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문서의 이전 버전(에 수정)을 보고 있습니다. 최신 버전으로 이동
1. 개요2. 상세3. 장례
3.1. 승하 직후3.2. 도감(임시 기구) 설치
4. 왕릉 조성5.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조선왕릉(朝鮮王陵)은 조선의 역대 과 왕비, 추존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2. 상세[편집]

일반적으로 1897년에 수립된 대한제국의 역대 황제와 황후의 무덤도 포함된다. 조선왕릉은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의 왕릉 제도의 영향을 받았는데, 고구려의 호석도는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왕릉에 그대로 전해졌고, 조선왕릉의 전체적인 형태는 공민왕의 무덤인 현정릉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조선왕릉은 한국 역대 왕조의 왕릉들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왕과 왕비들의 능이 모두 완전한 보존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의 왕자와 공주, 후궁들의 무덤까지 함께 보존되어 있으며, 국조오례의, 경국대전, 의궤와 같은 조선왕릉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과 각 왕릉들의 조성과정에 들었던 인력, 그리고 도구에 대한 상세한 기록까지 보존되어 있어 조선 시대의 장례 문화와 조선왕릉의 규정 및 역사, 조선왕릉의 제례 과정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왕릉에서는 때마다 제례 의식을 치르고 있어 조선 시대의 무형적인 문화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왕릉은 조선 왕조 역대 27명의 임금과 왕비, 추존왕의 무덤들이 있으며 이 중 반정으로 축출된 임금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능 지위가 아닌 묘 지위에 있어서 왕릉으로 불리지 않고 묘로 분류되었다. 또한 이들 두 임금은 반정으로 쫓겨난 전적이 있어서 서울 종묘에도 모셔지지 않았으며 조선 왕조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선왕릉은 특히 서울 일부와 경기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전까지는 경국대전에 따라 한양도성 외에도 가까운 경기도 지역에 왕릉을 조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왕릉들은 경기도에 분포되어 있다. 이 중 선정릉, 정릉, 헌인릉 등 일부 왕릉은 원래 경기도 지역에 있다가 1945년 해방 이후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 권역에 편입된 왕릉들이었다.

6대 임금인 단종이 안장된 장릉은 원래 노산군묘로 분류되어서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에 안장되었으나 19대 임금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키고 노산군묘를 장릉으로 승격하면서 비수도권 지역 중 유일한 조선왕릉이 되었다. 2대 임금인 정종은 원래 개풍군에 왕릉이 있기 때문에 추존왕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과 함께 북한 지역에 있는 왕릉이 되었다.

3. 장례[편집]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하는 국가로 왕이 직접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 제정일치 사회였다. 그만큼 왕의 권한이 강하였고, 왕의 영원한 안식을 위한 왕릉을 조성하는 일은 조선의 중요한 국가사업 중 하나였다.

3.1. 승하 직후[편집]

왕이나 왕비가 죽은 것을 확인하는 초종 뒤에 내시가 왕이 입던 옷을 가지고, 승하한 곳의 지붕 위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상위복’ , 왕비의 경우는 '중궁복' 이라 세 번 외치는 복 의식을 한다. '상위복'은 '상감은 돌아오소서'의 뜻을 담고 있다. 복을 하고난 직후에 내시가 왕이 입고 있던 옷을 재빨리 지붕 아래로 던지면,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시가 얼른 옷을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간 다음 왕의 몸 위에 그 옷을 덮고 5일간 살아나기를 기다렸다. 5일이 지나면 즉시 입관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 뒤 왕세자 (선왕의 뒤를 잇는 사람)를 제외하고 대군과 옹주들은 모두 소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풀어 헤치며, 3일 정도 금식을 한다. 그 뒤 계령을 통해 장례와 왕릉조성에 관한 일을 분담하는데, 이는 육조에서 담당한다. 병조에서는 여러 곳을 호위하고, 예조는 상례에 관련된 일을 의정부에 보고하고, 이조에서는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이라는 임시기구(도감)를 설치하여 각자 맡은 일을 하게 하였다.

3.2. 도감(임시 기구) 설치[편집]

임시기구의 설치는 노국공주의 국장 과정에서 영향을 받았다. 노국공주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4가지의 도감과 13개의 색이 설치되었는데, 이러한 임시기구들은 각각의 이름들이 조금씩 바뀌면서 조선 시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건원릉을 조성할 당시에는 빈전(殯殿)·국장(國葬)·조묘(造墓)·재(齋)등 4가지의 도감과 상복(喪服), 옥책(玉冊), 복완(服玩), 관곽(棺槨), 제기(祭器), 유거(柳車), 법위의(法威儀), 상유소조(喪帷小造), 산소(山所), 영반(靈飯), 의장(儀仗), 묘소포진(墓所鋪陳), 반혼(返魂) 등 국장에 필요한 제구나 음식, 의식절차와 왕릉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일들을 담당하는 13개의 색이 설치되었다. 그러다 세종 때 와서는 원경왕후의 장례를 지낼 때 국장·빈전·산릉을 제외한 나머지 도감은 혁파하게 하였고, 이 후 국조오례의를 통해 3도감의 제도는 굳어지게 되었다.

왕이 즉위하는 해에 재궁(梓宮:시신을 넣을 관)을 만들고, 1년에 한 번씩 옻칠을 한다. 그 뒤 왕이 죽으면 붉은 비단을 사방에 붙이고, 네 모퉁이에 녹색 비단을 붙인다. 재궁 바닥에는 쌀을 태운 재를 깔고, 그 위에 칠성판(북두칠성의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나무판)을 놓는다. 그 위에 붉은 비단 요를 깔고 시신을 모신다. 그 뒤 재궁을 찬궁(欑宮)에 모시게 되는데, 안에는 사방신이 각 방위에 따라 위치하고 있다. 머리가 남쪽으로 가도록 모신 후 도끼 모양이 그려진 붉은 비단으로 덮는다. 재궁을 찬궁에 모신 뒤 병풍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린다.
왕릉의 조성은 산릉도감에서 담당하였으며, 많은 시간과 인원을 필요로 하였는데,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할 때는 대략 3~5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대략 6000명~9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18]

때로는 왕이 생전에 자신이 직접 묻힐 곳을 찾아 미리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수릉(壽陵)이라고 한다. 거대한 무덤을 조성하는 중국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나, 한국에서는 왕릉을 미리 조성하는 경우는 공민왕 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조선왕릉에서는 종종 수릉을 조성하였는데 이러한 대표적인 왕릉은 세종의 구영릉과 영조가 묻히려 했던 정성왕후의 홍릉 등이 있다.

4. 왕릉 조성[편집]

왕릉 조성 작업은 석물을 만들어서 봉분 주변에 배치하고, 정자각과 비각 등을 조성하는 면에서는 대부분 다 비슷하지만, 능실을 조성하는데 있어서는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석실을 이용한 방식과 국조상례보편에 기록되어 있는 회격을 이용한 방식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