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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동쪽으로는 독일, 남쪽으로는 벨기에와 접하며 북쪽으로는 영국을 마주보고 북해에 면한다.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합해서 베네룩스라고 부른다. 수도는 암스테르담이다(옛 수도는 헤이그).
카리브 해의 아루바, 퀴라소, 신트마르턴과 함께 네덜란드 왕국을 구성한다. 이외에도 해외 특별자치령으로 BES제도라 하는 보네르섬, 신트외스타티위스섬, 사바섬이 있다.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언론의 자유, 경제적 자유, 인간 개발 지수, 삶의 질 측면에서 최상위 국가 중 하나이다. 2019년 세계행복지수 세계 5위, 1인당 국내총생산 세계 7위, 인간 개발 지수 10위였다. 2022년 적극적 평화 지수는 세계 6위였다.
카리브 해의 아루바, 퀴라소, 신트마르턴과 함께 네덜란드 왕국을 구성한다. 이외에도 해외 특별자치령으로 BES제도라 하는 보네르섬, 신트외스타티위스섬, 사바섬이 있다.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언론의 자유, 경제적 자유, 인간 개발 지수, 삶의 질 측면에서 최상위 국가 중 하나이다. 2019년 세계행복지수 세계 5위, 1인당 국내총생산 세계 7위, 인간 개발 지수 10위였다. 2022년 적극적 평화 지수는 세계 6위였다.
3. 역사[편집]
켈트와 게르만인이 자리잡고 살던 네덜란드에 로마인이 들어와 외국 지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BC 50년 경이다. 남부의 마스트리흐트에 로마 시대의 요새 유적이 남아 있다. 로마 지배의 말기에는 프랑크와 색슨-프리스인들이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 무렵 네덜란드에 기독교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슬람을 막은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았다.(800년) 그가 사망(816년)한 이후, 유럽은 베르됭 조약(843년)으로 서 · 중 · 동 프랑크로 나뉘게 되는데, 이 때 저지대 국가는 스헬더강을 중심으로 서쪽(현재의 벨기에)은 서프랑크 왕국에, 동쪽은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된다. 10~13세기에는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며, 홀란트 백작이 북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강화하였다.
1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부르고뉴(부르군트) 공작 지배하에 들어가고, 15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에는 근대 자본주의에 눈을 뜨게 된 시민들이 우상파괴 폭동과 네덜란드 종교개혁 등의 끈질긴 저항으로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고, 1588년 공화국(국호는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기에 이른다. 공화국은 1815년에 폐지되고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로 바뀐다.
무역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에 접어든다.
1588년에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이 성립되자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네덜란드는 해외 진출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당시에는 총독이 통치했다). 17세기에는 주식회사인 연합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세계 제일의 무역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주들의 투자를 받아서 설립된 주식회사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지에 인도네시아 등의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북미 대륙에도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을 건설하기까지 하였다. 오세아니아에도 간 상인들은 뉴질랜드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에도 진출하였는데, 일본에서는 나가사키에 활동 공간을 마련해주었으며, '난학'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를 배워가기도 했다. 이는 막부시대 일본에서 금지한 종교인 기독교의 선교를 하지 않고 무역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이하여, 렘브란트 판 레인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의 화가와 에라스무스,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도 배출하였다. 특히 에라스무스는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 사제였지만, 우신예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종교 개혁자였으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츠빙글리의 사상형성과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영국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는 미국의 뉴욕주, 뉴저지주 등을 식민지로 삼고 인도네시아를 식민화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를 견제하려는 영국과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밀려나 세계의 상권을 영국에 빼앗기게 되었으며, 1793년 2월 1일, 프랑스는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하였다. 1810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영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15년 빈 회의의 결과 네덜란드 왕국이 새로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국가인 벨기에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가 합병된 왕국이었기 때문에, 1831년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여 벨기에 왕국을 건국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도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기의 인물 중 하나이다. 전후 네덜란드는 안정된 정치와 높은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 인도네시아가 종전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하자, 네덜란드군이 이를 탄압하여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많은 비난 끝에 유엔의 중재로 독립을 승인하였다. 이후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아루바등의 식민지가 남아있었다. 1971년에는 맥도날드 햄버거집이 네덜란드 잔담에 상륙하였다.이후 2010년 네덜란드령 안틸레스를 해체하고 퀴라소와 신트마르턴은 네덜란드의 구성국이 되었고 나머지 영토는 카리브 네덜란드 직헐령이 되었다.
