의 묘지 근처에서 지냈다. 그녀의 생가 근처 200m 즈음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임원준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3. 유년기[편집]
민자영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小學)·《효경》(孝經)·《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고 한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웁게 했다. 김동인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도 명성황후는 아버지 민치록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때에 간호를 한 효녀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이름은 영조가 하사했다. 형제와 부모를 여읜 고아인 데다가 의지할 오라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가까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이름은 영조가 하사했다. 형제와 부모를 여읜 고아인 데다가 의지할 오라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가까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4. 왕비 간택[편집]
1866년 어린 민자영은 왕비 간택에 참여하게 된다. 민자영이 간택되어 왕비가 되는 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 가례도감의궤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우선 1866년 2월 15일 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 그리고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 왕비로 정해진 때는 3월 6일의 삼간택에 뽑힐 때였으며, 3월 21일 남편이 될 고종이 운현궁에서 명성황후를 데리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을 거행했다. 아버지 민치록은 왕의 장인에게 추증하는 예에 따라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이어 민치록에게는 예전에 따라 여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안동 김씨 김병학의 딸, 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의 배필을 정하기로 비밀 묵계를 체결했으나, 약속을 뒤집게 되면서 김병학 등 대원군을 지지했던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된다. 왕비는 그 점을 이용하여, 후에 흥선대원군을 견제할 때 안동 김씨 일가와 힘을 모은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안동 김씨 김병학의 딸, 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의 배필을 정하기로 비밀 묵계를 체결했으나, 약속을 뒤집게 되면서 김병학 등 대원군을 지지했던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된다. 왕비는 그 점을 이용하여, 후에 흥선대원군을 견제할 때 안동 김씨 일가와 힘을 모은다.
5. 왕비 시절[편집]
그러나 명성황후가 입궁할 무렵엔,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또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 선과 그를 낳은 귀인 이씨를 총애하였다.
명성황후는 안전과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 등 일가 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 등과 제휴했다. 이와 같이 자리를 다지던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71년에 아이를 낳았으나, 왕자는 항문 폐색으로 인해 5일 만에 죽어버렸다.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달여준 약에 산삼을 많이 넣은 일을 의심했다.
명성황후는 안전과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 등 일가 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 등과 제휴했다. 이와 같이 자리를 다지던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71년에 아이를 낳았으나, 왕자는 항문 폐색으로 인해 5일 만에 죽어버렸다.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달여준 약에 산삼을 많이 넣은 일을 의심했다.
5.1. 고종의 친정 유도[편집]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축출당했던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와도 입을 모았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과도 입을 모았다. 또한 서원 철폐 과정에서 등을 돌리게 된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하여 최익현 등을 포섭해 왔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임금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해임당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익현의 뒤를 지원하였고 최익현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올랐으며,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대원군에게 무시당하던 종실 일부를 포섭하였고,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자 여기에 반발한 노론계 단체 역시 포섭에 성공하였다.
이어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다시 호조참판으로 올려주었으며,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흥선 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과의 논의 끝에, 1873년 11월엔 운현궁에서 궁궐로 출입하는 대원군의 전용 문을 폐쇄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의 11년간의 간섭은 종결되었다. 대원군은 양주 시둔면 곧은골로 물러났으나, 은퇴 이후에도 대원군은 끊임없이 복귀를 꿈꾸었고 명성황후 및 민씨 일족과 수시로 갈등하였다.
이어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다시 호조참판으로 올려주었으며,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흥선 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과의 논의 끝에, 1873년 11월엔 운현궁에서 궁궐로 출입하는 대원군의 전용 문을 폐쇄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의 11년간의 간섭은 종결되었다. 대원군은 양주 시둔면 곧은골로 물러났으나, 은퇴 이후에도 대원군은 끊임없이 복귀를 꿈꾸었고 명성황후 및 민씨 일족과 수시로 갈등하였다.
5.2. 흥선대원군 퇴진과 권력 투쟁[편집]
1873년에는 최익현으로 하여금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리도록 했다. 22세로 성인이 된 국왕을 두고 섭정의 명분이 없었던 대원군은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어 흥선대원군 세력의 최익현 공격을 우려하여 일시적으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등용할 것을 고종에게 상주하였다.
1874년 2월에는 둘째 아들 이척(李坧, 훗날의 순종)을 낳았으며, 이듬해 2월 이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흥선대원군 계열은 최익현을 암살하려 했고, 왕비는 배후에서 최익현을 일시적으로 유배보낸 뒤 다시 등용하여 승진시킨다.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배제한 명성황후는 개화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대외적으로도 개방이론을 포용하여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며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이런 한편으로는 개화파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길준에 의하면 그녀가 개화파를 배제하려는 모의를 꾸미다가 대원군 즉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고 한다.
