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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박근혜의 생애를 다룬 문서이다.
2. 출생과 초기 활동[편집]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에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1가 5-1번지에서 전시(戰時)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그의 부인 육영수의 딸로 태어났다. 현재 이 삼덕동 1가에는 돈부리집이 있는 상가가 위치해 있다. 어머니 육영수에게는 첫 소생이었으나 아버지 박정희는 이혼 경력과 전처소생의 장녀 박재옥이 있었으므로 박정희에게는 차녀가 된다. 형제로는 이복언니 박재옥이 있고 동복동생인 여동생 박근령과 남동생 박지만이 있다.
아버지 박정희는 1917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공립보통학교(현재의 구미초등학교), 대구사범학교(현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서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재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하여 재직 중이였다.
어머니 육영수는 충청북도 옥천군의 대지주인 육종관과 부인 이경령의 차녀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의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재의 옥천여자중학교)에서 가정과 교사로 1년 반 동안 봉직한 경력이 있었다. 외조부 육종관은 딸이 과거 혼인 경력이 의심스럽고 가난한 군인에 불과한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박정희와의 결혼 결심을 굳힌 육영수가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와 함께 박정희가 있는 대구로 가서 결혼식을 강행하였다.
박정희는 소령이던 1949년, 여순 사건에 따른 숙군 여파로 육군 특무대(현재의 국군기무사령부)의 가혹한 고문끝에 남조선로동당 가입 혐의로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파면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직제에도 없는 문관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인해 가까스로 복직하고 대구사범학교 후배이자 부하 장교인 송재천(육영수의 이재종오빠)의 소개로 만난 육영수와의 재혼에 따른 안정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박근혜가 태어난 무렵이다. 한국 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군인인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시,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박정희는 1917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공립보통학교(현재의 구미초등학교), 대구사범학교(현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서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재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하여 재직 중이였다.
어머니 육영수는 충청북도 옥천군의 대지주인 육종관과 부인 이경령의 차녀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의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재의 옥천여자중학교)에서 가정과 교사로 1년 반 동안 봉직한 경력이 있었다. 외조부 육종관은 딸이 과거 혼인 경력이 의심스럽고 가난한 군인에 불과한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박정희와의 결혼 결심을 굳힌 육영수가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와 함께 박정희가 있는 대구로 가서 결혼식을 강행하였다.
박정희는 소령이던 1949년, 여순 사건에 따른 숙군 여파로 육군 특무대(현재의 국군기무사령부)의 가혹한 고문끝에 남조선로동당 가입 혐의로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파면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직제에도 없는 문관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인해 가까스로 복직하고 대구사범학교 후배이자 부하 장교인 송재천(육영수의 이재종오빠)의 소개로 만난 육영수와의 재혼에 따른 안정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박근혜가 태어난 무렵이다. 한국 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군인인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시,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2.1. 학창 시절[편집]
서울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64년 2월 졸업하였으며, 정몽준 전 국회의원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 뒤, 카톨릭계 미션스쿨인 성심여자중학교를 거쳐 성심여자고등학교로 진학하였으며, 1970년 서강대학교 이공대학 전자공학과에 진학하여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물리학을 부전공하여 1974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봄 프랑스 유학을 떠나 그르노블 대학교의 어학연수과정에 입학하였다.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공부한 프랑스어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고, 수료 후 전자공학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박근혜는 훗날 유학 동기에 대해 측근에게 "교수가 되려고 유학을 갔다"고 개략적으로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3. 청소년기[편집]
3.1. 어머니 육영수 사망[편집]
프랑스 유학 중이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 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재일 한국인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하자 급거 귀국하였다. 육영수 사후 아버지 박정희는 재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배우자 역할을 대행하여야 했다. 1975년부터 박정희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최태민이 그의 새마을 사업에 참여한 것이 후일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박근혜는 의전상의 대통령 배우자 권한대행으로서 아버지 박정희의 공식 행사와 해외 순방 등을 수행하였고 육영수 저격 사건 이듬해에 만들어진 육영수여사추모기념사업회 이사가 되었다.
3.2. 박정희 피격[편집]
3.3. 육영재단 운영권 분쟁[편집]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1년 뒤인 1990년 9월 근화보는 1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고,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근령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는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 박근혜의 여동생과 남동생인 박근령과 박지만은 최태민이 언니인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하여 달라며,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최태민은 1994년 사망하였으며, 이후 박근혜는 언론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라며 두둔하였다. 이에 논객인 조갑제는 '박대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박근혜의 여동생과 남동생인 박근령과 박지만은 최태민이 언니인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하여 달라며,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최태민은 1994년 사망하였으며, 이후 박근혜는 언론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라며 두둔하였다. 이에 논객인 조갑제는 '박대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라고 말하였다.
