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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4대 국왕
세종 | 世宗
세종 표준영정 (1999년, 김기창 作)
신상정보
출생
1397년 (태조 6년) 5월 15일
한성부 준수방 장의동 본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사망
1450년 3월 30일(52세)
조선 한성부 영응대군 사저
사인
병세 악화
가족
아버지 : 태종
어머니 : 원경왕후 민씨
배우자 : 소헌왕후 심씨
자녀 : 18남 4녀
제4대 조선 국왕
재위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
즉위식
경복궁 근정전
전짐
태종
후임
문종
1. 개요2. 생애
2.1. 왕자 시절2.2. 양녕대군과의 갈등2.3. 세자 책봉과 즉위
3. 치세
3.1. 대외 정책
3.1.1. 공녀와 금은 조공 중지3.1.2. 대마도 정벌3.1.3. 4군 6진
4. 문서 출처

1. 개요[편집]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아들이다.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종은 과학 기술, 예술, 문화, 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펴내었지만 글을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불리며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다가 20세기 주시경이 한글로 발전시켜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징옥, 최윤덕, 김종서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정치면에서는 황희와 맹사성, 윤회, 김종서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 체제는 일종의 내각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등의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2. 생애[편집]

2.1. 왕자 시절[편집]

397년(태조 6년) 5월 15일[1](음력 4월 10일), 한성 준수방(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당시 정안군이던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민씨(원경왕후)의 여섯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와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아명은 막동(莫同)이고, 이름은 도(祹)이다.

1408년(태종 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으며 같은해에 소헌왕후가 되는 심온의 딸 심씨와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에게 수학하였다. 이후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1412년(태종 12년) 효령대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충녕대군은 형제간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특히 친동생인 성녕대군에게는 형제 중 직접 병간호를 할만큼 우애가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대군은 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2.2. 양녕대군과의 갈등[편집]

실록에는 충녕대군과 양녕대군의 갈등을 암시하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세자인 양녕대군이 옷을 차려 입고 몸단장을 한 뒤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아랫사람에게 묻자, 충녕대군은 "먼저 마음을 바로 잡은 뒤에 용모를 닦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였다.

상왕 정종이 베푼 연회가 끝난 후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의 첩인 칠점생을 데리고 가려 하자 충녕대군은 이런 세자의 행동을 지적하였고, 세자는 결국 칠점생을 데려가지 못하였다. 또한 세자가 조모인 신의왕후의 기일에 흥덕사에서 향을 피운 후 아랫사람들과 어울려 바둑을 두며 놀자, 충녕대군은 이런 세자의 행동을 지적하였고 세자는 불쾌해 하였다.

양녕대군은 기생 어리(於里)를 사랑하여 여러차례 궁에 몰래 들였고, 이로 인해 태종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이 태종에게 어리에 대한 얘기를 했을 것이라며 원망하였다.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혼나면서 공손하지 못한 말투와 행동을 보이며 말대꾸를 했는데 이때마다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을 타일렀다.

2.3. 세자 책봉과 즉위[편집]

1418년(태종 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의 여러 가지 비행에 고심하던 중 신료들의 폐세자 주청에 대한 상소가 연이어 올라오자,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세자를 폐위시키고 광주(廣州)로 추방하였다. 이어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였다.[9][2]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였다. 세자는 양위를 거절하였으나 오랜 기간 반복된 태종의 양위를 받아들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10]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나 세종의 재위 초기에는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권과 인사권을 직접 행사하였고,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비롯한 외척세력을 숙청하였다.

이후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3. 치세[편집]

3.1. 대외 정책[편집]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과 포(布)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과 이천에게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군(四郡)을, 김종서와 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六鎭)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3.1.1. 공녀와 금은 조공 중지[편집]

조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사대정책을 취하였으며 매년 조공하고 조공품 보다 후한 물품들을 받았으나, 공녀 등의 인적자원과 광물의 조공은 국가 재정의 큰 부담이 되었다.

태종과 세종대에 명나라에 처녀와 금은을 조공하였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이라 불렀는데 태종대에는 진헌색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세종 시대의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처진 공녀는 74명으로 태종 때의 40명 보다 증가하였다. 태종 때에 이미 명나라에 청하여 조공의 중지를 요청하였으나 개선되지 않았다. 명나라로 차출되는 공녀들은 이송 전 입궁하여 왕비의 위로를 받았으며, 남겨진 가족은 후하게 대접받았다. 태종 · 세종 대에 조선인 공녀 중 일부는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황제의 사망 후 순장되었다.

세종은 이복동생인 함녕군과 인순부윤 원민생등을 명에 보내어 작고 척박한 땅에서 금은이 나지 않음을 이유로 금은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430년(세종 12년)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되었다.

3.1.2. 대마도 정벌[편집]

고려 말부터 지속된 왜구의 노략질 문제는 처음에는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적 통제에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세종 1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6월 19일, 이종무를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열흘 후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13] 이 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대마도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1426년(세종 8년) 내이포, 부산포, 염포 등의 3포를 개항하고, 1443년(세종 25년)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으로 무역을 허락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14세기부터 지속된 왜구의 침입은 삼포왜란이 발생하기까지 약 100여년 동안은 소강상태를 보였다.

3.1.3. 4군 6진[편집]

태종 이래 불안정한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을 무찌르기 위해 정벌 계획을 수립하였고 세종은 마침내 요동 정벌 이후 수그러들었던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1432년(세종 14년), 두만강 하류의 석막을 공격하여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하였다.

1433년(세종 15년), 최윤덕으로 하여금 압록강과 개마고원 일대의 여진족을 소탕할 것을 명하였다. 최윤덕이 이끄는 부대는 파저강 전투(婆猪江)에서 여진족을 무찔렀고 세종은 이 일대에 여연(閭延) · 자성(慈城) · 무창(茂昌) · 우예(虞芮) 등 4개의 군(四郡)을 설치하였다.

김종서가 이끄는 부대는 함길도 지역을 내습하는 여진족을 소탕하여 두만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1437년(세종 19년) 이 일대에 온성(穩城) · 경원(慶源) · 경흥(慶興) · 부령(富寧) · 회령(會寧) · 종성(鍾城) 등의 여섯개의 진(六鎭)을 설치하여 북방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후 이 지역의 관리와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삼남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키고 토관제도 등을 실시하였다.

4. 문서 출처[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내용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한 내용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