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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상위 문서: 서재필
1. 개요2. 생애 초기
2.1. 유년기
3. 소년기4. 관료 생활
4.1. 과거 급제와 관직 진출4.2. 개화 사상 접촉박영효4.3. 관료 생활4.4. 일본 유학과 신문물 수용
5. 갑신정변
5.1. 갑신정변 계획5.2. 갑신정변 직전5.3. 갑신정변과 삼일천하5.4. 정변의 실패와 가족들의 최후5.5. 일본으로 피신
6. 1차 미국 망명
6.1. 미국 망명생활 초기6.2. 고등학교 재학 시절6.3. 대학 재학 시절6.4. 의사 면허, 미국 시민권 획득
7. 복권과 귀국
7.1. 개화 계몽 운동7.2. 독립신문 발간7.3. 지방자치제도 주장7.4. 아관파천 전후7.5. 교육, 청년 계몽과 토론 문화 보급 활동7.6. 독립문 건립과 독립협회 활동7.7. 노비 해방 운동 추진7.8. 정부의 탄압과 외세의 공격7.9. 의회설립운동 참여7.10. 출국
8. 2차 미국 망명
8.1. 양자 입양 탄원과 거절8.2. 을사 조약 전후8.3. 한일 합방과 독립운동 준비8.4. 독립운동 참여
9. 한인단체 활동과 독립운동
9.1. 미국에서의 독립운동9.2. 워싱턴 군축회의와 좌절9.3. 사업 실패와 생계 곤란9.4. 유한양행의 초대 사장9.5. 의사 생활9.6. 펜실베이니아 대학 재학과 연구 활동
10.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서재필의 생애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2. 생애 초기[편집]

송재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1863년 음력 11월 28일) 외가가 있는 전라도 동복군(현재의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진사 서광효와 이기대의 5녀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 생모 성주 이씨는 초당 후원의 뽕나무를 큰 용이 감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외가인 성주 이씨는 외고조부 대에 동복군 문덕에 정착한 뒤 외증조부 이유원은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외종조부 이기두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동복, 문덕의 대지주로 성장한 가문이었다.

그 뒤 아버지 서광효의 고향인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현, 논산시 구자곡면 화석리)로 온 가족이 옮겨가 그 곳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이어 근처 구자곡면 금곡리(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1리)에 있던 집으로 이주하여 유아 시절을 비롯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서광효의 집이자 본적지는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금곡리 256번지(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256)였다.

서재필은 조선 영조의 국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8대손으로, 6대조 서덕수는 경종 때 세제인 연잉군(뒷날의 영조)을 추대하려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 가세는 몰락했고, 할아버지 서상기는 유복자로 가난한 삶을 보냈고, 아들 광교, 광언(또는 광효), 광업 형제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아버지 서광효는 처갓집에서 10여년 간 생활하다가 집을 마련하여 다시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그가 태어날 무렵 누나 1명과 친형 서재춘, 서모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 서재형이 있었고, 어머니 성주이씨에게서 남동생 서재창, 서재우와 여동생 서기석 등이 태어났다.

아버지 서광효는 그에게 쌍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가 뒤에 재필로 이름을 바꾸고, 자(字)를 윤경이라 지어주었다. 서재필은 후에 쌍경을 자신의 첫 아호로 사용하였다. 본래 서재필의 집안은 당색으로는 노론 비주류였지만 당파 싸움을 극도로 혐오하던 서재필은 후일 1947년 당시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장인 김도태 등과 면담할 때 나는 노론이 뭐고 소론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거짓 진술하기도 했다.

1명의 친 누나는 그가 태어날 무렵 담양군에 사는 영일 정씨 정해은에게 시집가 전남 담양군 지실마을로 시집갔다.

그의 가계는 6대조 서유승이 통덕랑을 지낸 이후 변변한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아버지 서광효는 진사시에 합격했을 뿐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 생부 서광효는 늦게 처가가 있는 보성군수로 부임하였다.

양자 출양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근처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관직에 오른 양부 서광하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갔다. 양어머니는 안동김씨 세도가의 하나였던 김온순의 딸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신을 지낸 김성근의 누나였다.

2.1. 유년기[편집]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키가 남보다 크고 기운이 세어 동네 아이들을 잘 때리기도 하였으나, 남달리 패기와 기상이 흘러 넘쳤다.

