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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일반적으로 1897년에 수립된 대한제국의 역대 황제와 황후의 무덤도 포함된다. 조선왕릉은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의 왕릉 제도의 영향을 받았는데, 고구려의 호석도는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왕릉에 그대로 전해졌고, 조선왕릉의 전체적인 형태는 공민왕의 무덤인 현정릉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조선왕릉은 한국 역대 왕조의 왕릉들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왕과 왕비들의 능이 모두 완전한 보존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의 왕자와 공주, 후궁들의 무덤까지 함께 보존되어 있으며, 국조오례의, 경국대전, 의궤와 같은 조선왕릉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과 각 왕릉들의 조성과정에 들었던 인력, 그리고 도구에 대한 상세한 기록까지 보존되어 있어 조선 시대의 장례 문화와 조선왕릉의 규정 및 역사, 조선왕릉의 제례 과정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왕릉에서는 때마다 제례 의식을 치르고 있어 조선 시대의 무형적인 문화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왕릉은 조선 왕조 역대 27명의 임금과 왕비, 추존왕의 무덤들이 있으며 이 중 반정으로 축출된 임금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능 지위가 아닌 묘 지위에 있어서 왕릉으로 불리지 않고 묘로 분류되었다. 또한 이들 두 임금은 반정으로 쫓겨난 전적이 있어서 서울 종묘에도 모셔지지 않았으며 조선 왕조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선왕릉은 특히 서울 일부와 경기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전까지는 경국대전에 따라 한양도성 외에도 가까운 경기도 지역에 왕릉을 조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왕릉들은 경기도에 분포되어 있다. 이 중 선정릉, 정릉, 헌인릉 등 일부 왕릉은 원래 경기도 지역에 있다가 1945년 해방 이후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 권역에 편입된 왕릉들이었다.
6대 임금인 단종이 안장된 장릉은 원래 노산군묘로 분류되어서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에 안장되었으나 19대 임금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키고 노산군묘를 장릉으로 승격하면서 비수도권 지역 중 유일한 조선왕릉이 되었다. 2대 임금인 정종은 원래 개풍군에 왕릉이 있기 때문에 추존왕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과 함께 북한 지역에 있는 왕릉이 되었다.
조선왕릉은 조선 왕조 역대 27명의 임금과 왕비, 추존왕의 무덤들이 있으며 이 중 반정으로 축출된 임금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능 지위가 아닌 묘 지위에 있어서 왕릉으로 불리지 않고 묘로 분류되었다. 또한 이들 두 임금은 반정으로 쫓겨난 전적이 있어서 서울 종묘에도 모셔지지 않았으며 조선 왕조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선왕릉은 특히 서울 일부와 경기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전까지는 경국대전에 따라 한양도성 외에도 가까운 경기도 지역에 왕릉을 조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왕릉들은 경기도에 분포되어 있다. 이 중 선정릉, 정릉, 헌인릉 등 일부 왕릉은 원래 경기도 지역에 있다가 1945년 해방 이후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 권역에 편입된 왕릉들이었다.
6대 임금인 단종이 안장된 장릉은 원래 노산군묘로 분류되어서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에 안장되었으나 19대 임금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키고 노산군묘를 장릉으로 승격하면서 비수도권 지역 중 유일한 조선왕릉이 되었다. 2대 임금인 정종은 원래 개풍군에 왕릉이 있기 때문에 추존왕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과 함께 북한 지역에 있는 왕릉이 되었다.
3. 장례[편집]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하는 국가로 왕이 직접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 제정일치 사회였다. 그만큼 왕의 권한이 강하였고, 왕의 영원한 안식을 위한 왕릉을 조성하는 일은 조선의 중요한 국가사업 중 하나였다.