이에 긴장한 명성황후는 우호세력을 중용하여 세력을 강화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함과 동시에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과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 한편 대원군 계열에서는 끊임없이 정계 복귀 시도를 했고, 1881년에는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완은군)이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되었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보고 유생들을 동원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려 하지만 사전 발각되어 미수로 그친다.
그러나 1874년 폭탄테러로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부인 등 일가족 3명이 폭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일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애달파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보복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 등의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유배보내려 파면하였다. 1882년 2월에는 친척 민태호의 딸인 민씨를 왕세자빈으로 간택했다.
1874년 2월에는 둘째 아들 이척(李坧, 훗날의 순종)을 낳았으며, 이듬해 2월 이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흥선대원군 계열은 최익현을 암살하려 했고, 왕비는 배후에서 최익현을 일시적으로 유배보낸 뒤 다시 등용하여 승진시킨다.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배제한 명성황후는 개화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대외적으로도 개방이론을 포용하여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며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이런 한편으로는 개화파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길준에 의하면 그녀가 개화파를 배제하려는 모의를 꾸미다가 대원군 즉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고 한다.
이에 긴장한 명성황후는 우호세력을 중용하여 세력을 강화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함과 동시에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과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 한편 대원군 계열에서는 끊임없이 정계 복귀 시도를 했고, 1881년에는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완은군)이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되었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보고 유생들을 동원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려 하지만 사전 발각되어 미수로 그친다.
그러나 1874년 폭탄테러로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부인 등 일가족 3명이 폭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일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애달파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보복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 등의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유배보내려 파면하였다. 1882년 2월에는 친척 민태호의 딸인 민씨를 왕세자빈으로 간택했다.
5.3. 임오군란과 대원군의 정변 시도[편집]
그러나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허욱의 임오군란 때에 죽을 위험에 달하였으나, 미리 변장을 해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했다. 이때 명성황후는 홍계훈의 누이로 연기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임오군란 동안 1882년 6월 흥선대원군은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은 임오군란 때 군인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허욱은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이자 고종의 정적인 영선군 이준용의 스승이었다. 임오군란 관련 혐의로 역적으로 몰려 단죄되었으나, 1907년 11월부터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 4월 명예회복되었다. 그러나 왕비는 경복궁에 그들이 다다랐을 때에 빠져나가고 없었다.
명성황후가 궁으로부터 도망다니며 빠져나와 있는 동안,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임오군란의 6월 10일의 난군들에게 피습 당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한 그는 흥선대원군을 바라보고, "대감 내를 부디 목숨만은 지켜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비웃으며 "내 어찌 대감을 그대로 둘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계단으로 내던져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아래서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주검을 총검으로 마구 베어 잘라놓았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라고 매우 외치며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잔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
이때 대원군의 부대부인도 입궐했는데, 그녀는 명성황후를 본인이 타고 온 사인교에 숨겨놓고 나왔다는데 이때 어떤 궁인이 이를 보고는 난병들에게 밀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난병은 사인교의 포장을 잘라내어 땅에 내던졌다. 그때 무예별감 홍재희가 '그 여인은 내 누이로, 상궁으로 있는 이이다. 그대들은 오인하지 말라'라고 외친 뒤에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이 와중에 명성황후는 대전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은신했으며, 궁에 남은 흥인군 이최응과 민겸호는 군인들에게 피습당했다. 한편 한양에서는 정권을 위임받은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찾아내지 못하자 "황후가 죽었다"라고 발표하고 국상 절차를 밟았다.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재정과 병권을 맏아들 이재면에게 위임하고, 김윤식에게 청나라 천진으로부터의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명성황후가 궁으로부터 도망다니며 빠져나와 있는 동안,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임오군란의 6월 10일의 난군들에게 피습 당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한 그는 흥선대원군을 바라보고, "대감 내를 부디 목숨만은 지켜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비웃으며 "내 어찌 대감을 그대로 둘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계단으로 내던져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아래서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주검을 총검으로 마구 베어 잘라놓았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라고 매우 외치며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잔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