어느 여름날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에 내려갔다가 어느 원님이 부임하러 행차하던 중 어느 정자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동리 어른들도 감히 원님 근처에 가지 못했는데, 소년이던 서재필은 두려움없이 다가가더니 호기심에 찬 눈으로 수령을 바라보았다. 수령은 비굴한 기색이 없고 당당해보이는 소년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아가 너 노래 한번 불러 보렴'하니 서재필은 바로 받아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말을 더듬은 사유를 원이 묻자 '원님이 갖고 계신 부채를 빌려 주시면 그것으로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 하였다. 수령은 부채를 빌려달라는 소년의 엉뚱함에 내심 기특해 하면서 부채를 빌려주었더니, 소년은 그 부채를 가락에 맞추어 흔들면서 민요를 한바탕 불렀다.

소년의 비범함을 알아본 수령은 그의 이름을 물었고, 소년은 "서재필입니다. 호는 쌍경이라 합니다."라며 당당히 밝혔다.

"제 아버지께서 진사에 급제한 해에 제가 태어나 경사가 두가지 겹쳤다 하여 제 이름을 쌍경이라 하였습니다."

원은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예견하고는 임지로 떠났다. 한편,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던 그는 동리 아이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고, 한성부로 상경한 뒤에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여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잡다한 지식에 해박했으며 평소 자존심이 강하였다.

3. 소년기[편집]

양부 서광하 내외는 서재필을 입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872년(고종 10년) 한성에서 이조참판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金聲根)의 집에 서재필을 보낸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김성근을 찾아가 수학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는 양아버지의 권고로 김성근의 집에서 기거하며 그로부터 글과 학문을 배웠다. 김성근의 학숙에서 동몽선습, 사기, 사서 육경을 배웠는데 대부분 암송하였다 한다. 그 중에는 뜻을 아는 것도 있었으나 일부는 암기를 해 두었다. "또한 김성근의 집에 머물던 중 그의 집안에 출입하던 서광범과 김성근의 일족인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또한 서재필은 김옥균을 통해 3년 연상의 박영효와도 만나, 그와도 사귀게 되었다. 김옥균은 그를 각별히 대했다 한다. 이어 김옥균과 서광범을 통해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수학,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손목시계 등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생가와 양가는 당색으로는 노론 계열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는 노론 북학파 계열의 영향을 받고 개화파의 형성에 참여한다.

4. 관료 생활[편집]

4.1. 과거 급제와 관직 진출[편집]

1878년(고종 15년) 봄 서재필은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879년(고종 16년) 초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낙방, 그해 봄 고종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전강에서 1등하여 직부전시의 명을 받아, 바로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전강에서 시관이 사서 삼경 중 아무데나 지적하자 이를 막힘 없이 일곱 번을 반복해서 줄줄 외웠다 한다. 1879년 4년 연상인 경주이씨와 조혼, 1881년(고종 18년) 봄 다시 김영석의 딸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두번째 부인 광산 김씨는 한성부의 명문 거족으로 사계 김장생과 허주 김반, 신독재 김집, 광남 김익훈의 후손이었다.

18세 되던 1882년 3월 증광 문과에 병과(3등)으로 급제하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급제함으로써 주위의 촉망[33]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러나 과거 급제 직후, 서재필은 이렇다 할 보직에 제수되지 못하다가, 4월 6일 승문원가주서로 임시 보직되었다가 김중식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4월 18일 다시 승문원가주서로 임명되었다. 급제 직후 정식 보직을 받지 못하자 4월 19일 박영교의 상소로 군직에 임명되었다. 4월 21일의 병조의 병비에 의해 부사정이 되고, 경연가주서를 겸하였다. 4월 25일 병으로 승문원가주서에서 체차되어 송세현(宋世鉉)과 교체되었다. 그해 6월 서재필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서광범, 김옥균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김옥균 등이 만든 충의계에 가입했고 이는 그대로 개화당으로 발전하였다.

4.2. 개화 사상 접촉박영효[편집]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후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을 만나게 된다. 당시 개화파는 한성부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

이동인을 처음 만난지 2개월 뒤, 이동인은 책, 사진, 성냥 같은 것을 일본에서 돈주고 사왔다. 역사책도 있고 지리, 물리, 화학 관련 서적도 있었다. 이것이 신기하다 여긴 그는 친구들과 이를 보려고 서너 달 동안 봉은사에 다니다가 동대문 밖 영도사로 자리를 옮겨 남몰래 탐독하였다.

“모두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충 짐작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국민의 권리를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났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첫 번째 나서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란 중이 우리를 인도해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니 새절이 개화파의 온상이라 할 것이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이동인 등은 모두 한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4.3. 관료 생활[편집]

1883년(고종 20년) 1월 14일 승정원 가주서가 되었다가, 병으로 당일 이민영으로 갈리게 되었다. 1883년 2월초 승문원에 보임되었다가 2월 27일 이조의 건의로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보직되었다. 서재필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히 활동하였다.

