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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정치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로 운영되었다.
2. 상세[편집]
조선 국왕은 이론적으로 전제 군주였으며 왕권과 신료의 권한이 긴장과 타협 속에서 조정되어 국정에 반영되었다. 조선의 정치 체계와 구조는 경국대전으로 집대성되어 관료 체제가 규정되었고 다양한 층위의 논쟁과 갈등 속에 이를 실제적으로 적용하였다. 조선 전기의 주요 갈등은 국왕과 신료들 사이의 권력 형성을 두고 일어났고 중기 이후 사림파의 등장은 붕당 정치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며 후기의 호락논쟁과 같이 성리학의 이해에 대한 학문적 차이에서부터 붕당의 인맥과 실제 정치적 쟁점이 뒤섞인 독특한 정치 지형을 만들어내었다.
3. 왕권과 신권[편집]
조선은 이론적으로 국왕이 절대적 주권을 지녔다는 점에서 전제군주제의 면모를 보이며 신료의 영향력 또한 크게 작용하는 관료제 사회였다. 양반을 기반으로 한 사대부 관료제는 국왕과 신료들의 통치 기구를 통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체제는 경국대전에 의해 규정되었다. 국왕이 절대적인 전제 군주로 존중되었으며 신료를 장악하지 못하면 반정이 일어나거나 각종 역모와 반란이 발행하였기 때문에 국왕은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료와 타협하여야 하였다. 조선은 건국부터 신진사대부에 의해 주도되어 왕권에 대한 견제와 재상권의 주도가 두드러진 가운데 이루어졌다.조선의 국왕은 여러 차례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고 신료들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도 하였다. 왕자의 난은 정종을 앞세운 정도전의 재상권 우선 사상과 왕의 직접 통치를 이루고자 한 태종의 충돌이었으며 이후 세조의 찬위 역시 비슷한 충돌의 성격이 있다. 조선은 전기와 중기, 후기에 따라 각각의 정치 쟁점과 지형이 변화를 겪었으나 왕권과 신권의 긴장과 타협은 지속적인 정치의 주요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4. 관료제[편집]
조선의 정치는 관료에 의해 운영되었고 이러한 관료의 선발은 주로 과거 제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과거는 문과, 무과, 그리고 각종 기술직을 뽑는 잡과가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승려 선발 시험인 승과는 조선 초까지 유지되었으나 숭유억불정책으로 폐지되었다.
관료의 선발에는 과거 제도 이외에도 유력한 인물이 추천하는 천거, 공신이나 왕족의 자손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음서 등의 방법이 있었지만 과거를 통한 선발이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조선의 문인들은 음서 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보였으나 국왕과 고위 관료 모두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
등용된 관리들은 직위에 따라 종9품에서 정1품까지의 18단계에 이르는 품계가 주어졌다.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는 작위가 수여되는 봉작이 있어 남성 왕족의 경우 군, 대군 등의 작위가 주어졌고 여성 왕족은 공주, 옹주 등의 작위가 주어졌다. 왕비의 아버지에게는 부원군의 작위가 주어졌다. 공신에게도 군의 작위가 주어졌으나 세습되지는 않아 고려 시대의 귀족 신분과는 성격이 달랐다.
한편, 조선의 관료제 제일 하부에는 아전을 비롯한 여러 하급 관료들이 있었다. 이들 상당수는 급료 없이 근무하였고 과거 시험의 응시가 제한되어 중인 계급을 형성하였다.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제의 실시를 위해 지방 향리의 경제적 지위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국가의 급료가 없는 향리는 자신 소유의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과 함께 읍, 리 단위로 부과되는 세금에 자신의 몫인 읍징분을 수취하여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향리의 이러한 추가적인 수취는 규정에 없는 임의적인 행위였지만 관행으로서 용납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향리의 이러한 수탈은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관료의 선발에는 과거 제도 이외에도 유력한 인물이 추천하는 천거, 공신이나 왕족의 자손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음서 등의 방법이 있었지만 과거를 통한 선발이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조선의 문인들은 음서 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보였으나 국왕과 고위 관료 모두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
등용된 관리들은 직위에 따라 종9품에서 정1품까지의 18단계에 이르는 품계가 주어졌다.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는 작위가 수여되는 봉작이 있어 남성 왕족의 경우 군, 대군 등의 작위가 주어졌고 여성 왕족은 공주, 옹주 등의 작위가 주어졌다. 왕비의 아버지에게는 부원군의 작위가 주어졌다. 공신에게도 군의 작위가 주어졌으나 세습되지는 않아 고려 시대의 귀족 신분과는 성격이 달랐다.