4. 정치 활동[편집]
박근혜는 1997년 12월 2일 사촌 오빠 박재홍의 소개로 한나라당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이회창과 만났다. 이후 1997년 12월 10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참고로 당시 남동생 박지만과 박근령은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15대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하면서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었다. 그 후 이회창의 권유로 1998년 4월 2일 한나라당의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미혼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등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출신 성분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 진영 및 영남,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인 충청 지역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 후 박근혜는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될 때까지 내리 4선을 달서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2000년 한나라당의 부총재로 선출되어 2001년까지 활동하였으나, 2002년 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였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였다. 2002년 5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5월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고 5월 14일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
창당 초기에 받았던 높은 관심과 달리 2002년 제3회 지방선거에서 광역의원 2명을 배출하는 초라한 성적표를 냈다. 한나라당은 지선 이후 박근혜에게 복당을 요청했지만, 박근혜는 복당을 거절하였다. 이 후 제16대 대통령 선거 시즌이 다가오며 박근혜는 독자 출마를 모색하였는데, 당시 한일월드컵의 열풍을 타고 출마한 정몽준 의원과의 제3지대 단일화 여부가 많은 주목을 받았다.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궐 패배 이후 위태해진 노무현 후보를 비판하며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은 박근혜 의원과 정몽준 의원, 이한동 전 국무총리 등 제3지대로 출마한 후보들의 단일화를 요구하였다. 정몽준은 박근혜와의 단일화를 추진하였으나 박근혜는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거절하였는데, 이는 당시 정몽준 캠프에 소속되어 있던 강신옥 변호사가 박근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경력을 문제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몽준은 박근혜의 의사를 받아들여 강신옥 변호사를 캠프에서 내보냈으나 박근혜는 그 시기 한나라당으로 이미 복당한 이후여서 단일화는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2002년 11월, 대선을 1달 앞두고 이회창 후보는 박근혜에게 한나라당과 합당할 것을 제의하였다. 초반에는 이회창과의 갈등 때문에 복당을 거부하던 박근혜도 이번에는 복당을 받아들였고, 2002년 11월 19일 한나라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미래연합과 한나라당의 합당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한국미래연합은 창당 6개월 만에 한나라당에 흡수합당하며 해체되었으며, 박근혜는 한나라당 복당 이후 이회창 캠프의 선대위원장을 맡으며 대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회창은 노무현에게 대선에서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2000년 한나라당의 부총재로 선출되어 2001년까지 활동하였으나, 2002년 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였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였다. 2002년 5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5월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고 5월 14일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
창당 초기에 받았던 높은 관심과 달리 2002년 제3회 지방선거에서 광역의원 2명을 배출하는 초라한 성적표를 냈다. 한나라당은 지선 이후 박근혜에게 복당을 요청했지만, 박근혜는 복당을 거절하였다. 이 후 제16대 대통령 선거 시즌이 다가오며 박근혜는 독자 출마를 모색하였는데, 당시 한일월드컵의 열풍을 타고 출마한 정몽준 의원과의 제3지대 단일화 여부가 많은 주목을 받았다.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궐 패배 이후 위태해진 노무현 후보를 비판하며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은 박근혜 의원과 정몽준 의원, 이한동 전 국무총리 등 제3지대로 출마한 후보들의 단일화를 요구하였다. 정몽준은 박근혜와의 단일화를 추진하였으나 박근혜는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거절하였는데, 이는 당시 정몽준 캠프에 소속되어 있던 강신옥 변호사가 박근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경력을 문제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몽준은 박근혜의 의사를 받아들여 강신옥 변호사를 캠프에서 내보냈으나 박근혜는 그 시기 한나라당으로 이미 복당한 이후여서 단일화는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2002년 11월, 대선을 1달 앞두고 이회창 후보는 박근혜에게 한나라당과 합당할 것을 제의하였다. 초반에는 이회창과의 갈등 때문에 복당을 거부하던 박근혜도 이번에는 복당을 받아들였고, 2002년 11월 19일 한나라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미래연합과 한나라당의 합당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한국미래연합은 창당 6개월 만에 한나라당에 흡수합당하며 해체되었으며, 박근혜는 한나라당 복당 이후 이회창 캠프의 선대위원장을 맡으며 대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회창은 노무현에게 대선에서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4.1. 노무현 대통령 탄핵[편집]
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이 다수(133석/273석)이던 제16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였다. 박근혜도 당론에 따라 탄핵안 발의와 가결에 참여하였다. 비슷한 성향의 언론과 학계의 지원이 있었으나 극심한 역풍이 불면서 대다수 국민의 반발을 샀고 한나라당은 최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제16대 대선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SK그룹 등으로부터 수수했다는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 불거지면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유례없이 급락해 최병렬 대표마저 사퇴하게 된다.
