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30 | ||
|---|---|---|
| r29 | 1 | [[분류:안창호]] |
| r1 (새 문서) | 2 | ||<-2><table align=right><tablewidth=420><tablebordercolor=#1c1d1f,#191919><tablebgcolor=#fff,#1c1d1f><colbgcolor=#330066><colcolor=#fff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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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4 | 5 | '''{{{#fff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제6대 국무령]][br]{{{+1 안창호}}}[* 별칭으로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가 있다.][br]安昌浩 | Ahn Chang-ho}}}'''}}} || |
| r1 (새 문서) | 6 | ||<-2><nopad> [[파일:안창호 사진.jpg|width=100%]] || |
| r28 | 7 | ||<|2><width=18%> '''출생''' ||1878년 11월 9일 || |
| r1 (새 문서) | 8 | ||[[평안남도|평안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현[br](現 남포시 천리마구역)[*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2200&code=kc_age_40|#]]] || |
| 9 | ||<|2> '''사망''' ||1938년 3월 10일 (향년 59세) || | |
| 10 | ||경기도 경성부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경성제국대학병원]][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
| 11 | || '''묘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 | |
| 12 | || '''사인''' ||폐결핵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 || | |
| r21 | 13 | || '''국적''' ||[[파일:태극기.jpg|width=20px]] [[대한민국]] || |
| r1 (새 문서) | 14 | || '''학력'''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 {{{-2 (졸업)}}} || |
| 15 | || '''가족''' ||아버지 : 안흥국[br]어머니 : 제안 황씨[br]배우자 : 이혜련[br]아들 : 안필립, 안필선, 안필영[br]딸 : 안수산, 안수라 || | |
| 16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개신교 || | |
| 17 | ||<-3><bgcolor=#330066> {{{#fff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6대 국무령'''}}} || | |
| r27 | 18 | ||<width=100> '''임기''' ||1926년 5월 3일~1926년 5월 16일 || |
| r1 (새 문서) | 19 | || '''전임''' ||이동녕 {{{-2 (제5대)}}} || |
| 20 | || '''후임''' ||이동녕 {{{-2 (제7대)}}} || | |
| 21 | [목차] | |
| 22 | [clearfix] | |
| 23 | == 개요 == | |
| r12 | 24 | 안창호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
| r11 | 25 | |
| r1 (새 문서) | 26 | == 상세 == |
| 27 | 그의 사후 1988년 3월 21, 24일, 안창호가 공부한 구세학당 , 즉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에 소속한 장로교회 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졸업장이 추서됐다. | |
| 28 | ||
| 29 | [[평안남도]]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해 1899년(광무 2년) 점진학교, 1908년(융희 2년) 대성학교, 1926년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 |
| 30 | ||
| 31 |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과는 동성동본 친족척이기도 하며 1938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간경화를 비롯한 폐렴과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 복막염 및 피부염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타계한 그는 생전에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소화불량과 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한다. | |
| r30 | 32 | == [[안창호/생애|생애]] == |
| 33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안창호/생애)] | |
| r2 | 34 | == 사망 == |
| 35 | 친구인 윤치호와 그를 스승처럼 따르던 이광수가 고급 한약을 보냈지만 여러 병의 합병증으로 고생하여 낫지 않았다. 그의 외조카 김순원과 조카딸 안성결, 그의 제자인 박정호 등 그의 입원 중 시중을 들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독립운동 동지인 이갑의 딸 이정희가 거들면서 번갈아가면서 안창호의 시중을 들며 끝까지 지성껏 병간호를 했다. 윤치호와 이광수, 김성수 등은 병원비를 지불했고 수시로 그를 찾아 문안했다. 1938년 그는 혼수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까지도 그는 나라를 걱정하며 민족의 실력을 기르고 독립을 준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 |
| 36 | ||
