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독일국 Deutsches Reich 독일 제국 Deutsches Kaiserreich | ||
국기 | 국장 | |
1871년 1월 18일 ~ 1918년 11월 9일 (47년 9개월 22일) | ||
국가명 | 독일국 | |
성립일 | 1871년 1월 18일 | |
해체일 | 1918년 11월 9일 | |
수도 | 베를린 | |
언어 | 독일어 | |
인구 | 64,925,993명 (1910년 기준) | |
면적 | 540,857.54km² (1910년 기준) | |
종교 | 루터교 60% 로마 가톨릭교회 40% | |
상징 | ||
국가 | 라인강의 수비 Die wacht am Rhein | |
표어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Gott mit uns | |
정치 | ||
정치 체제 | ||
황제 | 빌헬름 2세 (마지막 황제) | |
총리 | 막시밀리안 폰 바덴 (마지막 총리) | |
경제 | ||
화폐 | 골트마르크 (1873~1914) 파피어마르크 (1914~1918) | |
1. 개요[편집]
독일 제국은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중부 유럽에 존재했던 제국이다.
2. 상세[편집]
3. 역사[편집]
1870년에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 주도하의 북독일연방이 승리하면서 독일의 통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파리 외곽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공식적으로 독일 제국이 출범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오스트리아 및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모든 독일계 국가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호엔촐레른가의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독일 황제의 칭호를 받게 되었고, 프로이센 총리였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 총리가 되었다.
독일 제국은 연방의 형태로서 4개의 왕국, 6개의 대공국, 5개의 공국, 7개의 후국, 3개의 자유시 및 "엘자스-로트링겐 제국령"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프로이센 왕국이 제국 면적의 3/5를, 인구의 2/3을 차지하고 있었고 헌법상으로도 프로이센 국왕이 곧 독일 황제였기 때문에 연방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프로이센 왕국의 영향권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1850년 이후로 독일 제국은 석탄, 철강, 화학, 철도 분야에서 특히 강세를 보이며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독일인들이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이루어낸 업적들은 매우 대단했는데 전체 노벨상의 1/3이 이 시기의 독일인들에게 돌아갔을 정도였다. 47년 동안 독일 제국은 당대의 산업, 기술, 과학 강국이었고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었으며, 유럽에서 가장 세밀하고 긴 철도망, 세계 최강의 군대, 급성장하는 산업 기반으로 단숨에 유럽 대륙의 강대국으로 등극하였다.
1871년부터 1890년까지 총리로 취임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재임 초기에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점점 더 보수적인 정책을 시도하였다. 그가 실시한 여러 개혁, 반 가톨릭 성향의 문화투쟁, 폴란드인의 독일 동화 정책 등은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노령 연금, 상해 보험, 의료 보험, 실업 보험 등의 사회복지 정책은 오늘날까지도 유럽 복지국가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비스마르크의 재임 후반기에, 독일 제국은 그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세계를 휩쓸던 식민제국주의의 광풍에 편승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쟁탈전에 참여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3번째로 거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으며, 다른 유럽 열강들과 충돌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늘려나가려 애썼다. 이 시기에 독일은 남서아프리카에서 대량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189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사임하고 새롭게 빌헬름 2세가 즉위하였다. 열렬한 제국주의자였던 그는 공격적인 외교, 해외 식민지 획득, 건함 경쟁을 통해서 독일을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애써 구축하고 유지해놓았던 유럽의 균형은 그의 후임 총리들과 빌헬름 2세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전까지 독일에게 유화적이었거나, 최소한 중립을 유지하던 유럽 국가들도 점차 등을 돌렸다. 그러자 독일 제국은 같은 게르만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1879년에 동맹을 맺었고, 1882년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오스만 제국과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1914년 7월부터 유럽 정세가 급격하게 불안해지자, 이탈리아는 동맹을 파기했고 독일은 그 자리를 오스만으로 대신하기로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독일 제국은 슐리펜 계획에 따른 단기 결전만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이 작전의 주요 골자는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 북부로 진입하여 신속하게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이론상으로는 동쪽의 러시아 제국이 군대를 동원하기 전에 프랑스 정부를 붕괴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서부 전선은 참호전의 수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동부 전선에서 독일은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두었으며, 나중에 러시아 제정이 붕괴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발트해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이르는 영토를 점령했다.