4.2. 당 대표 활동[편집]
한나라당이 '역풍 위기'에 처했을 때, 착실하게 당 내에서 입지를 쌓고 있던 박근혜가 그의 뒤를 이어 3월 23일 임시 당 대표가 되었다. 기존의 다선 의원, 중진 의원, 운동권에서 포섭해 온 세력 등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 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2004년 3월 30일 KBS가 초청한 방송연설에서 박근혜는 "한나라당에게 마지막 한번의 기회를 달라"는 내용으로 눈물을 흘리며 연설을 하였고 이 역시 유권자들에게 동정표로 작용하였다. 또한 총선 직전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의원이 "60대 이상은 투표 안해도 된다" 라는 발언으로 노인 비하 의혹에 휘말려, 한나라당에게 기회로 작용하였다.
개표 결과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원내 1당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예상 외의 선전을 하였다. '탄핵 역풍 위기'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구해낸 것이다. 이때부터 박근혜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잠재적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이회창이 정계은퇴를 하기 전인 국민의 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은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민주계가 강력한 당권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이회창의 은퇴와 17대 총선에서 발생한 박근혜의 부상으로 한나라당의 당권은 박근혜가 이끄는 친박과 민정계, 공화계로 급격히 넘어가게 된다.
박근혜의 당대표직은 임시직함이었기에 총선 이후 박근혜는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 2004년 7월 19일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선출되며 정식 당대표가 된다. 이 시기 박근혜는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개설해 유권자들과 활발히 소통하는 한편 보수계 정당과 척을 지고 있던 민주화 세력과의 단합과 화해에 포커스를 맞추기도 했다. 2004년 8월 12일, 박근혜 대표는 김대중도서관을 방문,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생전의 정적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아버지 시절 고생하셨던 것에 대해 딸로서 사과말씀 드립니다" 라며 유신 시절 피해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달했고, 김 전 대통령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며 화해를 받아들이고 박근혜에게 동서화합의 적임자가 되달라는 조언을 남긴다. 언론에서는 이를 박근혜 대표가 한나라당의 호남 지지층을 넓히기 위한 행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후인 2010년 출판된 자서전에서 "그 말이 난 참으로 고마웠다. 박정희가 환생해 나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았다" 며 박근혜의 화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2005년에는 6월 13일 오전 신라호텔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 학술 회의에 다녀오기도 했다. 2005년, 박근혜 대표 체제에서 한나라당은 2차례의 재보궐선거를 모두 승리하였고, 이 때부터 박근혜에게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개표 결과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원내 1당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예상 외의 선전을 하였다. '탄핵 역풍 위기'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구해낸 것이다. 이때부터 박근혜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잠재적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이회창이 정계은퇴를 하기 전인 국민의 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은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민주계가 강력한 당권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이회창의 은퇴와 17대 총선에서 발생한 박근혜의 부상으로 한나라당의 당권은 박근혜가 이끄는 친박과 민정계, 공화계로 급격히 넘어가게 된다.