| 37 | 1938년 초 그는 병상에서 일본 천황 무쓰히토(睦仁, 메이지 천황)를 규탄하는 소리를 일갈하여 병원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병상에서 안창호는 선우씨의 손을 잡고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입 안이 마르고 혀가 잘 돌지 않아서 말을 못하였다. 몸이 극도로 수척하여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수염은 희고, 머리의 반은 누렇고 반은 희어 황백색이었다. | |
| 38 | ||
| 39 | 그가 만년에 경성의 한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얼굴이 많이 부어 있는 상태였다. 1938년 3월 10일 0시 5분 안창호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향년 61세를 일기로 간경화와 소화불량, 폐렴, 만성기관지염, 위장병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는 자신이 총애하던 애제자 유상규의 묘소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은 흥사단과 수양동지회 회원의 주도로 거행되었고, 윤치호, 이광수, 김성수, 여운형, 여운홍, 윤치영, 장택상 등이 참석하였다. | |
| 40 | == 사망 이후 == | |
| 41 | * 안창호는 그의 유언에 따라 망우 역사 문화공원의 유상규 묘역 옆에 안장되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헌병을 보내 만일의 소요사태를 막는다는 이유로 망우리 묘소 장지의 출입을 통제, 감시하였으며 안창호의 친족이 상복을 입는 것도 금지시켰다. | |
| 42 | ||
| 43 | * 일제의 현상금으로 인해, 국내에 들어와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안창호를 추도하는 한자로 된 만시를 지어보내 비록 독립운동의 방향과 의견 차이로 인해 다투기도하고 서로 돕기도 하였던 지난 날을 생각하며 애도를 표했다. | |
| 44 | ||
| 45 | * 그 뒤 윤치호와 이광수, 김성수 등에 의해 추도식이 계속 되었고, 해방 뒤에도 김구의 귀국 이후, 김구, 김성수, 이광수 등에 의해 추도식이 계속 이어졌다. | |
| 46 | ||
| 47 | * 윤치호에 의하면 이광수, 현제명, 주요한 등은 안창호가 죽자 마자 등을 돌리고 조선총독부에 아첨했다는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남겼다. | |
| 48 | ||
| 49 | * 제1공화국 기간 중에도 흥사단과, 그를 존경하던 김성수, 장택상, 그리고 한때 그의 수양동우회 회원이었던 조병옥 등에 의해 계속 추모 사업이 계속 이어졌다. | |
| 50 | ||
| r10 | 51 |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
| r2 | 52 | |
| 53 | * 1973년 11월 10일, 안창호의 묘는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으며 원래 로스앤젤레스에 안장되어있던 그의 아내 이혜련의 유해를 옮겨와 함께 합장되었다.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있던 안창호의 묘는 가묘로 보존되고 있다. | |
| 54 | ||
| 55 | * 2000년대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인터체인지(2002년)와 우체국(2004년)이 세워졌다. | |
| 56 | == 사상과 신념 == | |
| 57 | === 4대 정신 === | |
| 58 | * 무실 | |
| 59 | ||
| 60 | * 역행 | |
| 61 | ||
| 62 | * 충의 | |
| 63 | ||
| 64 | * 용감 | |
| r11 | 65 | |
| r2 | 66 | === 실력양성론 === |
| 67 | 안창호는 1920년대 내내 독립운동의 진행을 가로막던 고질적인 사상분열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사상과 노선 갈등의 극한 대립을 융화 시키고자 그 어떤 주의와 노선으로도 분파할 수 없는 자기 희생의 '대공주의'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 |
| 68 | ||
| 69 | 그는 스스로 힘을 키울수 있을 때만이 민족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실력양성론을 주장했다. 그의 실력 양성론에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조병옥 등이 감화받았다. | |
| 70 | ||
| 71 | 안창호는 개인의 당리나 사익보다 사회 전반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민주적 토론절차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중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 나라 수립을 지향하는 중도적 노선을 선호했었다. | |
| r11 | 72 | |
| r2 | 73 | === 거짓 망국론 === |
| 74 | 안창호는 한국인들의 거짓, 사기, 부정이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갔다고 봤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의 원수는 불공대천이라 하였으니 내 평생에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네 가죽 속과 내 가죽 속에 있는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채우자고 거듭거듭 맹세합시다.”라며 거짓과 거짓말이 나라를 망친 길이라고 보았다. 거짓이 만연한 것이 나라를 망친 것이라 진단한 그는 거짓이야 말로 나라를 죽인 원수로 규정하였다. | |
| 75 | ||
| r13 | 76 | 그는 "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요. 신성한 일을 신성치 못한 재물이나 수단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오."라며 공직을 통해 부당한 재물을 축재한 것 역시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원인으로 보았다. |
| r2 | 77 | |