3.1. 승하 직후[편집]
왕이나 왕비가 죽은 것을 확인하는 초종 뒤에 내시가 왕이 입던 옷을 가지고, 승하한 곳의 지붕 위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상위복’ , 왕비의 경우는 '중궁복' 이라 세 번 외치는 복 의식을 한다. '상위복'은 '상감은 돌아오소서'의 뜻을 담고 있다. 복을 하고난 직후에 내시가 왕이 입고 있던 옷을 재빨리 지붕 아래로 던지면,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시가 얼른 옷을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간 다음 왕의 몸 위에 그 옷을 덮고 5일간 살아나기를 기다렸다. 5일이 지나면 즉시 입관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 뒤 왕세자 (선왕의 뒤를 잇는 사람)를 제외하고 대군과 옹주들은 모두 소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풀어 헤치며, 3일 정도 금식을 한다. 그 뒤 계령을 통해 장례와 왕릉조성에 관한 일을 분담하는데, 이는 육조에서 담당한다. 병조에서는 여러 곳을 호위하고, 예조는 상례에 관련된 일을 의정부에 보고하고, 이조에서는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이라는 임시기구(도감)를 설치하여 각자 맡은 일을 하게 하였다.
3.2. 도감(임시 기구) 설치[편집]
임시기구의 설치는 노국공주의 국장 과정에서 영향을 받았다. 노국공주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4가지의 도감과 13개의 색이 설치되었는데, 이러한 임시기구들은 각각의 이름들이 조금씩 바뀌면서 조선 시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건원릉을 조성할 당시에는 빈전(殯殿)·국장(國葬)·조묘(造墓)·재(齋)등 4가지의 도감과 상복(喪服), 옥책(玉冊), 복완(服玩), 관곽(棺槨), 제기(祭器), 유거(柳車), 법위의(法威儀), 상유소조(喪帷小造), 산소(山所), 영반(靈飯), 의장(儀仗), 묘소포진(墓所鋪陳), 반혼(返魂) 등 국장에 필요한 제구나 음식, 의식절차와 왕릉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일들을 담당하는 13개의 색이 설치되었다. 그러다 세종 때 와서는 원경왕후의 장례를 지낼 때 국장·빈전·산릉을 제외한 나머지 도감은 혁파하게 하였고, 이 후 국조오례의를 통해 3도감의 제도는 굳어지게 되었다.
왕이 즉위하는 해에 재궁(梓宮:시신을 넣을 관)을 만들고, 1년에 한 번씩 옻칠을 한다. 그 뒤 왕이 죽으면 붉은 비단을 사방에 붙이고, 네 모퉁이에 녹색 비단을 붙인다. 재궁 바닥에는 쌀을 태운 재를 깔고, 그 위에 칠성판(북두칠성의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나무판)을 놓는다. 그 위에 붉은 비단 요를 깔고 시신을 모신다. 그 뒤 재궁을 찬궁(欑宮)에 모시게 되는데, 안에는 사방신이 각 방위에 따라 위치하고 있다. 머리가 남쪽으로 가도록 모신 후 도끼 모양이 그려진 붉은 비단으로 덮는다. 재궁을 찬궁에 모신 뒤 병풍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린다.
왕릉의 조성은 산릉도감에서 담당하였으며, 많은 시간과 인원을 필요로 하였는데,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할 때는 대략 3~5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대략 6000명~9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때로는 왕이 생전에 자신이 직접 묻힐 곳을 찾아 미리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수릉(壽陵)이라고 한다. 거대한 무덤을 조성하는 중국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나, 한국에서는 왕릉을 미리 조성하는 경우는 공민왕 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조선왕릉에서는 종종 수릉을 조성하였는데 이러한 대표적인 왕릉은 세종의 구영릉과 영조가 묻히려 했던 정성왕후의 홍릉 등이 있다.