박근혜의 당대표직은 임시직함이었기에 총선 이후 박근혜는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 2004년 7월 19일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선출되며 정식 당대표가 된다. 이 시기 박근혜는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개설해 유권자들과 활발히 소통하는 한편 보수계 정당과 척을 지고 있던 민주화 세력과의 단합과 화해에 포커스를 맞추기도 했다. 2004년 8월 12일, 박근혜 대표는 김대중도서관을 방문,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생전의 정적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아버지 시절 고생하셨던 것에 대해 딸로서 사과말씀 드립니다" 라며 유신 시절 피해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달했고, 김 전 대통령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며 화해를 받아들이고 박근혜에게 동서화합의 적임자가 되달라는 조언을 남긴다. 언론에서는 이를 박근혜 대표가 한나라당의 호남 지지층을 넓히기 위한 행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후인 2010년 출판된 자서전에서 "그 말이 난 참으로 고마웠다. 박정희가 환생해 나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았다" 며 박근혜의 화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2005년에는 6월 13일 오전 신라호텔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 학술 회의에 다녀오기도 했다. 2005년, 박근혜 대표 체제에서 한나라당은 2차례의 재보궐선거를 모두 승리하였고, 이 때부터 박근혜에게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4.3.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편집]
2004년부터 한나라당의 위기와 재도약을 이끈 박근혜는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예비후보 중 하나였다. 박근혜는 한나라당의 당권과 대권의 분리 방침에 따라 2007년 대선을 1년 남긴 2006년 6월 16일에 대표직을 사퇴하고 대선 레이스에 돌입하였다. 박근혜의 가장 큰 상대는 서울특별시장을 지냈으며, 그 과정에서 청계천 복원, 버스 노선 개편 등으로 인기를 끈 이명박이었다. 본격적인 대선 경선 레이스가 시작되고 박근혜는 이명박의 부패 비리 의혹을 집중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BBK 주가 조작 사건 등이 처음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박근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나와 '줄푸세'라는 정책을 내세웠다. '세금은 줄이고, 각종 규제는 풀고, 법기강은 세운다'는 뜻으로 그의 대통령후보 경선시 주요 정책구호였다. 이 정책은 그녀의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정책이라는 평가가 있다. 자유주의(liberalism)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신분제 등으로부터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던 '고전적 자유주의자(liberalist)'라기보다는, 분배보다 성장을 중시하고 각종 규제로부터 억압받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neo-liberalist)'에 더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 이는 이후 제17대 이명박정부의 정책에도 많이 반영되었다.
2007년 7월 검증 청문회를 받았다. 이때는 그동안 박근혜가 정계 입문 이후 제기되어 왔던 각종 의혹이 모두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전두환 자금 6억 원 수수설 등 일부는 시인했으나 일부는 부정, 비판하였다. 이를 두고 곤란한 질문에는 이리저리 답변을 피하였다는 언론의 비판도 있었다.
열린우리당 윤호중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돈이 9억이 아니라 6억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을 빼고 하나도 새롭게 검증된 것이 없는 청문회였다"면서 "국민이 궁금해 하는 후보의 자질의혹을 검증하기보다 면죄부와 해명 기회만을 준 시간이었고 후보자의 맷집만 훈련시킨 청문회였다고 평가한다"라고 주장했다.민주노동당 김형탁 대변인은 "정치쇼에 불과하다"면서 "하나마나한 청문회, 시간낭비, 전파낭비일 뿐"이라고 깎아 내렸다.
폭로전은 경선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당 대회를 3일 앞둔 2007년 8월 17일, 박근혜 경선후보는 "거짓으로 한나라당이 과연 집권할 수 있습니까?"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명박 후보측은 도곡동 땅에 대한 검찰 발표가 판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자체 조사와 각 언론사 조사를 종합할 때 10% 이상 차이로 낙승할 거라고 주장했다.[40] 이와 관련해 진수희 대변인은 "1위 후보가 압승을 해야 경선 후유증이 최소화 된다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우리가 15% 격차로 압승할 것으로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40] 그러나 박근혜 후보측은 자체 전수 조사 결과 근소하게나마 앞서기 시작했다면서 각종 의혹으로 이 후보에 불안감을 느낀 당심이 옮겨온다고 주장했다.[40] 당시 세대별 지지율을 보자면, 이명박 후보는 3,40대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은 반면, 박근혜 후보는 50대 이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었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하였지만,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뒤져 이명박에게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했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는 깨끗이 승복하였다. 하지만, 논란의 연장선상으로 이후에 대선 후보 자리를 박근혜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박근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나와 '줄푸세'라는 정책을 내세웠다. '세금은 줄이고, 각종 규제는 풀고, 법기강은 세운다'는 뜻으로 그의 대통령후보 경선시 주요 정책구호였다. 이 정책은 그녀의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정책이라는 평가가 있다. 자유주의(liberalism)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신분제 등으로부터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던 '고전적 자유주의자(liberalist)'라기보다는, 분배보다 성장을 중시하고 각종 규제로부터 억압받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neo-liberalist)'에 더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 이는 이후 제17대 이명박정부의 정책에도 많이 반영되었다.
