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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분류: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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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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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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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말기에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의 학문을 이르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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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 상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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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동아시아 특유의 종교 및 철학 체계이다.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인륜 명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명교라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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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유교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유교가 실현하고자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이 수기치인이다. 수기치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서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즉, 유교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또한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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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권선징악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유학자들의 역사 서술에서도 권선징악이 자주 등장하나 실제 역사에서 권선징악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실제로 유학자들이 있으나 귀족 세력이 멀쩡하여 역사 서술에 참여할 수 있었던 지역들은 권선징악적 역사와는 거리가 멀며 보다 실증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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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유교는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에는 제자백가의 하나인 유가로 등장했지만, 전한의 무제(재위 기원전 141~87) 때 국가 정통의 학문이 된 후로는 중국의 학문과 사상계를 대표하게 되어 현대의 중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정치와 국민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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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유교의 주류는 전국시대에는 맹자로 대표되는 내성파의 학문과 순자로 대표되는 숭례파의 학문,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훈고학과 경학, 송나라 시대의 성리학, 명나라 시대의 양명학, 청나라 시대의 고증학 등으로 발전 또는 변천되었다. 한나라 때 시작된 양천 신분제의 기원으로 양천제는 유교적 도덕성에 따라서 모든 인민을 양·천이라는 두 집단으로 구분하고 양자의 법제적 지위를 대칭적으로 설정하여 각각 상이한 권리·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춘추전국 귀족들에 대항했던 사상으로 귀족적 사회나 인간상보다 좌파적이거나 포퓰리즘에 가까운 내용들이 고대부터 많았다. 맹자의 경우 사람의 성품에 따른 천작이 귀족들의 인작보다 낫다고 하였다. 따라서 진시황이나 항우 같은 귀족들은 유학자들을 탄압하기도 했으며 근대의 중국에선 양계초가 자본주의란 병을 약인 공산주의로도 고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유학자들은 중국에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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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 성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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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유교는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라고도 하는데, 그 내용은 신분의 존비와 인애를 근본으로 하면서 수신· 제가 · 치국 · 평천하의 길을 가르치는 일종의 정치학 · 윤리학이다. 따라서 유학이라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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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공자는 자기의 교학이 정교일치의 성덕을 갖춘 옛 성왕들의 도에 합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이 "선왕의 도"는 주공을 비롯하여 주 왕조의 창설자들에 의해 밝혀져서 시나 서 등의 경전서에 수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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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공자의 사상은 전국 시대에는 맹자· 순자 등에 의해서 계승되어 진 · 한에 미쳤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서 시와 서 외에 역·예·춘추가 경서에 추가돼서 오경이 성립되었다. 오경의 성립은 중국인 공통의 규범이나 신앙이 유가 사상을 핵으로 하여 집대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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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한나라의 무제는 전 중국의 지배자로서의 한왕조의 권위를 이데올로기 면에서 정당화하기 위하여 동중서 등의 협력을 얻어 유교를 한제국 공허의 학문으로 채용하였다. 이것으로 유교는 강대한 전제 권력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지지를 얻게 되고 관료와 그 후보자적 존재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교양이 되었다. 따라서 이전에 유교가 재야 여러 학문의 하나였던 때에 비해서 유교는 차차 그 사상적 내용의 긴장성을 잃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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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 사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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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유교 · 유가 또는 유학은 본래 춘추시대 말부터 전국시대에 걸쳐서 배출된 제자백가 중의 한 학파에 불과했으나 한나라 왕조의 권력 안정과 함께 그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서 중시되어 중국의 정치사상 중에서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에 왕조 정치 체제가 존속한 2천년 동안 유학은 국가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교학(敎學, 즉 儒敎)으로서 정통사상의 지위를 계속 차지하였다. 그 오랜 기간 동안에 유학은 각 시대의 정치 상황이나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 대응하여 그 내용을 변화시켜 전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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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유"라는 명칭의 뜻은 사람을 뜻하는 글자와 “필요하다“라는 뜻의 한자가 쓰였는데, 이에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춘추전국시대'라는 난세 속에서 각 나라 사이에서의 전쟁과 내부적인 혼란을 수습하고 혼란한 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인재들이 필요하였었는데, 유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필요한 인재들" 혹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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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귀족들의 지배를 받던 과거에는 귀족적인 모습도 갖추며 발전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민중적이 되었으며 귀족적 잔재가 많이 남은 유교는 일본에서 볼 수 있다. 한족들은 이 사상을 바탕으로 귀족들을 제거하려고 했고 그 결과 한족 귀족들은 한민족이나 야마토 민족의 귀족들과 달리 이른 시기에 전멸하고 말았다. 우리나라나 일본은 귀족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교에 있어서도 귀족의 영향력이 강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 시절은 물론 고려까지는 귀족 세력[11]이 만만치 않았으며 조선도 초기 혹은 사림 집권 전까지 귀족 출신[12]은 물론 제주 고씨처럼 전보다는 망했으나 특별히 내세울 게 없어도 그냥 음서 같은 특권을 얻거나 양반, 사대부 취급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순수 상민 출신과 양반 비율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애매할 수 있으나 사림 세력의 팽창 이후 더욱 강해진 중국화에 따라 중인 취급(?)을 받는 옛 귀족들도 많아졌으며 이들은 다시 귀족 출신인 사실이 유리해진 일제강점기 때 재기에 성공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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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동아시아의 전근대 이전 민본주의나 능력주의를 담당하여서 유교사상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의 학, 즉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며 왕도 정치를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버드 중국사에 의하면 유교는 내부 통합은 몰라도 외부의 위협에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시각에 의하면 유학자들은 스스로 가진 힘으로 지배층이 될 수 없는 존재였으며 유교적 기질이 강했던 한송명 왕조는 적대자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수혜를 베풀었고 이는 정복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귀족들은 유학자들보다 실리를 추구하여 중국에 더 나은 번영과 결과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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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 유교의 경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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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 사서 : 논어, 맹자, 대학, 중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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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 오경 :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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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 == 본 문서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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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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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A%B5%90|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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