1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부르고뉴(부르군트) 공작 지배하에 들어가고, 15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에는 근대 자본주의에 눈을 뜨게 된 시민들이 우상파괴 폭동과 네덜란드 종교개혁 등의 끈질긴 저항으로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고, 1588년 공화국(국호는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기에 이른다. 공화국은 1815년에 폐지되고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로 바뀐다.
무역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에 접어든다.
1588년에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이 성립되자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네덜란드는 해외 진출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당시에는 총독이 통치했다). 17세기에는 주식회사인 연합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세계 제일의 무역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주들의 투자를 받아서 설립된 주식회사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지에 인도네시아 등의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북미 대륙에도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을 건설하기까지 하였다. 오세아니아에도 간 상인들은 뉴질랜드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에도 진출하였는데, 일본에서는 나가사키에 활동 공간을 마련해주었으며, '난학'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를 배워가기도 했다. 이는 막부시대 일본에서 금지한 종교인 기독교의 선교를 하지 않고 무역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이하여, 렘브란트 판 레인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의 화가와 에라스무스,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도 배출하였다. 특히 에라스무스는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 사제였지만, 우신예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종교 개혁자였으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츠빙글리의 사상형성과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영국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는 미국의 뉴욕주, 뉴저지주 등을 식민지로 삼고 인도네시아를 식민화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를 견제하려는 영국과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밀려나 세계의 상권을 영국에 빼앗기게 되었으며, 1793년 2월 1일, 프랑스는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하였다. 1810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영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15년 빈 회의의 결과 네덜란드 왕국이 새로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국가인 벨기에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가 합병된 왕국이었기 때문에, 1831년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여 벨기에 왕국을 건국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도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기의 인물 중 하나이다. 전후 네덜란드는 안정된 정치와 높은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 인도네시아가 종전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하자, 네덜란드군이 이를 탄압하여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많은 비난 끝에 유엔의 중재로 독립을 승인하였다. 이후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아루바등의 식민지가 남아있었다. 1971년에는 맥도날드 햄버거집이 네덜란드 잔담에 상륙하였다.이후 2010년 네덜란드령 안틸레스를 해체하고 퀴라소와 신트마르턴은 네덜란드의 구성국이 되었고 나머지 영토는 카리브 네덜란드 직헐령이 되었다.
4. 국명[편집]
국명 및 통칭은 네덜란드어로 Nederland(네덜란드 왕국)이다. 이는 '저지대 국가', '저지대 지방'을 뜻하는 보통명사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정관사를 붙일 필요가 있다. 통칭 'Nederland'는 네덜란드 왕국의 유럽 국토를 의미하기 때문에 단수형이고, 정식 명칭에 사용되는 'de Nederlanden'은 해외 영토를 포함한 개념이기 때문에 복수형이다. 게르만계 언어로는 독일어로 die Niederlande, 라틴계 언어로는 프랑스어로 les Pays-Bas, 스페인어로 los Países Bajos, 이탈리아어로 i Paesi Bassi(모두 의미는 같다). 모두 복수형인 것은 전통적으로 현재의 베네룩스 3국이 있는 저지대 지역 일대의 영방군의 역사적 총칭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복수형이기는 하지만, 영어나 스페인어 등 언어에 따라서는, 종종 집합명사 혹은 '왕국'을 생략한 것으로 단수 취급된다.
속칭인 Holland(홀란드)도 자주 쓰이는데, 이는 스페인 지배에 맞서 일으킨 80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홀란트 주(현재는 남북 2개 주로 나뉘었다)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고유명사이므로 관사가 붙지 않는다.
공식적인 영어 표기는 the Netherlands(더 네덜런즈). 형용사 및 명사형인 Dutch(더치)는 원래 독일을 가리키며 같은 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난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사람, 말)를 뜻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만 역사적으로 영란 간에 무역이나 해외 진출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과 대립이 발생했기 때문에 경멸의 뉘앙스가 강해 'Netherlander'나 'Hollander'가 이용되기도 한다.
한자 표기는 화란, 화란타, 아란타, 하란타, 하란, 니덕으으로 표기되며 란으로 약칭된다. 유래는 포르투갈어로 '홀란트'를 의미하는 'Holanda [ɔˈlɐ̃dɐ]'가 센고쿠 시대에 내항한 포르투갈인 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진 데서 비롯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2020년 1월 1일로써 국명으로 '홀란드'를 사용하지 않고 네덜란드 외무부도 여러 나라에 이 통칭을 변경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오란다'라는 호칭에 대해서는 일본어 단어로 정착했기 때문에 변경은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속칭인 Holland(홀란드)도 자주 쓰이는데, 이는 스페인 지배에 맞서 일으킨 80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홀란트 주(현재는 남북 2개 주로 나뉘었다)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고유명사이므로 관사가 붙지 않는다.