몇년 동안 전황은 교착 상태로 흘러갔지만,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인해 식량과 물자가 부족해지자 점차 독일이 불리해졌다. 1917년 초 독일은 해상 봉쇄에 대응하여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도했으나 이는 실패했고 오히려 미국이 참전하는 결과만 불러왔다. 1918년 10월, 독일의 마지막 노력이었던 춘계 공세도 실패로 돌아간 상태에서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불가리아가 항복하자 사기는 더더욱 떨어졌다. 결국 1918년 11월에 혁명이 일어나고 빌헬름 2세가 퇴위함에 따라 제정이 붕괴되었다. 이후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 지불로 인해 일어난 초인플레이션과 미국발 대공황으로 인해 황폐해진 경제 상태, 그리고 패전으로 인해 독일 국민들이 겪은 굴욕과 분노는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독일 제국은 연방의 형태로서 4개의 왕국, 6개의 대공국, 5개의 공국, 7개의 후국, 3개의 자유시 및 "엘자스-로트링겐 제국령"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프로이센 왕국이 제국 면적의 3/5를, 인구의 2/3을 차지하고 있었고 헌법상으로도 프로이센 국왕이 곧 독일 황제였기 때문에 연방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프로이센 왕국의 영향권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1850년 이후로 독일 제국은 석탄, 철강, 화학, 철도 분야에서 특히 강세를 보이며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독일인들이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이루어낸 업적들은 매우 대단했는데 전체 노벨상의 1/3이 이 시기의 독일인들에게 돌아갔을 정도였다. 47년 동안 독일 제국은 당대의 산업, 기술, 과학 강국이었고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었으며, 유럽에서 가장 세밀하고 긴 철도망, 세계 최강의 군대, 급성장하는 산업 기반으로 단숨에 유럽 대륙의 강대국으로 등극하였다.
1871년부터 1890년까지 총리로 취임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재임 초기에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점점 더 보수적인 정책을 시도하였다. 그가 실시한 여러 개혁, 반 가톨릭 성향의 문화투쟁, 폴란드인의 독일 동화 정책 등은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노령 연금, 상해 보험, 의료 보험, 실업 보험 등의 사회복지 정책은 오늘날까지도 유럽 복지국가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비스마르크의 재임 후반기에, 독일 제국은 그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세계를 휩쓸던 식민제국주의의 광풍에 편승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쟁탈전에 참여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3번째로 거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으며, 다른 유럽 열강들과 충돌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늘려나가려 애썼다. 이 시기에 독일은 남서아프리카에서 대량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189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사임하고 새롭게 빌헬름 2세가 즉위하였다. 열렬한 제국주의자였던 그는 공격적인 외교, 해외 식민지 획득, 건함 경쟁을 통해서 독일을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애써 구축하고 유지해놓았던 유럽의 균형은 그의 후임 총리들과 빌헬름 2세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전까지 독일에게 유화적이었거나, 최소한 중립을 유지하던 유럽 국가들도 점차 등을 돌렸다. 그러자 독일 제국은 같은 게르만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1879년에 동맹을 맺었고, 1882년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오스만 제국과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1914년 7월부터 유럽 정세가 급격하게 불안해지자, 이탈리아는 동맹을 파기했고 독일은 그 자리를 오스만으로 대신하기로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독일 제국은 슐리펜 계획에 따른 단기 결전만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이 작전의 주요 골자는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 북부로 진입하여 신속하게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이론상으로는 동쪽의 러시아 제국이 군대를 동원하기 전에 프랑스 정부를 붕괴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서부 전선은 참호전의 수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동부 전선에서 독일은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두었으며, 나중에 러시아 제정이 붕괴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발트해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이르는 영토를 점령했다.
몇년 동안 전황은 교착 상태로 흘러갔지만,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인해 식량과 물자가 부족해지자 점차 독일이 불리해졌다. 1917년 초 독일은 해상 봉쇄에 대응하여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도했으나 이는 실패했고 오히려 미국이 참전하는 결과만 불러왔다. 1918년 10월, 독일의 마지막 노력이었던 춘계 공세도 실패로 돌아간 상태에서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불가리아가 항복하자 사기는 더더욱 떨어졌다. 결국 1918년 11월에 혁명이 일어나고 빌헬름 2세가 퇴위함에 따라 제정이 붕괴되었다. 이후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 지불로 인해 일어난 초인플레이션과 미국발 대공황으로 인해 황폐해진 경제 상태, 그리고 패전으로 인해 독일 국민들이 겪은 굴욕과 분노는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4. 정치[편집]
독일제국의 정치형태는 4왕국·6대공국·5공국·7후국 및 3자유시로 구성된 연방국가였다. 프로이센왕이 황제가 되고, 프로이센 재상이 제국의 재상을 겸임하였다. 황제는 정치권·군사권·외교권 등을 장악하였고, 의회는 상원의원인 연방참의원과 남성중심으로 보통선거에 의한 제국의회가 하원으로 구성되었으나, 하원의회의 권한은 예산심의권을 가지고 있는 것 정도일뿐 권한은 적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18년의 10월 헌법 개혁 이후, 제국 수상은 제15조 개정을 통해 황제가 아닌 제국 의회의 신임을 받으며 내각책임제로 전환되었다.
