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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학교법인
박영학원
博英學院
분류
사립
설립
설립국가
설립일
1954년 11월 8일(+25518일, 69주년)
설립자
박영태
위치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700번길 140
1. 개요2. 역사
2.1. 부산여자대숙의 설립2.2. 여자대학 시절2.3. 현재
3. 역대 이사장4. 소속 학교5.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학교법인 박영학원은 신라대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학교법인이다.

2. 역사[편집]

설립자인 박영택은 20대 초반 1921년 부산진 ~ 동래 간 도로 확장공사와 1922년 부산부 ~ 온천장 간 운송사업에 참여한 부를 토대로 1924년에 부평동 공설시장에서 면포상회를 개업하였는데, 이를 토대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해 부산면포합자회사를 창립하였다. 이 회사를 기반으로 30대 초반에는 현재 초량을 비롯하여 부산진, 연산동 일대에 토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또한 광복 이후인 1946년에는 범일동의 조선방직주식회사 자리에 부산대동연료공장을 차리고, 1950년에는 부산정미제분공장을, 1951년에는 대한산업주식회사와 청과물시장을 설립하는 등 박영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초반까지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영택은 평소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부산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5년제 학교인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강점기 박영택의 아들이 유학하던 일본 강산현의 흥양관중학교를 학부형의 자격으로 시찰하게 되면서 선진적인 고등교육기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근대교육에 대한 관심은 광복 후 박영택이 자리잡은 부산지역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 일시로 들어와 대학운영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경험하게 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삼성의 창업 당시 이병철은 제일제당의 발기인을 모집하면서 공장부지를 제공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고,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창립할 때에 이종희도 회사 대지를 제공할 것을 제의하였지만 박영택은 평생 모은 재산을 교육사업에 투자하기 위해 모두 거절한 바 있다.

한편 박영택은 1951년 8월에 대한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는 경남공업고등학교와 동주상업학교 등에서 교직에 있던 최두고와의 합자회사로 청과 및 일반 농산물의 중개 및 도매업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농산물 유통업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1년 만에 자진 폐업하면서 최두고의 요청으로 학교 운영을 구상하게 되고, 1952년 6월 20일 체육사범대학병설 중고등학교를 설치하게 된다. 여기서 박영택은 교사 부지를 제공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고, 최두고는 학교 운영에 전념하는 형태였는데, 1, 2회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합법적인 절차를 밟는 와중 교명 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두 사람이 결별하게 되었다. 교명 문제로 박영택이 학교 운영에서 제외되었지만 박영택이 제공했던 부지는 1, 2년 동안 존속하기로 하면서 최두고가 설립하는 학교법인 동성학원의 설립이사가 된다. 그리고 박영택은 박영학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인 학교를 운영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2.1. 부산여자대숙의 설립[편집]

한편, 1950년대 당시 부산에는 한국전쟁으로 피란 온 대학들이 천막이나 판자 건물을 세워 대학의 설치기준에도 맞지 않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중 동국대학교는 부산 신창동 대각사 경내에 가교사를 차려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와 함께 동국대학교 야간부 분교로 국화여자대숙이 무허가로 운영되고 있었고 부산지역 주위에는 경남여자대숙이 역시 무허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국화여자대숙은 김도명을 숙장으로 경영되고 있었고, 재학생이 69명(국문과 15명, 영문과 27명, 상과 27명)에 불과했으며 경남여자대숙은 재학생이 49명(약학과 24명, 보육과 6명, 가정과 6명, 국문과 8명)에 불과한 소규모 학교였다.