한편, 조선의 관료제 제일 하부에는 아전을 비롯한 여러 하급 관료들이 있었다. 이들 상당수는 급료 없이 근무하였고 과거 시험의 응시가 제한되어 중인 계급을 형성하였다.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제의 실시를 위해 지방 향리의 경제적 지위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국가의 급료가 없는 향리는 자신 소유의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과 함께 읍, 리 단위로 부과되는 세금에 자신의 몫인 읍징분을 수취하여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향리의 이러한 추가적인 수취는 규정에 없는 임의적인 행위였지만 관행으로서 용납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향리의 이러한 수탈은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5. 붕당 정치[편집]
붕당(朋黨)은 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지역적, 학문적,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다. 붕당 정치는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의 독특한 정치 운영 형태를 말한다. 현대의 정당(政黨)처럼 정치적인 견해를 중심으로 구분된 집단이 아니라 지연, 학연, 이해관계에 따라 무리가 니뉘고 구성되었으므로 붕당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통하여 균형을 이루고 공존을 원칙으로 하는 붕당 정치는 현대의 정당 정치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해 관계는 물론 구성원 사이에 학문적 유대 또한 공유했다는 점이 조선 시대 붕당의 특수한 성격이다. 또한 정치적 역학 관계의 정립에 있어서 탕평론은 국왕에 의한 타율적 정리라고 한다면, 붕당론은 자율적 힘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초기부터 권력을 장악한 훈구파는 15세기 후반 성종때부터 중앙에 진출한 사림파(士林派)와 대립하였다. 훈구파는 4차례의 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탄압했으나 사림파는 이를 극복하고 16세기 중엽 선조때에 이르러 중앙 정계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1575년(선조 8년) 동서분당 사건을 계기로 사림파는 서인과 동인으로 분파되며 본격적으로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붕당시작의 근본 원인은 당시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훈구 정치의 청산과 향후 국정운영의 방법을 놓고 선후배 세대간의 입장 차이와 한정된 관직을 둘러싼 경쟁에 있었다.
이 시기의 붕당은 특정 가문의 권세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을 통해 조선 중기 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9세기 초엽 이후 붕당 정치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특정 양반 가문이 권력을 쥐고 독재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었다. 붕당 정치를 당쟁 또는 당파 싸움이라고도 부르나, 이 용어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의견의 교환과 대립에 대해 당의라고 표현하였다.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었는데,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뉜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이 득세하며 소북은 몰락하였다. 인조반정(1623)으로 대북이 숙청당한후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경신환국(1680)으로 남인이 몰락한후 득세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을사처분(1725)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았으나 임오화변(1762)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분파되었다. 순조때 신유박해(1801)가 일어나 남인과 시파가 숙청을 당하며 재기불능상태가 되고 벽파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가 득세하며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조선의 붕당 정치는 붕괴하고 말았다.
조선초기부터 권력을 장악한 훈구파는 15세기 후반 성종때부터 중앙에 진출한 사림파(士林派)와 대립하였다. 훈구파는 4차례의 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탄압했으나 사림파는 이를 극복하고 16세기 중엽 선조때에 이르러 중앙 정계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1575년(선조 8년) 동서분당 사건을 계기로 사림파는 서인과 동인으로 분파되며 본격적으로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붕당시작의 근본 원인은 당시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훈구 정치의 청산과 향후 국정운영의 방법을 놓고 선후배 세대간의 입장 차이와 한정된 관직을 둘러싼 경쟁에 있었다.
이 시기의 붕당은 특정 가문의 권세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을 통해 조선 중기 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9세기 초엽 이후 붕당 정치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특정 양반 가문이 권력을 쥐고 독재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었다. 붕당 정치를 당쟁 또는 당파 싸움이라고도 부르나, 이 용어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의견의 교환과 대립에 대해 당의라고 표현하였다.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었는데,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뉜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이 득세하며 소북은 몰락하였다. 인조반정(1623)으로 대북이 숙청당한후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경신환국(1680)으로 남인이 몰락한후 득세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을사처분(1725)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았으나 임오화변(1762)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분파되었다. 순조때 신유박해(1801)가 일어나 남인과 시파가 숙청을 당하며 재기불능상태가 되고 벽파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가 득세하며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조선의 붕당 정치는 붕괴하고 말았다.
6. 통치 기구[편집]
조선의 통치 기구는 국왕을 정점으로 지역의 향리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통치기구는 서울과 지방을 나누어 경관직과 외관직으로 구분할 수 있고 수행 임무에 따라 국왕의 직할 부서, 의정부 관할 부서, 지방 행정 부서로 구분할 수 있다.
7. 지방 행정 기구[편집]
조선은 전국을 팔도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서울의 주변은 동양의 오랜 전통에 따라 경기도로 불렀고, 다른 행정 구역은 그 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도시의 이름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들었다. 예를 들어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의 앞글자를 붙여 부른 이름이다. 조선 팔도는 아래와 같다.
도 밑으로는 부, 군, 목, 현 등의 하위 지방 행정 구역을 두었다. 이 가운데 부는 특별히 중요한 거점으로 도의 수장인 관찰사와 같은 품계인 종2품의 부윤을 파견하였다. 각 하위 지방 행정 구역의 수령은 모두 중앙에서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계를 이루었다. 경국대전은 수령의 임기를 5년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 보다 교체 시기가 더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