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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Σωκράτης
파일:소크라테스 사진.jpg
출생
기원전 470년
사망
기원전 399년 (향년 71세)
국적
가족
아버지 소프로니코스, 어머니 파이나레테
배우자 크산티페
직업
철학자, 군인
학파
고대 그리스 철학
종교
그리스 다신교
1. 개요2. 상세3. 생애4. 소크라테스 문제5. 사상6.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2. 상세[편집]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에서 첫 번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죽음은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에 의해 '신성 모독죄'와 '젊은 세대들을 타락시킨 죄'로 기소당하고 기원전 399년에 71세의 나이로 사약을 마시고 사형을 당했다. 실존철학의 거장인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위대한 사상가들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다.

3. 생애[편집]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석공소를 운영한 석공이자 조각가였던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산파였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는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장 초기에는 직업을 세습하던 당시 문화에 따라 아버지 밑에서 석공 기술을 배우며 철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고, 청년에서 40세까지 세 번에 걸친 전쟁에 중장보병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다.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원로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졌다며 자신 대신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참고로, 흔히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과 함께 담담히 사약을 받아들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가 후에 변질된 것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하나인, 에우렐이 말년에 작성한 파타모닐리아에 묘사한 내용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사약을 몇 번이고 뒤엎어서 결국 마지막에 간수장이 간수들을 시켜 억지로 사약을 먹여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4. 소크라테스 문제[편집]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5. 사상[편집]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하던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장인이 아레테(ἀρετή, 훌륭함, 탁월함이라는 뜻)를 발휘하려면 자신의 기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듯, 인간으로서의 아레테, 즉 덕을 발휘하려면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다이몬은 고대 신비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찾았던 의식의 바탕이 되는 일종의 심연의 의식이다. 불가의 참나, 도교의 원신 등과 일맥상통 한다. 다이몬이 영어로 데몬이 되었고, 이것은 악마를 뜻하게 됐다. 이는 모든 이교도 학자, 신비주의자 일체를 이단으로 여긴 후대의 기독교도들에 의해서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