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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발전4. 감독계의 변천5.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미국의 영화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2. 상세[편집]

미국 영화의 기원으로, 기록상 두 번째로 동작을 필름에 담아 재현한,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캘리포니아주의 팰로앨토에서 한 줄로 정렬한 사진기로 찍은 달리는 말의 일련의 사진들을 꼽는다. 마이브리지의 업적으로 전국의 발명가들이 동작을 담는 유사한 장치를 만들게 되었다. 토머스 에디슨도 키네토스코프를 만들어, 그러한 장치를 처음으로 제작한 부류에 포함되었다.

미국 필름 산업의 초창기에는 뉴욕이 그 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퀸스의 카우프만 아스토리아 스튜디오가 무성영화 시대에 세워져 마르크스 형제와 W.C.필즈가 사용하였다. 맨해튼의 첼시 또한 종종 사용되었다.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배우인 메리 픽퍼드가 이곳에서 초기의 일부 필름을 촬영했다. 시카고, 플로리다, 텍사스, 캘리포니아와 쿠바에서도 영화가 제작되었다.

3. 발전[편집]

태동기와 대공황 시대를 발표해서 자본주의 산업사회체제 아래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동정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경제대공황은 1933년경부터 차츰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후 주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다가 헨리 코스타의 《오케스트라의 소녀》(1937)에 이르러 미국 영화는 비로소 지난날의 낙천주의를 되찾게 되는데, 《오케스트라의 소녀》는 색다른 뮤지컬로 이후 미국의 뮤지컬 영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1939년 빅터 플레밍 감독이 395만 달러를 들인 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내놓아 7,703만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같은 해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영화화한 《애정(哀情)》을 내놓아, 대작은 아니지만 밀도있는 작품으로 성공했다. 이어 젊은 감독 오슨 웰스는 《시민 케인》(1941)을 발표하여 미국영화 뿐 아니라 세계 영화사에 획기적인 공헌을 남겼다. 팬포커스(pan focus) 촬영기법과 플래시백(flashback) 기법은 그 주제와 함께 큰 주목을 모았으며, 이로써 미국영화는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유럽영화를 앞지르기 시작했다고 평가된다.

제2차 세계 대전를 내놓아 미국인의 정의감에 호소하였다. 전쟁영화가 주류를 이루게 됨에 따라 마빈 리로이는 다시 《마음의 행로》를 내놓아 전쟁에 휩쓸린 인간의 엄청난 비극을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윌리엄 와일러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5)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세 사람의 참전용사가 전쟁이 끝난 뒤 각기 사회에 복귀하면서 겪게 되는 애환을 묘사한 작품으로, 어느 나라나 직면했던 심각한 사회문제를 다룬 것이다.

전쟁과 관계없는 분야에서 1940년 영국의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레베카》를 발표, 공포심리를 파헤치는 서스펜스 드라마를 개발했고, 빌리 와일더의 《잃어버린 주말》(1945)은 인간의 불안정한 내면세계를 특수 촬영과 음향효과로 묘사하여 주목을 받았다. 전쟁의 승리로 자신을 갖게 된 미국 영화계는 영화산업이 무한한 가능성을 갖게 된 것으로 확신하고 미국 영화계 자체에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왕년의 인기 배우와 신인 시나리오 작가를 통해 인기인의 정신적 폐허를 파헤친 와일더의 《선셋 대로》(1950)와 존 시트의 《갈채》(1954)가 그런 부류에 속한다.

사실주의처럼 사실적이고 개성적인 배우가 중요하게 쓰이게 되었다. 여자 배우는 꼭 미인이 아니어도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전쟁영화가 끊임 없이 제작되었는데, 사실주의의 영향으로 단순한 영웅주의를 배척하고 반전적인 작품이라든가 군대의 내막을 폭로한 작품이 증가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1957)나 《돌격》(1957)은 이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로 보이는 장르도 등장했다. 공상과학(SF)영화가 그것이다. 《월세계 정복》(1950), 《지구 최후의 날》(1951) 《우주전쟁》(1955) 등의 제작자 조지 펄이 명성을 높였다. 공상과학영화는 환상적인 공상에 근거하고 있지만 바로 그 ‘환상적인’ 것을 통해 또 다른 현실상황을 창출해낸다.

텔레비전과 대형영화의 등장의 공세를 받기 시작한 미국영화계는 사양산업으로 몰리기도 했다.

미국의 텔레비전은 1947년에는 불과 15만 8천대 정도였던 수상기가 50년 말에는 800만 대에 달하는 급격한 발전을 보여, 영화계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 대책으로서 고안된 것이 입체영화와 대형영화이다.

입체영화는 2 ~ 3개의 작품이 시도되었을 뿐 실패로 끝났지만, 대형영화는 순조로이 발달했다. 1952년 9월, 3대의 카메라로 3개의 필름에 촬영하고, 3대의 영사기로 거대한 스크린에 영사(映寫)하는 시네라마 《이것이 시네라마다》가 뉴욕에서 공개되어 인기를 모았다. 이어서 한층더 간단히 1개의 필름과 카메라와 영사기를 1대씩만을 가지고도 만들 수 있는 시네마스코프가 실용화되어 최초의 작품 《성의(聖衣)》가 1953년 9월에 공개됨으로써 히트했고, 이에 미국영화계는 대형영화시대로 돌입, 새로이 비스타비전 방식 등이 생겨났으며 70mm의 대형필름을 사용하는 70mm 영화가 보급되었다.[2] 1959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벤허》가 70mm 대형영화로 발표되어 크게 히트한 뒤 《그랑프리》, 《의사 지바고》, 《도라 도라 도라》,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 70mm 대형영화가 꼬리를 물고 나왔다.

해외와의 교류처럼 미국의 상업영화로는 보기 드문 표현 수법을 시도하는 감독도 나타났다.

4. 감독계의 변천[편집]

텔레비전의 발달은 다른 면에서도 영화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표적 감독은 와일러, 포드, 히치콕 외에 대전 전부터 활약해 왔던 사람들인 존 휴스턴, 로버트 와이즈, 프레드 진네만, 기타 전시 중에서 전후에 걸쳐서 진출해 온 영화에서 육성된 사람들인 엘리아 카잔, 조슈아 로건, 그리고 새로이 영화에 손을 댄 유명한 무대연출가들의 3개 그룹으로 크게 나뉜다. 텔레비전의 발달과 함께 시드니 루멧, 존 프랭컨하이머 등 텔레비전 연출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 계속해서 참가함으로써 우수작품을 계속 만들어 내게 되었다.

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