| 78 | 그에 의하면 '거짓이 협잡을 낳고 협잡이 불신을 낳고 불신에서 모든 불행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망친 최대의 원인의 하나가 거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거짓말을 말라. 심지어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자.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깊이 뉘우쳐야 한다. 거짓이 우리를 망친 원수다'라는 것이다. 각 개인의 가슴 가운데 진실과 정직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 |
| 79 | ||
| 80 | 그가 가장 미워한 것이 거짓이요,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이 진실이다. 그의 인격은 참의 인격이요, 그의 철학은 진실의 철학이다. 저마다 참되기를 힘쓰고 한국민족을 참된 민족으로 만들자는 것이 그의 숙원이었다. 그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 제자들을 교육할 때에도 ‘참’이 그의 교육 이념이었다. | |
| 81 | ||
| 82 | 안창호는 학생들에게 성실과 진실을 요구했다. 그는 저마다 ‘참’의 공부를 하자, 온 국민이 진실한 인간이 되기를 힘쓰자, 그것이 곧 나라를 구하는 길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 |
| r11 | 83 | |
| r2 | 84 | === 대공주의 === |
| 85 | 1927년 상하이에 있을 때 그는 대공주의를 역설하였다. 이는 이념, 계파, 파벌을 떠나 조국과 독립을 위해 헌신하자는 것이며, 공적인 것을 위해 개인과 사적인 것을 희생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설립되면서부터 그는 '여러분, 공과 사를 가르시오. 공과 사 중 한쪽을 굳이 희생해야 된다면 사를 희생해야 됩니다.'라고 역설했다. 대공주의를 발표하면서 그는 여기에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추가하였다. 대공주의는 1920년대 중후반 독립운동가들간의 이념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급속히 세력이 커진 사회주의자들과의 제휴 내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 내려는 의도에서 이를 구체화하기에 이른다. | |
| 86 | ||
| 87 | 1919년 안창호는 독립운동기간에 서로 엄히 지킬 맹약으로서 공금을 횡령하지 못한다는 철칙을 세웠다. 공금을 사적으로 횡령하는 행위는 용서하거나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1920년 1월 3일 상해에서 신년 축하회가 열렸을 때 5시간 동안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서 육대사업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그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지탄하며, 임시정부의 직원들은 사사로운 감정과 사사로운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 |
| 88 | ||
| 89 | 또한 안창호는 '물방황'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유명한 사기의 한 구절을 들어 '사투(私鬪, 사적인 싸움)에는 겁을 품고, 공전(公戰, 공적인 싸움)에 임해서는 용감하시오'라는 것이다. 1927년에 이르러 공을 위해 사를 희생해야 된다는 것을 주제로 한 대공주의라는 것을 구체화하여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서구의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에 대응하되 이념적이지 않은 이념이었다. | |
| 90 | ||
| 91 | 그는 민족주의자들이 추구하던 궁극적 목표인 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틀 속에서 자유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인 어떤 것에도 억압되지 않는 자유의 가치를 수용하고,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인 평등의 가치 역시 적극 수용하였다. 대공주의의 바탕으로 그는 '안으로는 이를 정치,경제,사회,교육의 분야에서 평등사회를 실현하고, 개인과 개인간의 평등한 권리와 대우 보장'을, '밖으로는 민족과 국가간의 평등을 통한 평화적 세계질서 수립'을 그 존립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 |
| r11 | 92 | |
| r2 | 93 | === 교육입국론 === |
| 94 | 실력양성론의 방법의 하나로 그는 교육입국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육이 곧 도탄과 식민통치에 빠진 한국을 독립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1899년 평양에 점진학교, 1908년 대성학교를 건립하였고, 그와 생각이 같던 이동휘, 윤치호, 양기탁 등이 그의 점진학교, 대성학교의 운영에 적극 협력, 동참한다. 1926년 중국 난징에는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 |
| 95 | ||
| 96 | 그의 교육입국론에도 감화된 김성수 등은 학교 신설과 경영난을 겪던 중앙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고, 장덕수, 윤치호 등은 이화여전, 근화여학교 등의 재단 이사로 참여하며 이들 사립 학교 재단의 재정적 후견인 노릇을 하였다. | |
| r11 | 97 | |
| r1 (새 문서) | 98 | == 활동가로서의 의의 == |
| 99 |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무력투쟁론,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으로 나뉠 때 민족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민족개조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여 경제적, 사회적인 실력을 길러야만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교육 입국론을 제창하여 각종 학교의 설립과 양성에 노력하였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그의 실력 양성론은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송진우, 안호상, 조병옥, 김성수 등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다. | |