이때 대원군의 부대부인도 입궐했는데, 그녀는 명성황후를 본인이 타고 온 사인교에 숨겨놓고 나왔다는데 이때 어떤 궁인이 이를 보고는 난병들에게 밀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난병은 사인교의 포장을 잘라내어 땅에 내던졌다. 그때 무예별감 홍재희가 '그 여인은 내 누이로, 상궁으로 있는 이이다. 그대들은 오인하지 말라'라고 외친 뒤에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이 와중에 명성황후는 대전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은신했으며, 궁에 남은 흥인군 이최응과 민겸호는 군인들에게 피습당했다. 한편 한양에서는 정권을 위임받은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찾아내지 못하자 "황후가 죽었다"라고 발표하고 국상 절차를 밟았다.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재정과 병권을 맏아들 이재면에게 위임하고, 김윤식에게 청나라 천진으로부터의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5.4. 청나라 군대의 개입요청과 임오민병 진압[편집]
명성황후는 궁궐에 있는 동안 고종을 움직여 하여금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게 하고, 대원군이 부활시켰던 삼군부를 폐지했으며, 영선사와 신사유람단을 중국과 일본에 파견하여 공업·무기제조법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전래되면서 조선책략의 연미을 접한 그녀는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비밀리에 호출하여 밀명을 내려, 청나라에 한·미수교를 주선, 후원해 줄 것을 부탁했고, 동시에 사람을 보내 개화승려 이동인을 불러들인 뒤 그에게 밀명을 내린 뒤 일본에 파견,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한미수교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런 한편, 명성황후에 의해 기용되었던 개화파 김홍집은 1881년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전했는데, 이 책의 내용을 문제삼은 유생들이 1881년 2월 척사 상소 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하기 위해 역모를 계획했다. 그 해 8월에는 대원군의 주변 인물인 안기영과 권정호 등이 이재선 즉 대원군의 서자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고종 폐위를 위한 역모를 은밀히 전개했으나, 고변으로 인해 발각되어 이재선, 안기영 등 주동자들이 옥에 갇히고 사형당했다. 1882년에는 별기군과 구식군 간의 처우 차별과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어 있었던 군대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명성황후와 그녀의 인물들은 대원군의 지원을 받은 군인들의 위협을 받고, 명성황후는 은신한 반면 많은 인물들이 피습당했다. 일본 공사관도 피습됐다.
일본은 중국(청)의 군대 파병에 대한 "일본인 보호"의 명목으로, 도주했던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지휘 아래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일본군은 일단 협의를 먼저 요청하는 대원군을 무시한 채 한양으로 들어왔다가, 이에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대원군의 표명으로 일단 인천으로 후퇴했다. 중국인 제독 오장경은 7월 일본군이 퇴각한 틈을 타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했고, 그날 밤엔 한성을 장악했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는 청군의 보호 하에 입궁했다. 이 일 이후 명성황후는 급진 개화파 등을 정권에서 점차 배제시키며 외교적으론 친청 정책으로 기울어졌다.
이런 한편, 명성황후에 의해 기용되었던 개화파 김홍집은 1881년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전했는데, 이 책의 내용을 문제삼은 유생들이 1881년 2월 척사 상소 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하기 위해 역모를 계획했다. 그 해 8월에는 대원군의 주변 인물인 안기영과 권정호 등이 이재선 즉 대원군의 서자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고종 폐위를 위한 역모를 은밀히 전개했으나, 고변으로 인해 발각되어 이재선, 안기영 등 주동자들이 옥에 갇히고 사형당했다. 1882년에는 별기군과 구식군 간의 처우 차별과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어 있었던 군대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명성황후와 그녀의 인물들은 대원군의 지원을 받은 군인들의 위협을 받고, 명성황후는 은신한 반면 많은 인물들이 피습당했다. 일본 공사관도 피습됐다.
일본은 중국(청)의 군대 파병에 대한 "일본인 보호"의 명목으로, 도주했던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지휘 아래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일본군은 일단 협의를 먼저 요청하는 대원군을 무시한 채 한양으로 들어왔다가, 이에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대원군의 표명으로 일단 인천으로 후퇴했다. 중국인 제독 오장경은 7월 일본군이 퇴각한 틈을 타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했고, 그날 밤엔 한성을 장악했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는 청군의 보호 하에 입궁했다. 이 일 이후 명성황후는 급진 개화파 등을 정권에서 점차 배제시키며 외교적으론 친청 정책으로 기울어졌다.
5.5. 동학 농민군과의 대립[편집]
이와 같이 조선을 둘러싸고 러시아, 일본, 청나라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속에서 명성황후는 정부와 권력의 안정에 모든 역량을 쏟았다. 이 와중에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은 비록 민중을 거짓말로 홀렸다는 죄목을 받은 최제우가 처형되었으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을 중심으로 재기했다.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집회에서는 농민들이 2만여명 모여 농민을 괴롭히는 지방관들의 퇴출과 민생고를 탕감하고, 오랑캐들을 몰아낼 것 등을 요구하였고,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4년 1월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패를 규탄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명성황후는 온건 개화파 및 친척 척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이 동학 농민군을 동비(東匪. 동학의 불한당들.)로 보고한 것을 그대로 믿고 지냈다.
