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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년기3. 학창 시절4. 군 복무5. 인권변호사 활동6. 문서 출처

1. 개요[편집]

문재인의 생애를 다룬 문서이다.

2. 유년기[편집]

문재인은 1952년 1월 24일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면 명진리 694-1번지에서 아버지 문용형(文龍炯)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한옥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용형은 함경남도 흥남의 남평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으로 함흥농고 졸업 후 일제시대 흥남읍사무소에서 농업계 계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한국 전쟁 발발 후 1950년 12월 23일에 흥남 철수 작전 무렵에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가족과 함께 탑승했다. 문용형은 거제에 정착한 후 공무원 경력을 제시하며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노무자로 일자리를 얻었고 그의 부인은 계란 행상을 했다. 이후 문씨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했다. 문재인은 남항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극심한 가난 때문에 학교 바로 위의 '신선성당'에서 양동이를 들고 줄을 서서 정기적으로 배급을 타먹어야 했다고 말했다. 문재인은 천주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았다.

3. 학창 시절[편집]

1965년에 남항초등학교를 졸업한 문재인은 경남중학교에 입학했고, 1968년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경남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했다. 고교 시절 초기에는 학내에서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말기에는 극도로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 낙망, 술·담배에도 손을 대며 방황을 하다 끝내 대학 입시에 실패하였다. 문재인은 졸업 후 1971년 종로학원 진입 시험에서 일등을 하며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하였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서울에서 계속 재수 생활을 이어갈 만큼의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이후 경희대학교 설립자이자 당시 경희대 총장이었던 조영식이 문재인에게 '4년 전액 장학금'을 약속하며 경희대 입학을 권유하였고, 문재인은 그 권유를 받아들여 1972년 경희대학교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고 알려졌으나, 이런 일화의 사실관계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의혹도 존재한다. 문재인은 경희대학교 법대 시절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예비 검속에 걸린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집회를 주도하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그 해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도 제적당했다.

4. 군 복무[편집]

출소 후 신체검사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로 군에 징집된 문재인은 1975년 8월 육군에 입대하였고 대한민국 39향토보병사단 신병훈련소를 거쳐 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 제3특전대대 대대본부 작전과에서 복무했다. 문재인은 특수 훈련에서의 우수한 평가 결과로 인해 특전사 복무 중 당시 특전사령관 정병주와 공수여단장 전두환으로부터 두 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5. 인권변호사 활동[편집]

전역 후에는 경희대학교에 복학해 1980년 복학생 대표로 신군부 세력에 항거하다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하루 전에 시행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시행 당일 밤 형사들에게 권총이 겨누어진 채로 긴급 체포되었고 바로 청량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풀려난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동기였던 박원순, 고승덕, 조영래 사이에서 1등을 했으나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성적이 차석으로 밀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검증되지 않았다는 의혹도 존재한다. 사법연수원에서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도 수상했다고 알려졌으나, 희망하던 판사 임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문재인은 몇몇 로펌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변호사 노무현을 만나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 생활을 했다. 또한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합동 변호사 사무소에서 노무현과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30년 가까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하여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부산변호사협회 인권 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 변호사로 일했으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동의대학교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론했다. 그는 1996년 8월 발생한 페스카마호 사건에서 조선족 선원들의 변호를 맡았다.

1988년에는 김영삼으로부터 노무현, 김광일과 함께 국회의원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문재인은 3명 중 유일하게 정치입문을 거절했으며, 정계입문을 결심한 노무현과 김광일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계진출을 거절한 문재인은 이 후 1990년대부터 2002년까지 부산 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여러 시국, 노동 관련 사건들을 맡으며 활발히 활동했다. 1990년에는 '낙동강변 살인사건'으로 불리는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의 피고인을 변호하였고 당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사건 31년 후인 2021년 검찰의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 사실이 인정되어 피고인 전원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 외에도 동의대학교 사건에서도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을 진두지휘했으며 2002년에는 1980년 가족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5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신귀영 씨의 재심에 변호인단으로 참여하기도 했다.[26] 1995년 문재인은 노무현과 함께 운영했던 기존의 합동 사무소를 '법무법인 부산' 으로 개칭하고 대표 변호사로 이름을 올렸다.

2002년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새천년민주당 부산 선대위원장직을 맡아 노무현의 당선에 기여했다. 문재인은 노무현의 당선 이후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려 했으나, 당선 직후 노무현의 민정수석비서관 제의를 받고 "정치하라고 하지 마라, 그리고 민정수석으로 끝내겠다"는 2가지 조건을 내걸고 민정수석비서관직을 수락하였다.

6. 문서 출처[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내용은 위키백과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