| 100 | ||
| 101 |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연설과 웅변에 두루 능통하였다. 여러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한편 그는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유길준을 지목했다. 다른 이름은 창호(昌鎬)이고, 자는 치삼, 호인 도산(島山),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별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 |
| r11 | 102 | |
| r2 | 103 | == 저서 == |
| 104 | * 안창호 일기 | |
| 105 | ||
| 106 | * 도산 안창호 서한집 : 영원한 청년 안창호의 러브레터》 | |
| r11 | 107 | |
| r2 | 108 | == 평가 == |
| 109 | === 긍정적인 평가 === | |
| 110 | 안창호는 '민족의 선각자',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등 높은 평가를 받는 반면, '개량주의자', '조선독립불가론자', '자치론자'등 독립운동계에 파벌을 조장시키고 민족개량주의를 양성시킨 인물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32] 실제 이광수, 최남선, 윤치호 등 그의 노선을 추종했던 인물 1930년대 중반이후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러나, 안창호 자신은 언제나 중립적 입장에서 평행선을 유지하려 했었고, 파벌을 조장하는 것에 대해 극히 원하지 않았었다. 그는 한국 근대사상 경제, 정치, 언론, 문화 각 방면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인재양성과 재정 확보 등을 통해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을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이 장벽에 부딪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돌파구를 마련하고 정국을 전환하여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였다. | |
| 111 | ||
| 112 | 당대의 시각에서 "도산은 겸허한 사람이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오만불손한 마음과 유아독존의 영웅주의적 태도는 도산에게서는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두뇌와 언변과 통솔력과 용기와 덕성이 뛰어난 인격자였지만 절대 자만하거나 뽐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앞에 나서서 떠드는 사람이 아니고 뒤에 서서 묵묵히 자기 직분을 다하는 분이었다. 그는 스스로 높이는 자가 아니고 스스로 낮추는 자였다."는 평가도 있다. | |
| 113 | ||
| 114 | 안창호의 비서를 지낸 구익균은 참 온화하고, 화도 잘 안 내시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분이라고 평하였다. | |
| 115 | ||
| 116 |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택상은 그를 대통령이 될 자질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에 의하면 영국으로 가는 도중, 베를린에 있는 한국인을 만나 여관에 함께 묵고 있을 동안에 안창호를 만날 수 있었다. 장택상은 '그의 인상 중에서도 웅변술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 |
| 117 | ||
| 118 | [[이명박]]은 4대강 살리기 사업 강행에 안창호가 주장한 '강산개조론'이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 |
| r11 | 119 | |
| r2 | 120 | === 부정적 평가 === |
| 121 | 안창호의 소위 실력 양성론은 적극적 독립 투쟁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원래 문서에서는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쓰여있었으나 청포도출판서의 안창호 평전을 보면, 장남 필립에게 한자와 한글을 가르치고 익히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좌파 지식인 박노자 교수는 그를 근대 친미적 부르주아·지식인의 수장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민족개량주의자, 친미주의자'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 |
| 122 | ||
| r13 | 123 | 안병욱 교수는 도산의 사상을 '힘의 철학'이라고 명명하였다. 한편 이런 힘의 철학을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하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와 결부시켜, 그의 점진주의 혹은 준비론은 결과적으로 강자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국권상실의 책임을 안으로 돌림으로서 외부의 적에 대한 대항의지를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독립의지를 무력화하여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의 점진적 독립운동 방법론은 근본적 변화를 무시하고 착취와 수탈의 기본적 식민지 구조 안에서 제한된 개선만을 시도할 뿐이며 결국 현실도피적인 이상촌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있다. |
| r11 | 124 | |
| r1 (새 문서) | 125 | == 본 문서 정보 == |
| 126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
| 127 | ||
| r29 | 128 | * [[https://ko.m.wikipedia.org/wiki/%EC%95%88%EC%B0%BD%ED%98%B8|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