한편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 — 1894년 2월 21일,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에게 보낸 비밀 정보
같은 해 4월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의해 점령되고 흥선대원군이 반군을 지원하여 고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성황후는 지원을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군인들이 청나라에 의해 파병되자 이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로 파병하였다. 농민군과 관군은 조선에 일본군과 청군이 당도하자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개 지역에 민정 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행정을 처리키로 하고 휴전했다. 그러나 조선에 온 이들 오랑캐들은 주둔하며 군대를 증파했다.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빌미로 일본은 청나라와의 협력을 제의했으나, 청나라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민씨 일가는 일본이 궁궐에 보낸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와 휘하의 군인들에 의해 퇴출당하고 대원군은 또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됐으며, 일본은 김홍집을 총리 대신에 앉히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개혁 조선의 내정 개혁과 갑오경장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을 먼저 공격한 뒤에야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으며, 7월 ~ 9월 사이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한편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 — 1894년 2월 21일,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에게 보낸 비밀 정보
같은 해 4월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의해 점령되고 흥선대원군이 반군을 지원하여 고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성황후는 지원을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군인들이 청나라에 의해 파병되자 이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로 파병하였다. 농민군과 관군은 조선에 일본군과 청군이 당도하자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개 지역에 민정 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행정을 처리키로 하고 휴전했다. 그러나 조선에 온 이들 오랑캐들은 주둔하며 군대를 증파했다.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빌미로 일본은 청나라와의 협력을 제의했으나, 청나라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민씨 일가는 일본이 궁궐에 보낸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와 휘하의 군인들에 의해 퇴출당하고 대원군은 또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됐으며, 일본은 김홍집을 총리 대신에 앉히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개혁 조선의 내정 개혁과 갑오경장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을 먼저 공격한 뒤에야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으며, 7월 ~ 9월 사이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5.6. 명성황후 폐위 음모와 실패[편집]
갑오경장 초기에 명성황후와 고종 폐위 음모를 꾸미던 대원군과 이준용은 먼저 명성황후 폐위를 전초작업으로써 착수하였다.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를 적은 문건이 1894년 6월 22일부터 흥선대원군에 의해 일본 공사 오토리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일본 측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이준용도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재조선 일본 공사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스기무라 일본 공사관 서기관 등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에 대한 감찰과 간섭을 강화하려 흥선대원군은 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였다. 고종은 7월 초 갑오경장을 단행한다. 이때도 명성황후 폐위의 정당성을 믿는 이준용은 꾸준히 일본 공사관을 방문하여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명성황후를 폐위하려는 음모는 갑오경장을 전후해서 대원군과 이준용의 주업이었으나 일본 영사관에선 호응하지 않아 좌절된다.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이 일본군 혼성여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대원군은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했으며,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일가의 세도는 무너졌다. 대원군 일가는 그러나 달포 만에 일본의 의도로 끌어내려진다. 대원군의 대신으로 김홍집 내각이 일본군의 괴뢰정부로 만들어지며, 이 정부는 경장사업을 진행한다. 이로 인해 민씨 일족은 좌찬성 민영준(뒤에 영휘(永徽)로 개명)을 필두로 은 모두 유배되었고, 명성황후도 위기 중에 폐위 위기를 아슬아슬히 넘겨 홍순형 경기도 감사의 집에 은신한다.
이준용도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재조선 일본 공사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스기무라 일본 공사관 서기관 등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에 대한 감찰과 간섭을 강화하려 흥선대원군은 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였다. 고종은 7월 초 갑오경장을 단행한다. 이때도 명성황후 폐위의 정당성을 믿는 이준용은 꾸준히 일본 공사관을 방문하여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명성황후를 폐위하려는 음모는 갑오경장을 전후해서 대원군과 이준용의 주업이었으나 일본 영사관에선 호응하지 않아 좌절된다.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이 일본군 혼성여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대원군은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했으며,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일가의 세도는 무너졌다. 대원군 일가는 그러나 달포 만에 일본의 의도로 끌어내려진다. 대원군의 대신으로 김홍집 내각이 일본군의 괴뢰정부로 만들어지며, 이 정부는 경장사업을 진행한다. 이로 인해 민씨 일족은 좌찬성 민영준(뒤에 영휘(永徽)로 개명)을 필두로 은 모두 유배되었고, 명성황후도 위기 중에 폐위 위기를 아슬아슬히 넘겨 홍순형 경기도 감사의 집에 은신한다.