공식적인 영어 표기는 the Netherlands(더 네덜런즈). 형용사 및 명사형인 Dutch(더치)는 원래 독일을 가리키며 같은 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난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사람, 말)를 뜻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만 역사적으로 영란 간에 무역이나 해외 진출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과 대립이 발생했기 때문에 경멸의 뉘앙스가 강해 'Netherlander'나 'Hollander'가 이용되기도 한다.
한자 표기는 화란, 화란타, 아란타, 하란타, 하란, 니덕으으로 표기되며 란으로 약칭된다. 유래는 포르투갈어로 '홀란트'를 의미하는 'Holanda [ɔˈlɐ̃dɐ]'가 센고쿠 시대에 내항한 포르투갈인 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진 데서 비롯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2020년 1월 1일로써 국명으로 '홀란드'를 사용하지 않고 네덜란드 외무부도 여러 나라에 이 통칭을 변경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오란다'라는 호칭에 대해서는 일본어 단어로 정착했기 때문에 변경은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5. 행정구역[편집]
6. 자연환경[편집]
6.1. 지리[편집]
총 면적은 4만 1000km²이다. 북해에 면해 있는 국토는 레인 강, 마스강, 스헬더강 등이 만드는 삼각주를 중심으로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남서쪽은 구릉지대로 되어 있으나 림뷔르흐 주에 있는 이 나라 최고 지점조차도 321m에 지나지 않는, 전체적으로 평탄한 국토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네덜란드령 기아나'라는 이름을 가진 수리남은 물론 본국의 50여 배도 넘는 땅인 인도네시아도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에 포함되었다.
네덜란드 왕국의 대부분(98.5%)을 차지한다.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로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이다.
과거에는 '네덜란드령 기아나'라는 이름을 가진 수리남은 물론 본국의 50여 배도 넘는 땅인 인도네시아도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에 포함되었다.
네덜란드 왕국의 대부분(98.5%)을 차지한다.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로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이다.
6.2. 기후[편집]
네덜란드는 위도가 높은 곳에 있지만, 북부 지역은 북해의 난류와 편서풍의 영향을 받는 서안해양성 기후로 1년 내내 온화한 편이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는 작지만, 날씨는 변하기 쉽다. 그러나 남동부 지역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기후가 거칠고 기온차도 심하다.
7. 경제[편집]
상업과 교통의 발달로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부유한 나라로 성장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업과 교통은 네덜란드 경제를 주도하는 핵심 부문이다. 19세기에 북해와 라인 강을 직접 연결하는 수로가 완공된 이후, 로테르담 항구는 독일의 루르 공업 지대와 수로로 연결되어 크게 성장했다. 오늘날 로테르담 항구에는 하루 평균 100만 톤의 물자가 이동하고 있다. 20세기에 네덜란드는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식민지들을 잃었지만 여전히 경제 선진국으로 1인당 국내 총생산이 유럽 연합 회원국의 평균보다 높다. 또한 첨단 기계와 영농 기술 도입으로 농업 부문에서도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 한편 네덜란드는 복지정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0년대 전체 경제활동인구 중 14%인 80만 명이 실업자였고 장해연금과 조기퇴직 프로그램에 의해 노동 시장에서 제외된 근로자 수도 이와 같은 규모였다. 1986년 스웨덴의 사회학자 예란 테르보른은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실업상태를 더 오래 지속하는가?》를 통해 네덜란드의 고용 실패를 지적했다.[11]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네덜란드의 경기침체는 유난히 심각했다. 많은 경제 부분이 과잉 생산의 부작용을 겪었고 25개 제조업체 중 1개꼴로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만 3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없어진 일자리의 대부분이 제조업의 정규직 근로에서 발생했다. 실업자는 매달 1만 명씩 증가하여 1984년에는 80만 명까지 증가했고 노동조합들은 전체 노조원의 17%를 잃었으며 남은 노조원들 중 4분의 1이 복지 혜택의 수혜자가 되면서 노동없는 복지 상태에 이르렀다. 미취업자들에 대한 사회보장 혜택은 더 크게 감소했다. 광범위한 실업 상태에서 얻은 결론은 수익성을 높여야 한다는 범국가적 인식의 확산이었다.