2007년 7월 검증 청문회를 받았다. 이때는 그동안 박근혜가 정계 입문 이후 제기되어 왔던 각종 의혹이 모두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전두환 자금 6억 원 수수설 등 일부는 시인했으나 일부는 부정, 비판하였다. 이를 두고 곤란한 질문에는 이리저리 답변을 피하였다는 언론의 비판도 있었다.
열린우리당 윤호중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돈이 9억이 아니라 6억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을 빼고 하나도 새롭게 검증된 것이 없는 청문회였다"면서 "국민이 궁금해 하는 후보의 자질의혹을 검증하기보다 면죄부와 해명 기회만을 준 시간이었고 후보자의 맷집만 훈련시킨 청문회였다고 평가한다"라고 주장했다.민주노동당 김형탁 대변인은 "정치쇼에 불과하다"면서 "하나마나한 청문회, 시간낭비, 전파낭비일 뿐"이라고 깎아 내렸다.
폭로전은 경선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당 대회를 3일 앞둔 2007년 8월 17일, 박근혜 경선후보는 "거짓으로 한나라당이 과연 집권할 수 있습니까?"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명박 후보측은 도곡동 땅에 대한 검찰 발표가 판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자체 조사와 각 언론사 조사를 종합할 때 10% 이상 차이로 낙승할 거라고 주장했다.[40] 이와 관련해 진수희 대변인은 "1위 후보가 압승을 해야 경선 후유증이 최소화 된다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우리가 15% 격차로 압승할 것으로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40] 그러나 박근혜 후보측은 자체 전수 조사 결과 근소하게나마 앞서기 시작했다면서 각종 의혹으로 이 후보에 불안감을 느낀 당심이 옮겨온다고 주장했다.[40] 당시 세대별 지지율을 보자면, 이명박 후보는 3,40대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은 반면, 박근혜 후보는 50대 이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었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하였지만,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뒤져 이명박에게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했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는 깨끗이 승복하였다. 하지만, 논란의 연장선상으로 이후에 대선 후보 자리를 박근혜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4.4. 이명박 정부 시절[편집]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한나라당에는 친이명박 계열과 친박근혜 계열의 갈등이 있었다. 한나라당 내에서 친박계 의원들의 숫자는 2008년 5월 18대 총선 직후에는 당내외를 합쳐 50여명 정도였고, 2011년 6월 비공식적으로 90 ~ 1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이명박의 대통령 선거를 직접적으로 도와준 이재오, 이방호 등이 한나라당의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상대적으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은 홀대를 받았다.
2008년 총선에서 친이계의 이재오, 이방호 두 명은 적극적으로 이명박 계열의 정치인들을 후보로 내세우고, 공천에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박근혜는 이에 대하여 공천의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수차례 비판하였으나 공천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박근혜는 이에 대하여 "한나라당 공천이 잘못돼 가고 있고, 기준도 없는데다 엉망"이라고 비판하였다. 또 "오로지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공정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BBK 이야기를 한 사람은 공천에 안 된다는 둥 살생부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아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어 "지난 번에 경선에서 정치 발전을 위해 깨끗하게 승복했고, 한나라당에서 처음 제대로 경선을 한 것이 아니냐"며 "그로 인해 정치가 크게 발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잘못된 공천으로 그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이런 공천을 가지고는 앞으로 선거가 끝나도 한나라당이 화합하기도 힘들고, 힘든 상황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며 "정치 발전도 앞으로 기대할 필요가 없고, 한나라당의 발전도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경고했다.
2008년 3월 12일 박근혜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역 의원 50% 물갈이에 합의했다는 설에 대하여 "어마어마한 음모"라며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박근혜는 "오늘 아침 기사를 보고 기가 막히기도 하면서 하다하다 이런 술수까지 난무하는구나라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며 "이 쪽(친박계)에 다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라고 흥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이 우리 핵심 누구와 이야기를 했는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끝까지 밝혀 내겠다"며 "이방호 사무총장이 친박계 핵심 인사가 누군지 못밝힌다면 영남권 물갈이를 50% 한다고 해 놓고 우리한테 다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박근혜는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 의견을 내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한나라당의 친이계와 친박계의 계파 갈등이 더 확산되었다. 2009년 여론조사 결과 텃밭인 영남 지역, 중장년층, 보수층의 박근혜 지지 비중이 1 ~ 2% 낮아지고 진보층, 충청 지역, 기타 연령대의 지지 비중은 1 ~ 2% 높아진 걸 볼 수 있는데 이 까닭은 여권 주류가 마음먹고 세종시를 지원해 경상북도의 혁신도시가 기업을 유치하지 못하게 된다는 불안감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시 논란 이후, 지지율이 다시 회복되었다.