이들 학교는 박영학원이 부산여자대숙의 인가를 문교부에 신청할 때 함께 인가를 신청했는데, 김법린 당시 문교부 장관은 국화여자대숙과 경남여자대숙이 재단을 구성하기 어려운 상태이므로 이들을 흡수 · 통합하는 조건으로 박영학원과 부산여자대숙의 설립인가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즉, 국화여자대숙의 김도명 숙장과 경남여자대숙의 김순태 교무과장이 부산여자대숙의 설립이사가 되고, 또 기존 학교 건물과 학생들을 부산여자대숙이 흡수 · 통합하는 조건으로 인가 승인토록 합의한 것이다. 이로써 1953년 4월 1일에 재단법인 박영학원과 부산여자대숙의 설립신청서를 문교부장관에게 제출하였고, 1954년 11월 30일부 국화여자대숙과 경남여자대숙의 학생과 서류가 모두 부산여자대숙으로 이관됨으로써 12월 30일에는 실질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1955년 2월 16일 부산여자대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부산여자대숙은 대학에 준하는 각종학교[4] 로서, 1955년 2월 16일 문교부로부터 정식 인가받아 운영을 시작하였다[5]. 당시 부산여자대숙은 2년제로 가정과[주 2], 보육과[주 3], 영문과[주 4], 상(경)과[주 5] 각 50명 정원으로 인가[주 6] 되었다. 다만 부설기관으로 부산여자대숙 부속유치원이 60명 정원으로 인가되었으나, 대숙 시절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박영택이 소유하고 있던 부산시 연산동 1528번지 일대를 박영학원의 재단 사무실과 부산여자대숙의 교정으로 활용하려 하였는데, 이 토지를 한국전쟁으로 군에 징발[주 7] 당해 부산시 신창동1가에 위치한 대각사 경내에 가교사를 설치해 수업을 진행하였다. 가교사는 2층 목조건물로, 580평가량이었으며 현재 남포동 시가지에 위치한 곳으로,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학교 본부가 있었던 동주여자고등학교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이후 1955년 12월 16일에 연산동캠퍼스 부지 15,600평과 군용 건물 6동(2,400평)을 군수기지사령부 포로수용소로부터 환수받으면서 1956년 9월 26일에 부산여자대숙을 모두 연산동으로 이전하였다(부산시 연산동 1976번지 일대). 그러나 학교 이전 과정에서 1956년 2월에 신입생 모집을 하지 않았고, 재단의 재산 중 충일고무공업사의 공장이 1956년 1월 2일 화재로 소실되면서 경영상의 어려움이 발생했다. 이에 교사 이전 등 정상적인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1957년 9월부터 1962년 5월까지 휴교하게 되었다. 휴교중에는 강의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대학부지에 계속해서 교사를 신축하였고 휴교중인 1962년 2월에는 대학본부 건물이 완공되어 1962년 5월 20일에 문교부로부터 개학 지시가 하달되었다.

2.2. 여자대학 시절[편집]

부산여자대숙이 초급대학으로 인가된 지 4년 후인 1967년 5월에 박영학원 이사장은 이사회에서 "현재 이 지역사회를 위하여 초급대학은 4년제 대학으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제의를 결의사항으로 받아들이면서 4년제 대학으로의 승격이 공식 발표되었다. 그 후인 1967년 11월 8일에 이수응 학장이 연산동 학교 부지에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와 초급대학을 병설하는 여자대학을 창설할 계획을 발표하고, 이에 대한 부산여자대학 설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에 1969년 6월 21일에는 부산여자사범대학 설립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4년제 대학으로의 승격에 있어 사범대학으로 설립인가를 신청한 것은 여성지도자의 양성을 위한 사범대학의 설립이 시급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또한 유치원과 초, 중, 고등학교를 아우르는 학교법인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립인가 신청서에는 "만일 사범대학 인가가 부적당할시에는 일반 4년제 대학으로 부산여자대학 설립을 인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며, 당시 문교부에서는 교원 수급정책을 이유로(4년제 대학에서의 수급 외에 임시양성소 등으로 대량 수급) 사범대학으로 인가하지 않고 4년제 일반대학으로 인가하게 되었다.

1970년 3월 1일 개교토록 인가된 부산여자대학은 4년제 일반대학으로 가정학과(30명), 식품영양학과(30명), 미술학과(30명), 음악학과(20명), 체육학과(30명)의 5개 학과 140명 정원이 인가되었다. 이어서 1972년에는 사범계열 학과인 국어교육과가 30명 정원으로 개설되었으며, 1973년에는 사회교육과(역사전공)가 개설되었다. 또 1975년에는 일어교육과와 사회교육과(지리전공)가 개설되었으며 1976년에는 영어교육과가 개설되고 1979년에 경영학과가 개설되는 등 등 불과 8년 사이에 학년당 정원이 410명(총 학생수 1,360명)으로 대학 출범 당시와 비교해 2.5배 증가하였다. 그러나 경영이나 재정면에서 학생수가 3,000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학생 증원과 증과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산업미술과와 산업공예과, 무용학과, 사범계열의 상업교육과와 국사교육과의 신설을 계획하였다. 더불어 학과별 정원을 증원하여 문교부에 증원, 증과 인가를 신청하였으며, 문교부에서 해당 증과, 증원안을 그대로 수렴하여[14] 7개 학과의 신설과 80명 증원이 실현되었다. 개설된 16개 학과 중 사범계열 학과가 7개로 개설 학과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준이었다.