우선 1982년 11월 24일 바세나르에서 세계시장의 변화에 대응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바세나르 협약이란 이름의 임금인상 억제 정책이 실시되었다. 빔 코크의 노동조합연맹과 크리스 판 베인의 경영자단체연합 사이에서 이뤄진 중앙협약에 의한 임금인상 억제 정책은 변화하는 해외 및 네덜란드 내 시장에서 심화되는 국제경쟁에서 네덜란드 경제를 적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 조합주의가 되살아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사회보장체제의 전반적인 재정비가 이뤄졌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임금수준과 복지혜택 사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능동적인 노동시장 정책이 채택되었으며 이러한 정책 변화는 정치적 지지를 얻었다.
1990년대 들어서 네덜란드는 1980년대 일관적인 임금인상 억제 정책, 사회의 안정화, 개혁정책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성공적으로 실업률을 반감시켰다고 평가받는다. 1983년 14%의 실업률을 1997년에는 6% 수준으로 내렸는데 이는 유럽 연합 평균인 11%의 실업률보다 낮은 수준이다. 미국과 같은 수준의 고용증가를 겪기도 했으나 미국처럼 급격한 빈부격차의 증가를 경험하진 않았다. 다만 이는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또한 새롭게 만들어진 일자리 중 다수가 비정규직이거나 시간제 근로였고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증가했으나 55세에서 64세 중장년층 남성 취업률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감소했다. 능력 위주의 직원 선발이 이뤄지면서 발생한 외국인과 미숙련근로자의 낮은 취업기회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15 청년 실업률은 가장 낮은 수준인 5.5%로 떨어졌으나 완전고용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시간제 근로에 의존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네덜란드에서 경제성장의 가장 큰 원천은 해외시장이다. 네덜란드의 재화, 용역의 수출입 규모는 1950년 국내총생산의 70.9%, 1970년 74.8%, 1994년 89.2%에 달했는데 영국의 41.8%, 독일의 39.3%, 프랑스의 34.2% 미국의 17.8%, 일본의 14.6%와 비교하면 높은 수치이다.
네덜란드에서 중공업 분야는 무역업과 제조업에 비해 다소 늦게 발달했다. 북해와 암스테르담을 연결해 주는 북해 운하의 입구에는 에이마위던이 있는데, 이곳에는 코크스 제조 공장과 네덜란드 최대의 제철, 제강 공장이 있다.
네덜란드는 천연자원이 풍족하지 않은 편이다. 림뷔르흐 주의 탄전은 1970년대에 이미 문을 닫았으나 북해 연안의 그로닝겐 지역에서 대규모 가스전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천연 가스가 매장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의 상당 부분은 수출된다. 석유도 생산되지만 천연가스에 비해 양이 적어 네덜란드 경제에 큰 기여는 하지 못한다. 헹겔로와 델프제일 근처에는 엄청난 양의 암염이 매장되어 있는데, 일부는 산업용으로 국내에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수출된다.
네덜란드의 농업은 최첨단 기술과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농업 인구는 감소하고 있으나, 경영 규모가 커져서 생산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국토의 4분의 1정도가 농지로 이용되는데, 이중 약 30%가 목초지이다. 네덜란드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약 3분의 2는 세계 각국으로 수출된다. 또한 겨울철 날씨가 온화하고 토양이 기름진 네덜란드는 원예 농업이 발달했다. 수천 개의 온실에서는 토마토, 오이, 피망 같은 채소가 첨단 시설로 재배되고 있다. 헤이그와 뫼즈 강 하구 사이, 델프트 주변과 로테르담 북부에는 유리 온실이 줄지어 있다.
축산업도 네덜란드 경제에 큰 역할을 한다. 자동화된 대규모 농장에서 젖소, 돼지, 닭, 오리 등을 대량 사육하고 있고 유제품 관련 산업도 잘 발달했다. 하우다, 에담, 레르담과 같은 도시는 치즈 생산지로 유명하며, 이 지역에서 생산된 치즈는 도시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4월에서 9월까지 알크마르에서는 금요일 아침마다 전통 치즈 시장이 열린다. 전통 치즈 시장에서는 커다란 치즈 경매가 진행되고 관광객들은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알크마르를 찾는다.
2009년 5월 10일 유로스타트는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근로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라고 발표했다.
