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879년 7월 10일 |
사망 | 1962년 5월 10일 (향년 82세) |
묘소 | |
본관 | 의성 김씨 |
가족 | 아버지 : 김호림(金頀林) 어머니 : 인동 장씨 자녀 : 슬하 3남 |
직업 | 정치인, 교육자, 예술가 |
경력 | |
상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3. 생애[편집]
일찍이 유학을 배워 조예가 깊었고, 1909년 성명 학교를 창립하였으나 '을사 5원흉 매국 성토 사건'으로 피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 대표들이 서명한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내는 독립 진정서를 가지고 중국 장쑤성의 상하이로 건너가 우송한 후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다. 1919년 광복 운동 모금 중 체포되었다. 그 후 서로 군정서·임정 의정원 등에 관계하다가 1927년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어 만주국 펑톈 성의 다롄에서 복역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곧 유도회를 조직, 재단법인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 학장으로 교육에 힘썼으나,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여 수난을 겪으면서 유도회의 분쟁에 말려들었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4. 사망 이후[편집]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마을에는 심산 김창숙의 생가, 청천서당, 청천서원 등 동강 김우옹과 그 후손들의 흔적이 있다. 김창숙의 생가(경상북도 기념물 제83호)는 청천서원 200m 아래쪽 사도실마을 어귀에 있다.
현재의 건물은 옛 건물이 화재를 당하여 안채는 1901년, 사랑채는 1992년 중수한 것이다. 김창숙 생가는 90세가 넘은 선생의 둘째 며느리 월성 손씨 손응교 종부가 2016년까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며느리의 생활은 고단했지만, 그녀는 수절을 택했다. 이런 며느리를 위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하여 담뱃불을 붙여달라면서 시아버지 김창숙은 담배 피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한다. 손응교 종부는 2016년 향년 100세로 서거하였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 학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옛 건물이 화재를 당하여 안채는 1901년, 사랑채는 1992년 중수한 것이다. 김창숙 생가는 90세가 넘은 선생의 둘째 며느리 월성 손씨 손응교 종부가 2016년까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며느리의 생활은 고단했지만, 그녀는 수절을 택했다. 이런 며느리를 위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하여 담뱃불을 붙여달라면서 시아버지 김창숙은 담배 피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한다. 손응교 종부는 2016년 향년 100세로 서거하였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 학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국립4.19민주묘지 인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