건원릉을 조성할 당시에는 빈전(殯殿)·국장(國葬)·조묘(造墓)·재(齋)등 4가지의 도감과 상복(喪服), 옥책(玉冊), 복완(服玩), 관곽(棺槨), 제기(祭器), 유거(柳車), 법위의(法威儀), 상유소조(喪帷小造), 산소(山所), 영반(靈飯), 의장(儀仗), 묘소포진(墓所鋪陳), 반혼(返魂) 등 국장에 필요한 제구나 음식, 의식절차와 왕릉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일들을 담당하는 13개의 색이 설치되었다. 그러다 세종 때 와서는 원경왕후의 장례를 지낼 때 국장·빈전·산릉을 제외한 나머지 도감은 혁파하게 하였고, 이 후 국조오례의를 통해 3도감의 제도는 굳어지게 되었다.
왕이 즉위하는 해에 재궁(梓宮:시신을 넣을 관)을 만들고, 1년에 한 번씩 옻칠을 한다. 그 뒤 왕이 죽으면 붉은 비단을 사방에 붙이고, 네 모퉁이에 녹색 비단을 붙인다. 재궁 바닥에는 쌀을 태운 재를 깔고, 그 위에 칠성판(북두칠성의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나무판)을 놓는다. 그 위에 붉은 비단 요를 깔고 시신을 모신다. 그 뒤 재궁을 찬궁(欑宮)에 모시게 되는데, 안에는 사방신이 각 방위에 따라 위치하고 있다. 머리가 남쪽으로 가도록 모신 후 도끼 모양이 그려진 붉은 비단으로 덮는다. 재궁을 찬궁에 모신 뒤 병풍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린다.
왕릉의 조성은 산릉도감에서 담당하였으며, 많은 시간과 인원을 필요로 하였는데,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할 때는 대략 3~5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대략 6000명~9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때로는 왕이 생전에 자신이 직접 묻힐 곳을 찾아 미리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수릉(壽陵)이라고 한다. 거대한 무덤을 조성하는 중국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나, 한국에서는 왕릉을 미리 조성하는 경우는 공민왕 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조선왕릉에서는 종종 수릉을 조성하였는데 이러한 대표적인 왕릉은 세종의 구영릉과 영조가 묻히려 했던 정성왕후의 홍릉 등이 있다.
4. 왕릉 조성[편집]
왕릉 조성 작업은 석물을 만들어서 봉분 주변에 배치하고, 정자각과 비각 등을 조성하는 면에서는 대부분 다 비슷하지만, 능실을 조성하는데 있어서는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석실을 이용한 방식과 국조상례보편에 기록되어 있는 회격을 이용한 방식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왕릉 조성이 끝난 뒤 각 도감마다 자신들이 했던 일들을 의궤에 기록하였다. 각 도감마다 기록한 의궤에서는 국장 과정과 기간, 택지에 대한 주관자와 의도, 산릉 조성에 필요한 경비와 자재, 왕릉 조성 과정 등을 글과 그림으로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다.
이러한 기록 덕분에 조선 왕실의 장례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참고할 수 있고, 왕릉이 부득이하게 훼손되어도 그대로 복구할 수 있다.
또한, 각 조선왕릉에서는 능에 대한 관리나 주요 사항을 기록한 ‘능지’를 기록하였다. 이외에 왕릉조성에 대한 규정과 과정이 기록된 국조오례의, 경국대전, 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 등이 있어 조선왕릉의 능제와 석물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 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왕릉 조성이 끝난 뒤 각 도감마다 자신들이 했던 일들을 의궤에 기록하였다. 각 도감마다 기록한 의궤에서는 국장 과정과 기간, 택지에 대한 주관자와 의도, 산릉 조성에 필요한 경비와 자재, 왕릉 조성 과정 등을 글과 그림으로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다.
이러한 기록 덕분에 조선 왕실의 장례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참고할 수 있고, 왕릉이 부득이하게 훼손되어도 그대로 복구할 수 있다.