1980년대 전체 경제활동인구 중 14%인 80만 명이 실업자였고 장해연금과 조기퇴직 프로그램에 의해 노동 시장에서 제외된 근로자 수도 이와 같은 규모였다. 1986년 스웨덴의 사회학자 예란 테르보른은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실업상태를 더 오래 지속하는가?》를 통해 네덜란드의 고용 실패를 지적했다.[11]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네덜란드의 경기침체는 유난히 심각했다. 많은 경제 부분이 과잉 생산의 부작용을 겪었고 25개 제조업체 중 1개꼴로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만 3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없어진 일자리의 대부분이 제조업의 정규직 근로에서 발생했다. 실업자는 매달 1만 명씩 증가하여 1984년에는 80만 명까지 증가했고 노동조합들은 전체 노조원의 17%를 잃었으며 남은 노조원들 중 4분의 1이 복지 혜택의 수혜자가 되면서 노동없는 복지 상태에 이르렀다. 미취업자들에 대한 사회보장 혜택은 더 크게 감소했다. 광범위한 실업 상태에서 얻은 결론은 수익성을 높여야 한다는 범국가적 인식의 확산이었다.
우선 1982년 11월 24일 바세나르에서 세계시장의 변화에 대응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바세나르 협약이란 이름의 임금인상 억제 정책이 실시되었다. 빔 코크의 노동조합연맹과 크리스 판 베인의 경영자단체연합 사이에서 이뤄진 중앙협약에 의한 임금인상 억제 정책은 변화하는 해외 및 네덜란드 내 시장에서 심화되는 국제경쟁에서 네덜란드 경제를 적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 조합주의가 되살아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사회보장체제의 전반적인 재정비가 이뤄졌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임금수준과 복지혜택 사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능동적인 노동시장 정책이 채택되었으며 이러한 정책 변화는 정치적 지지를 얻었다.
1990년대 들어서 네덜란드는 1980년대 일관적인 임금인상 억제 정책, 사회의 안정화, 개혁정책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성공적으로 실업률을 반감시켰다고 평가받는다. 1983년 14%의 실업률을 1997년에는 6% 수준으로 내렸는데 이는 유럽 연합 평균인 11%의 실업률보다 낮은 수준이다. 미국과 같은 수준의 고용증가를 겪기도 했으나 미국처럼 급격한 빈부격차의 증가를 경험하진 않았다. 다만 이는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또한 새롭게 만들어진 일자리 중 다수가 비정규직이거나 시간제 근로였고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증가했으나 55세에서 64세 중장년층 남성 취업률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감소했다. 능력 위주의 직원 선발이 이뤄지면서 발생한 외국인과 미숙련근로자의 낮은 취업기회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15 청년 실업률은 가장 낮은 수준인 5.5%로 떨어졌으나 완전고용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시간제 근로에 의존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네덜란드에서 경제성장의 가장 큰 원천은 해외시장이다. 네덜란드의 재화, 용역의 수출입 규모는 1950년 국내총생산의 70.9%, 1970년 74.8%, 1994년 89.2%에 달했는데 영국의 41.8%, 독일의 39.3%, 프랑스의 34.2% 미국의 17.8%, 일본의 14.6%와 비교하면 높은 수치이다.
네덜란드에서 중공업 분야는 무역업과 제조업에 비해 다소 늦게 발달했다. 북해와 암스테르담을 연결해 주는 북해 운하의 입구에는 에이마위던이 있는데, 이곳에는 코크스 제조 공장과 네덜란드 최대의 제철, 제강 공장이 있다.
네덜란드는 천연자원이 풍족하지 않은 편이다. 림뷔르흐 주의 탄전은 1970년대에 이미 문을 닫았으나 북해 연안의 그로닝겐 지역에서 대규모 가스전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천연 가스가 매장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의 상당 부분은 수출된다. 석유도 생산되지만 천연가스에 비해 양이 적어 네덜란드 경제에 큰 기여는 하지 못한다. 헹겔로와 델프제일 근처에는 엄청난 양의 암염이 매장되어 있는데, 일부는 산업용으로 국내에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수출된다.
네덜란드의 농업은 최첨단 기술과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농업 인구는 감소하고 있으나, 경영 규모가 커져서 생산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국토의 4분의 1정도가 농지로 이용되는데, 이중 약 30%가 목초지이다. 네덜란드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약 3분의 2는 세계 각국으로 수출된다. 또한 겨울철 날씨가 온화하고 토양이 기름진 네덜란드는 원예 농업이 발달했다. 수천 개의 온실에서는 토마토, 오이, 피망 같은 채소가 첨단 시설로 재배되고 있다. 헤이그와 뫼즈 강 하구 사이, 델프트 주변과 로테르담 북부에는 유리 온실이 줄지어 있다.