반면, 각 지방 정부를 대표하는 연방참의원이 상원의 경우는 제국의 중대한 사안에 대해 이곳에서 여러 문제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각 지방 정부들은 각각 종래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또 행정권도 거의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방정부 형태를 띠었다.
독일 제국의 정부는 황제의 임명과 뜻대로 되었고,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연방국가 형태로 구성된 지방세력들 중 프로이센은 면적과 인구에서 전 독일의 3/5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독일제국은 황제가 직접 지배하는 형태로 그 권한은 막강했다.
또 독일 제국에서는 황제 못지않게 재상의 권한이 컸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같은 유력한 인물이 재상인 때에는 사실상 그의 독재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통일의 의지가 상실되었다.
이처럼 독일제국은 의회가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자유주의적인 성향도 아닌 융커계층, 즉 대지주 혹은 귀족이 군부와 관료의 중심세력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식과 개혁은 크게 저해되었다.
반면, 각 지방 정부를 대표하는 연방참의원이 상원의 경우는 제국의 중대한 사안에 대해 이곳에서 여러 문제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각 지방 정부들은 각각 종래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또 행정권도 거의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방정부 형태를 띠었다.
독일 제국의 정부는 황제의 임명과 뜻대로 되었고,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연방국가 형태로 구성된 지방세력들 중 프로이센은 면적과 인구에서 전 독일의 3/5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독일제국은 황제가 직접 지배하는 형태로 그 권한은 막강했다.
또 독일 제국에서는 황제 못지않게 재상의 권한이 컸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같은 유력한 인물이 재상인 때에는 사실상 그의 독재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통일의 의지가 상실되었다.
이처럼 독일제국은 의회가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자유주의적인 성향도 아닌 융커계층, 즉 대지주 혹은 귀족이 군부와 관료의 중심세력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식과 개혁은 크게 저해되었다.
5. 경제[편집]
1862년에 프로이센 재상으로 오른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을 바탕으로 중공업 육성과 군사력 증강 등 국력이 강해지면서 이후 1871년 통일된 독일제국은 기존의 봉건적인 토지귀족 계층이자 보수층인 융커계층 관료들의 후원과 기반으로 1870년대부터 생산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나, 보수층인 융커계층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산업화 정책은 시장의 규모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경제불황을 맞기도 하였다. 독일제국은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해, 우수한 기술과 자국의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뿐만 아닌 자본을 투자할 해외 식민지를 필요로하여 제국주의의 길로 발을 내밀게 된다. 그러나, 대영 제국, 프랑스 식민 제국에 비해 늦게 식민지 정책을 시작하였기에 1890년대 빌헬름 2세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20세기 초에는 중공업생산에서 세계 제2위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해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전반적으로 독일의 산업화는 경제시장의 변화에 대응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그것을 선도하는 능동적인 자세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결과 독일 사회는 한편으로는 보수층인 융커층 및 그들을 후원하는 자본가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무산층)의 노동자세력으로 양분되어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을 야기했다. 이러한 사회적 대립은 장기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했다.
20세기 초에는 중공업생산에서 세계 제2위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해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전반적으로 독일의 산업화는 경제시장의 변화에 대응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그것을 선도하는 능동적인 자세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결과 독일 사회는 한편으로는 보수층인 융커층 및 그들을 후원하는 자본가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무산층)의 노동자세력으로 양분되어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을 야기했다. 이러한 사회적 대립은 장기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했다.
6. 역대 황제[편집]
대수 | 이름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1 | 빌헬름 1세 | 1871. 01. 18. | 1888. 03. 09. |
2 | 프리드리히 3세 | 1888. 03. 09. | 1888. 06. 15. |
3 | 빌헬름 2세 | 1888. 06. 15. | 1918. 11. 09. |
7.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