또한, 각 조선왕릉에서는 능에 대한 관리나 주요 사항을 기록한 ‘능지’를 기록하였다. 이외에 왕릉조성에 대한 규정과 과정이 기록된 국조오례의, 경국대전, 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 등이 있어 조선왕릉의 능제와 석물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 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5. 제례 의식[편집]
조선 왕실에서 지내는 역대 왕과 왕비들에 대한 제사 의식은 크게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치르는 종묘 제례와 직접 능으로 행차하여, 치르는 산릉 제례가 있다. 이를 기신친향례(忌辰親享禮)라고도 하는데, 기신친향례는 역대 왕과 왕후에 대한 의식을 뜻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오례의 중 길례에 해당된다. 국조오례의에서는 산릉 제례로 사시(1월, 4월, 7월, 10월의 초순), 납일(연말), 속절(풍속에 따라 지키는 절기), 삭망(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치르는 정기 제례와 임금이 직접 치르는 친제로 나누었고, 이를 소상히 규정해 놓았다.
제례 절차를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왕이 소여를 타고 와서 홍살문 앞에 배위에 서서 능을 한 번 바라본다. 그리고 어도를 따라 걸어 미리 설치해둔 소차로 들어가서 손을 씻고 동입서출의 예에 따라 정자각 동계에 오른다. 그리고 신을 맞이하기 위해 네 번 절을 한 뒤 제주 따르는 모습을 살펴본다. 세 번 향을 피우고, 왕이 먼저 첫 잔을 올린 다음 축문을 읽는다. 그 다음 영의정이 두 번째 잔을 올린다. 축문을 읽음으로써 조상의 위업을 다시 한 번 기리고, 향을 피우고 술잔을 바침으로써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다. 그 뒤 절을 네 번 하면서 신을 보내고 축문을 태움으로써 제례를 끝낸다. 산릉 제례를 통해 왕의 존재가 단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고 먼 조상의 임금으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것을 다시 인식한다고 하였다.
배릉 의식이라고 하여 조선 시대의 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건원릉과 부왕과 모후의 산릉에 반드시 참배해야 했다.
제례 절차를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왕이 소여를 타고 와서 홍살문 앞에 배위에 서서 능을 한 번 바라본다. 그리고 어도를 따라 걸어 미리 설치해둔 소차로 들어가서 손을 씻고 동입서출의 예에 따라 정자각 동계에 오른다. 그리고 신을 맞이하기 위해 네 번 절을 한 뒤 제주 따르는 모습을 살펴본다. 세 번 향을 피우고, 왕이 먼저 첫 잔을 올린 다음 축문을 읽는다. 그 다음 영의정이 두 번째 잔을 올린다. 축문을 읽음으로써 조상의 위업을 다시 한 번 기리고, 향을 피우고 술잔을 바침으로써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다. 그 뒤 절을 네 번 하면서 신을 보내고 축문을 태움으로써 제례를 끝낸다. 산릉 제례를 통해 왕의 존재가 단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고 먼 조상의 임금으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것을 다시 인식한다고 하였다.
배릉 의식이라고 하여 조선 시대의 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건원릉과 부왕과 모후의 산릉에 반드시 참배해야 했다.
6. 세계문화유산 등재[편집]
처음에는 동구릉이 있는 구리시에서 왕릉 관광지 개발을 위해 2003년에 동구릉의 등재를 추진하다가 2004년에 문화재청이 조선왕릉 40기에 대한 일괄 등재를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2008년 1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그 해 9월에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현지 조사가 이뤄졌고, 2009년 1월에 ICOMOS는 일부 조선왕릉 주변지대의 분류와 주변 시설에 대한 철거에 대한 문제 해결을 문화재청과 한국정부에 요청하였고, 이에 대한 답변을 확인하고서 그 해 5월에 ‘등재 권고’가 적힌 평가보고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왕릉 40기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다.
조선왕릉은 유네스코에서 정한 10가지의 가치 기준 중에서 ‘600년을 이어온 왕실제례’와 ‘조선왕릉의 조형 예술적 가치’, ‘풍수이론에 대한 조선시대의 고유한 해석’ 등 3가지를 충족했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았다. 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역에 있는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그의 왕비 정안왕후의 능), 태조의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양친의 능, 그리고 대한민국의 영역에 있지만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이후, 문화재청에서는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이 된 것을 기념하여, 2010년 6월 27일부터 7월 12일까지 무료개방을 하였다.