축산업도 네덜란드 경제에 큰 역할을 한다. 자동화된 대규모 농장에서 젖소, 돼지, 닭, 오리 등을 대량 사육하고 있고 유제품 관련 산업도 잘 발달했다. 하우다, 에담, 레르담과 같은 도시는 치즈 생산지로 유명하며, 이 지역에서 생산된 치즈는 도시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4월에서 9월까지 알크마르에서는 금요일 아침마다 전통 치즈 시장이 열린다. 전통 치즈 시장에서는 커다란 치즈 경매가 진행되고 관광객들은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알크마르를 찾는다.
2009년 5월 10일 유로스타트는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근로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라고 발표했다.
8. 문화[편집]
8.1. 종교[편집]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갖고 있는 개혁교회국가였기 때문에, 메노나이트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망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에는 세속화로 인해 개혁교회 신자가 크게 감소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남부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다. 이외에도 옛 동인도 식민지에서 온 이민자들에 의해 힌두교도들도 있고, 소수이지만 유대교 신자도 존재한다. 이슬람교 신자도 있으나 박해의 대상이 된다.
8.2. 성문화[편집]
네덜란드는 개방적이고 좌파적인 국가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경우로 네덜란드는 유럽 국가 최초로 1993년 동성 결혼을 합법으로 인정하였으며 2001년 4월 1일을 시작으로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과 이혼을 허용하는 법이 시행되었다.
8.3. 스포츠[편집]
→ 자세한 내용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오렌지 군단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유럽에서도 강팀에 속한다. FIFA 월드컵에서 1974년과 1978년, 2010년에 결승전에 오를 정도로 축구 강국이지만 아직 우승은 하지 못했다. UEFA 유로 1988 우승이 유일한 메이저 대회 우승이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명감독 리누스 미헬스와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인 요한 크루이프로 대표되는 토탈 풋볼은 현대 축구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된다.
자국 축구 리그인 에레디비시 역시 유럽에서도 상당히 수준 높은 리그이다. 90년대에는 빅 4에 이은 유럽 리그 5, 6위권으로 알아주던 시절도 있었다. 대표적인 축구 클럽인 AFC 아약스만 해도 1970-1971 유러피언 컵에서 처음으로 우승하더니 급기야 3년 내내 우승했다. 이 시기 동안 아약스가 무찌른 클럽들은 레알 마드리드 CF, 아스날 FC,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유벤투스 FC, SL 벤피카, 파나시나이코스 FC, AC 밀란. 한마디로 당대 유럽에서 최정상을 다투던 클럽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완벽한 압승으로 우승을 거두었으니 AFC 아약스가 던져 준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역시 에레디비시 소속인 PSV 에인트호번도 거스 히딩크 감독 체제에서 유러피언 컵 우승을 거두었고 많은 축구 스타들을 발굴해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로는 옛 명성과 많이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 2004-05 시즌 에인트호번이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25]한 이후 에레디비시 클럽이 8강 이상을 올라간 적이 없어 사실상 몰락했다는 소리를 듣고 있고, 리그 랭킹도 떨어져 챔스 직행 티켓 1장을 배분받지 못하고 1위팀조차도 플레이오프로 챔스에 진출해야 한다. 그래도 2018-19 시즌에는 AFC 아약스가 레알 마드리드 CF, 유벤투스 FC를 차례로 꺾고 4강에 진출했다.
주요 선수로는 루드 굴리트, 마르코 반 바스텐, 프랑크 레이카르트, 요한 크루이프, 요한 네스켄스, 뤼트 판니스텔로이, 뤼트 크롤, 로날트 쿠만, 로빈 반 페르시, 아르연 로번, 웨슬리 스네이더, 버질 반 다이크, 에드윈 반 데 사르, 데니스 베르캄프 등이 있다.
9. 정치[편집]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현재의 군주는 빌럼알렉산더르 국왕이다.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네덜란드 의회는 상원과 하원이 있는 양원제로 임기는 각각 4년이다. 행정부 장관은 총리에 의해 지명되며 14개의 행정부서가 있다. 현재의 총리는 딕 스호프이다. 최고법원과 5개의 고등법원에 각 지방법원과 간이법원이 속해해 사법권을 행사한다. 법관은 최고법원과 법무장관의 추천으로 국왕이 임명한다. 헌법재판소는 없으며 법률의 합헌 여부는 특별 법정에서 가린다.
10.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