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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의도
2.1. 예시
3. 마스코트
똥씨드위키
DDong Seed Wiki
개설 일자
2021년 10월 05일
대표색
똥색 (#654321)
언어
한국어
위키 엔진
the seed
라이선스
CC BY-SA 4.0
창립자
회장
부회장
사이트

1. 개요[편집]

hswmangi의 가상의 위키이다.

재미있게 생각하세요!

2. 의도[편집]

여러분의 유머감각을 살리세요!
똥씨드위키
(풉씨드위키)poopseedwiki
다양한 생각도 [1]떠오르는 똥씨드 위키!
(Pop-seed wiki)

2.1. 예시[편집]

똥씨드위키== 똥으로 만들어진 씨앗. 이것을 심으면 똥키위가 생긴다.
우리 망고님들의 댓글
↵hswmango님- 끼악 넘 더러웡~~
↵hswmangi님- 꺄~~~~~ 끔찍해요! 전 앞으로 똥씨드 키위 안먹습니다!!! 더시드키위만 먹을거예요!!!
↵rolinmango님- 어머어머, 요즘 세상이 왜이리 똥개같아!!!
저의 추천, 유튜브에서 잡초 브롤 거꾸로,또는 youtube June을 검색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망고님들 넘넘 고마워요~~~~

3. 마스코트[편집]

똥똥이
;;아무이유 없다 카더라
정약용의 업적
정약용(1762 ~ 1836)
호 : 다산, 여유당

조선 후기 일부 학자들은 당시의 학문이 실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실 문제에 적극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등장한 학문이 실학입니다. 실학자들은 농업과 상공업을 중시하는 학자,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 등이 있었고, 각 분야에 다양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실학자 정약용은 오랜 유배 생활 중에도 다산초당에 살면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5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습니다.
나라를 바로잡기 위하여 토지 제도를 바꾸고 인재를 고르게 활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경세유표, 지방의 관리가 지켜야 할 내용을 담은 목민심서 등의 책을 썼습니다.


경세유표
  • 국가기구 전반의 개혁 원리를 밝힌 책
  • 조선 후기 혼란한 상황을 바로잡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서경과 주례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여 조선 후기 제도에 대한 개혁안을 담고 있습니다.

흠흠신서
  • 30권 10책.
  • 형법 연구서이자 재판 지침서
목민심서
  • 48권 16책의 필사본
  • 수령 업무 지침서(수령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과 규범들을 다룬 책)


목민심서 ->



1777년(정조 1)
이익의 유고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학문을 따름

1789년(정조 13)
과거에 급제하여 초계문신에 발탁
□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장하려 할 때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설계함

1792년(정조 16)
□ 정조의 명으로 거중기를 설계하여 수원 화성 축조에 기여. 거중기는 공사 효율을 높이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정약용은 백성을 위한 정치뿐만 아니라 과학기술과 건축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관직에 있을 때 우리나라와 중국의 성을 연구하여 수원 화성을 설계하였고, 거중기를 고안하여 수원화성을 건설하는 데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을 절약하였습니다.


화성성역의궤 거중기 ->


거중기 복원 모형(수원 화성 박물관)
도르래의 원리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장치


1794년(정조 18)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고 경기도 암행어사를 역임

1797년(정조 21)
□ 마과회통 저술
마과회통: 홍역(마진) 치료에 관한 의학서
마과회통 ->




정약용의

토지 개혁론인

여전론과 정전론

조선 후기에는 토지가 일부 계층에게 편중되면서 경작지를 소유하지 못하는 농민들이 증가하였습니다. 이에 정약용은 토지 소유를 재편하여 농민들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적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량을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여전론(1799)을 제시하였습니다. 아울러 정약용은 여전제보다 실현 가능한 개혁 방안으로 정전론(1817)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 정전론 : 개별 경작과 조세 납부용 공동경작을 절충한 제도

1800(정조 24) 정조 승하
1801(순조 2)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박해로 형 정약종 등 주변 인물 죽음을 당함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어 유배생활(~1818) 시작. 이때 나이 40세


다산초당(출처 - 경기문화재단)
다산초당은 정약용 학문의 산실이었으며
이곳에서 '목민심서'·'경세유표' 등
수많은 책들을 저술하였습니다.

1808(순조 8)
□ 역학의 저술에 매진하여 주역 사전을 지음
1811(순조 11)
□ 아방강역고(우리나라 역대 강역에 관한 역사지리서) 저술

1812(순조 12)
□ <민보의>를 쓰다

민보의 : 조선 후기 병서로 홍경래의 난을 겪으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 백성의 힘으로 보를 구축하여 대비하는 내용을 밝힌 책

민보의(출처 - e 뮤지엄)

1813(순조 13)

□ ‘논어고금주(논어의 주석)’ 저술

1818(순조 18)

유배생활 19년 만인
57세의 나이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 옴

1822(순조 22)
□ 스스로 자신의 묘지명 〔자찬묘지명〕 지음


1834(순조 34)
'상서고훈(서경 해설서)' 저술


1836(헌종 2)

75세를 일기로 별세


정약용(1762 ~ 1836) 여전론, 정전론, 향촌 단위 방위 체제와 민본적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또한, 영농 기술 개발 등 과학 기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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