1981년에는 대학원을 설치하기 위한 서류를 1981년 3월에 제출하여 11월에 국문학과와 식품영양학과의 설치가 인가되었으며, 최초로 1982년부터 석사과정 대학원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또한 1985년에는 미술학과, 음악학과, 체육학과의 대학원이 증설되었으며, 학부 과정에도 국어국문학과가 설치되는 등 다양한 학과들이 인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학생수와 대학 규모의 증가로 연산캠퍼스의 시설규모 및 부지 자체의 협소가 문제가 되었다. 여자대숙의 설립기인 1955년 당시에는 황령산 자락의 공터였던 지역이 이제 도시화가 진행되어 더 이상 교사나 시설 확충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서동 산133 일대의 대지를 매입하여 대학 이전을 계획하였다가 주위가 주거지로 묶여서 실패하였는데, 다시 사상구 괘법동 일대 수백 명의 소유자로 되어 있는 토지를 매입하면서 점차 가시화되었다. 따라서 1985년 5월 7일, 이사회에서는 백양캠퍼스 및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1차 시안을 발표하였고, 1988년 8월 30일에는 백양캠퍼스의 신축 기공식을 열었다. 먼저 1990년경 백양캠퍼스의 미술관이 먼저 준공되어 1991년에 미술계열의 640명의 학생, 18명의 교수와 5명의 직원이 백양캠퍼스로 이전하고, 1992년 자연과학대학이 이전하면서 대학 이전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캠퍼스 이전의 와중에 종합대, 단과대 구분을 없애도록 법률이 변경되고, 교육부에서도 명칭을 변경하게 하여 종합대학으로의 교명 변경을 합의하였으며, 법인 측에 정관 개정을 요구하여 1992년 4월 1일부 종합대학 명칭인 부산여자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종합대학으로서 단과대학 체제로 편성하기로 하고, 1993년 9월 6일자로 인문대학(8개 학과, 400여명), 자연과학대학(10개 학과, 400여명), 예술대학(5개 학과, 300명), 사범대학(8개 학과, 270명)의 4개 단과대학을 신설할 수 있도록 인가하면서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2.3. 현재[편집]

남녀공학 전환 당시까지는 사범대학, 예술대학, 자연과학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의 4개 대학으로 구성되었던 체제가 1997년 11월 5일부 경상대학과 공과대학이 추가되어 총 6개 단과대학 체제가 되었다. 이에따라 인사대 소속이었던 경상학부가 경상대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자연과학대에 있던 건축학과와 주거실내디자인학과, 컴퓨터정보공학부가 공과대로 소속을 변경하였다. 2002년에는 IT디자인대학이 신설되었으며, 공과대학에서 IT 관련 학과가, 예술대학에서 패션, 실내디자인 등 응용디자인 학과가 소속을 변경하였고, 유아교육과가 신설되었다. 2006년에는 간호학과와 물리치료학과가 신설되었으며 경상대학은 상경대학으로, 자연과학대학은 의생명과학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5년에는 인문사회과학대학과 의생명과학대학의 일부 학과가 보건복지대학이 신설되면서 소속이 변경되었다.

또한 2002년에 교육부 지방대학 육성사업 재정지원대학에 선정되어 동북아비즈니스센터가 설립되고, 같은 해 교육부 외국인유학생 기숙사 신축, 증축 사업비 지원대학에 선정되면서 외국인 유학생 유치, 해외 대학과의 학술교류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요동대학과 합작대학, 독일 파더본대학 및 중국 청도과학기술대학과의 합작대학을 설립하였으며 영국 웨일즈대학과 학술교류 협정을 맺게 되었다. 특히 2006년부터는 이러한 학술교류가 급증하여 아시아 권역인 중국, 일본,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등과 연결되었으며, 이 외에 영국, 캐나다, 호주, 터키 등과도 학술교류가 시작되어 학생들의 교류 수학이 원활해졌다. 1999년 3월 18일에는 경상관이 준공되어 경상대학이 입주하여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으며, 2001년 12월 7일에는 공학관이 준공되어 공과대학 학생들의 수업 여건이 양호해졌다. 2006년에는 학생회관인 화랑관이 준공되었다. 학생회관의 명칭은 학생들의 인터넷 홈페이지 투표로 선정되었으며, 선정 즉시 명명되었다.

3. 역대 이사장[편집]

  • 제1대 : 박영택
  • 제2대 : 박해곤
  • 제3대 : 박언표

4. 소속 학교[편집]

  • 신라대학교 부속어린이집
  • 신라중학교

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