5.7. 동학 농민군 진압[편집]
조선에 대한 일본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자 동학농민군이 다시금 모여 대일 농민 전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농민군의 12월의 패배로 봉기는 우금치 전투를 끝으로 마지막을 맞으며, 녹두장군으로도 불리는 전봉준도 순창에서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4월 24일 처형되었다.
동학의 농민 무리들에 조정은 동학 농민 운동 초기의 보고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이 단순 비적인 정도로 인식했으나, 명성황후는 동학 농민군을 부정적으로 볼만한 이유와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녹두장군 즉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관계 때문이었다. 운현궁에 전봉준은 1890년에 찾아갔다. 운현궁에서 전봉준은 1890년대 초반부터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그 뒤 고향으로 내려간 전봉준은 또 다시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력을 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전봉준은 1893년 2월 흥선대원군을 방문하려 한성부로 올라가기도 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에게 잠깐 손님으로 와 있던 것 뿐이나 대원군은 전봉준에게 매우 후한 대접을 했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민중을 위해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밀접한 관계로부터 전봉준과 흥선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세간엔 돌았다. 이런 한편 조선의 내정은 또 한 번 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동원된 청나라 군대의 간섭을 받는다.
동학의 농민 무리들에 조정은 동학 농민 운동 초기의 보고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이 단순 비적인 정도로 인식했으나, 명성황후는 동학 농민군을 부정적으로 볼만한 이유와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녹두장군 즉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관계 때문이었다. 운현궁에 전봉준은 1890년에 찾아갔다. 운현궁에서 전봉준은 1890년대 초반부터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그 뒤 고향으로 내려간 전봉준은 또 다시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력을 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전봉준은 1893년 2월 흥선대원군을 방문하려 한성부로 올라가기도 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에게 잠깐 손님으로 와 있던 것 뿐이나 대원군은 전봉준에게 매우 후한 대접을 했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민중을 위해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밀접한 관계로부터 전봉준과 흥선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세간엔 돌았다. 이런 한편 조선의 내정은 또 한 번 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동원된 청나라 군대의 간섭을 받는다.
5.8. 개화당 제거 미수와 흥선대원군의 암살 공작[편집]
1894년 가을, 명성황후는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이때, 흥선대원군의 정보망에 발각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일본공사와 협의하며 일본에게 약간의 도움을 부탁하였다. 명성황후 즉, 그녀가 죽음을 맞게 되는 음모가 꾸며지는 때였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제거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으리라는 일본 공사 오카모토의 언약을 받았다.
1895년 9월, 일본 공사에 미우라 고로와 명성황후 제거의 모의에 대원군을 끌어들이려는 일본인들 오카모토 류노스케, 스기무라 후카시 등이 대원군의 도움을 받으려 대원군에게 다가갔으나, 대원군은 일단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교동에 장손 이준용이 유폐된 일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대원군이 운현궁에 있을 때 오카모토가 대원군을 설득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이때 일본 공사관을 비밀리에 자주 출입했는데, 유길준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일본 영사관을 드나들기를 수시로 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유길준은 왕후 제거에 대원군이 일본 낭인들의 지원을 얻은 것은 매우 잘못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래도 왕후 제거 계획에 관해 유길준은 대원군에 협력했는데, 이준용을 두고 박영효와 서광범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위장된 의도적인 고문치사를 계획하는 중에 유길준의 갑작스런 왕후 제거 계획 가담 소식에 당황한다.
1895년 9월, 일본 공사에 미우라 고로와 명성황후 제거의 모의에 대원군을 끌어들이려는 일본인들 오카모토 류노스케, 스기무라 후카시 등이 대원군의 도움을 받으려 대원군에게 다가갔으나, 대원군은 일단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교동에 장손 이준용이 유폐된 일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대원군이 운현궁에 있을 때 오카모토가 대원군을 설득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이때 일본 공사관을 비밀리에 자주 출입했는데, 유길준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일본 영사관을 드나들기를 수시로 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유길준은 왕후 제거에 대원군이 일본 낭인들의 지원을 얻은 것은 매우 잘못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래도 왕후 제거 계획에 관해 유길준은 대원군에 협력했는데, 이준용을 두고 박영효와 서광범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위장된 의도적인 고문치사를 계획하는 중에 유길준의 갑작스런 왕후 제거 계획 가담 소식에 당황한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