박근혜는 정운찬 총리가 "자족기능 강화를 위해 세종시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고 하자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이 같은 비판은 10·28 재보선이 끝나자마자 정 총리가 세종시 수정 추진 행보에 속도를 붙이자 제동을 건 것으로 보였다.
박근혜는 2009년 10월 31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서 기자들과 만나 "세종시는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세종시 문제를 개인적인 정치 신념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고 말하였다. 정운찬 총리의 면담 제안에 대해서도 "국민과의 약속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라며 "설득하고 동의를 구한다면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해야지 내게 할 일이 아니다"라고 일축하였다. "행정복합도시라는 말 속에 문화시설과 교육, 과학 등을 다 포함한 자족기능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며 "약속을 지키고 부족하면 플러스 알파로 더 잘되게 해야지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식 세종시 수정 발언에도 불구하고 11월 27일 "할 말을 이미 다 했고, 입장(원안+알파(α))에 변함이 없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였다.
2008년 총선에서 친이계의 이재오, 이방호 두 명은 적극적으로 이명박 계열의 정치인들을 후보로 내세우고, 공천에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박근혜는 이에 대하여 공천의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수차례 비판하였으나 공천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박근혜는 이에 대하여 "한나라당 공천이 잘못돼 가고 있고, 기준도 없는데다 엉망"이라고 비판하였다. 또 "오로지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공정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BBK 이야기를 한 사람은 공천에 안 된다는 둥 살생부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아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어 "지난 번에 경선에서 정치 발전을 위해 깨끗하게 승복했고, 한나라당에서 처음 제대로 경선을 한 것이 아니냐"며 "그로 인해 정치가 크게 발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잘못된 공천으로 그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이런 공천을 가지고는 앞으로 선거가 끝나도 한나라당이 화합하기도 힘들고, 힘든 상황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며 "정치 발전도 앞으로 기대할 필요가 없고, 한나라당의 발전도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경고했다.
2008년 3월 12일 박근혜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역 의원 50% 물갈이에 합의했다는 설에 대하여 "어마어마한 음모"라며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박근혜는 "오늘 아침 기사를 보고 기가 막히기도 하면서 하다하다 이런 술수까지 난무하는구나라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며 "이 쪽(친박계)에 다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라고 흥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이 우리 핵심 누구와 이야기를 했는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끝까지 밝혀 내겠다"며 "이방호 사무총장이 친박계 핵심 인사가 누군지 못밝힌다면 영남권 물갈이를 50% 한다고 해 놓고 우리한테 다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박근혜는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 의견을 내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한나라당의 친이계와 친박계의 계파 갈등이 더 확산되었다. 2009년 여론조사 결과 텃밭인 영남 지역, 중장년층, 보수층의 박근혜 지지 비중이 1 ~ 2% 낮아지고 진보층, 충청 지역, 기타 연령대의 지지 비중은 1 ~ 2% 높아진 걸 볼 수 있는데 이 까닭은 여권 주류가 마음먹고 세종시를 지원해 경상북도의 혁신도시가 기업을 유치하지 못하게 된다는 불안감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시 논란 이후, 지지율이 다시 회복되었다.
박근혜는 정운찬 총리가 "자족기능 강화를 위해 세종시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고 하자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이 같은 비판은 10·28 재보선이 끝나자마자 정 총리가 세종시 수정 추진 행보에 속도를 붙이자 제동을 건 것으로 보였다.
박근혜는 2009년 10월 31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서 기자들과 만나 "세종시는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세종시 문제를 개인적인 정치 신념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고 말하였다. 정운찬 총리의 면담 제안에 대해서도 "국민과의 약속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라며 "설득하고 동의를 구한다면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해야지 내게 할 일이 아니다"라고 일축하였다. "행정복합도시라는 말 속에 문화시설과 교육, 과학 등을 다 포함한 자족기능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며 "약속을 지키고 부족하면 플러스 알파로 더 잘되게 해야지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식 세종시 수정 발언에도 불구하고 11월 27일 "할 말을 이미 다 했고, 입장(원안+알파(α))에 변함이 없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