조선왕릉은 유네스코에서 정한 10가지의 가치 기준 중에서 ‘600년을 이어온 왕실제례’와 ‘조선왕릉의 조형 예술적 가치’, ‘풍수이론에 대한 조선시대의 고유한 해석’ 등 3가지를 충족했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았다. 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역에 있는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그의 왕비 정안왕후의 능), 태조의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양친의 능, 그리고 대한민국의 영역에 있지만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이후, 문화재청에서는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이 된 것을 기념하여, 2010년 6월 27일부터 7월 12일까지 무료개방을 하였다.
7. 북한의 조선왕릉[편집]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총 40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 있는 제릉과 후릉은 제외되었다. 제릉과 후릉은 개풍군과 개성직할시에 위치한 조선왕릉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띄고 있다.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신의왕후는 남편이 왕이 되기 전에 개성에서 사망하였기에 개성 근처에 묻혔던 것이고, 정종은 정안군에게 왕위를 넘기고 나서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었기에 개성에 묻히게 되었다. 제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재 분류인 보존급(대한민국의 보물급에 해당) 556호로 지정되었고, 제릉비는 보존급 1624호로 지정되었으며, 후릉은 보존급 제551호로 지정되었다. 이들의 무덤은 조선 초기의 양식으로 제릉에는 건원릉과 유사한 6각형의 장명등이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조선왕릉을 조사할 당시 북측의 실측자료를 받아 조사하였다.
또한, 제릉과 후릉 이외에도 태조의 선조들의 왕릉들은 대부분 이들이 살았던 함길도(오늘날 함경도)에 있다. 태조의 4대조의 무덤들은 조선이 건국되고 난 뒤에 왕릉으로 추봉되었다. 1392년에 익조의 능호와 함께 4대조의 능호를 일괄하여 정했는데, 함경도의 조선왕릉은 같은 능침 공간에 조성되었어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과 같이 제각각 다른 능호를 사용하였다. 이 왕릉들은 모두 함경도의 함흥과 안변, 문주 등지에 있던 까닭에 통틀어서 ‘함길도 8릉’으로 불렀다.[75]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의 무덤이 태조를 거쳐 세종 대에까지 이장되어 왕릉의 형식으로 보수되었다고 하였다. 현재 함길도 8릉에 대한 현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사진도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찍은 사진 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북한지역정보넷에서는 함길도 8릉 중 정숙왕후의 왕릉인 숙릉만이 등록되어 있을 뿐이고, 이마저도 북한의 문화재로는 지정되지 않은 상태다.
또한, 제릉과 후릉 이외에도 태조의 선조들의 왕릉들은 대부분 이들이 살았던 함길도(오늘날 함경도)에 있다. 태조의 4대조의 무덤들은 조선이 건국되고 난 뒤에 왕릉으로 추봉되었다. 1392년에 익조의 능호와 함께 4대조의 능호를 일괄하여 정했는데, 함경도의 조선왕릉은 같은 능침 공간에 조성되었어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과 같이 제각각 다른 능호를 사용하였다. 이 왕릉들은 모두 함경도의 함흥과 안변, 문주 등지에 있던 까닭에 통틀어서 ‘함길도 8릉’으로 불렀다.[75]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의 무덤이 태조를 거쳐 세종 대에까지 이장되어 왕릉의 형식으로 보수되었다고 하였다. 현재 함길도 8릉에 대한 현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사진도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찍은 사진 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북한지역정보넷에서는 함길도 8릉 중 정숙왕후의 왕릉인 숙릉만이 등록되어 있을 뿐이고, 이마저도 북한의 문화재로는 지정되지 않은 상태다.
8.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