그해 3월 6품으로 특별 승진하고, 훈련원부봉사가 되었다. 이때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 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몰락한 양반이었던 탓에 양반이라는 권위의식이 적었고 이는 평민 출신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는 배경이 된다.

1883년(고종 20년) 5월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과 일행은 6개월간 게이오 의학에 입학한다. 유학생 대표는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어학의 재능도 뛰어나 유학 몇 달 만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일본어를 익히면서 일본에 체류중인 미국인들을 만나 기초 수준의 영어를 배웠다.

4.4. 일본 유학과 신문물 수용[편집]

1884년(고종 21년) 1월에 게이오 의숙 1년과정을 수료하였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한편으로 선진국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눈여겨 보기도 했다. 또한 다른 길에 빠지지 않고 일본의 군사 시설과 경찰 제도를 유심히 살펴봤다.

서재필은 정규 교과과정 이외에 조선인 동기생들로부터 무예를 배웠다. 택견의 명수 이규완에게서는 택견의 고난도 품새를, 유도와 씨름에 능한 임은명에게서는 조르기, 누리기 등 유술 전반에 대해 배웠다.

1884년 1월부터 7개월간은 토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총검술, 제식훈련, 폭탄 투척 등의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훈련 중에도 그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솔선수범하였고, 지지신보 1884년 2월 28일자 기사에는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6월 수료하였다. 그해 6월 일본에 체류 중 다시 교서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6월 20일 서재필과 조선으로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아 병조 예하에 조련국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고종의 승락을 얻어내 조련국을 창설하였으나 서재필의 양어머니 안동 김씨의 사망으로 서재필은 관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6월 30일 고종의 특명으로 기복의 명을 받고 서재필은 장교를 양성하는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그러나 신설된 조련국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결국 폐지되었다.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민씨 일족과 1884년말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쫓겨났다.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되었다.

5. 갑신정변[편집]

5.1. 갑신정변 계획[편집]

당시 양어머니 안동김씨의 상중이었으나 그는 그해 7월 기복(부모의 3년상인데도 사직이 윤허되지 않고 특별 채용되는 것)의 특혜를 받았다. 서재필은 거듭 사양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1884년(고종 21년) 8월 20일 조련국 사관생도 교관으로 배치되어 신식 병사 양성을 맡게 된다. 그러나 고종은 사관들을 데리고 바로 대령하라고 했음에도 당일 입궐하지 않아 동부승지 김문현의 규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이 특별히 무마시켰다. 고종의 여러번 출사 요청이 있자 그는 조련국 사관장으로서 병력의 훈련을 담당한다.

1884년초부터 서재필은 기회를 잡다가 그해 6월 귀국 이후, 10월에 있을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과 더불어 갑신정변을 계획하고, 신분제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 심양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 등을 담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 서재필은 조련국 병사들과 신식 군대로 구성된 행동대를 총 지휘하고 병력들을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였다. 7월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여 12월초 정변 준비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 거사 자금 등을 동원한다.

정변 계획 중에 그는 일본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재조선주둔 일본육군 중대장 무라카미와 개화당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일본의 토야마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웠고, 정변진행 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현장 지휘를 맡았고 그의 동생 서재창과 박영교 등은 병력을 이끌고 수구파 대신들의 처단 등을 계획했다.

5.2. 갑신정변 직전[편집]

1884년 11월 승지로 특별 승진하였다.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당 동지들과 모여 거사를 모의하였다. 11월 9일 서재필은 조선주둔 일본군 중대장 무라카미 등을 찾아가 거사 협조를 부탁하였다 11월 16일 묘동에 있는 이인종의 집에서 김옥균과 만나 거사 계획을 숙론하였다. 11월 26일 탐골 승방에서 김옥균 등 동지들과 회합하고 빠른 시일 내로 거사할 것을 결의하고, 환경 변화에 대비한 다양한 거사 세부 계획을 짰다. 11월 27일 3시에 무라카미와, 밤에 다시 동지들과 계획을 세밀히 세워 나갔다. 11월 30일에 다시 동지들과 모여 거사 준비를 하였다.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에 가서 서광범, 홍영식, 김옥균 등과 만나 12월 4일로 거사 날자를 정하였다. 12월 4일에 거사를 개시할 각 부문의 담당자의 임무도 이때 결정하였다.

12월 2일 박영효의 집에 모여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서재필이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으로 갔다. 그 곳에는 이미 이인종, 홍영식, 서광범, 김옥균의 동지들과 함께 모이기로 한 여러 장사들, 이규정, 황용택, 이규완, 신중모, 임은명, 김봉균, 이은종, 윤경순 등이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함께 의논한 결과 12월 4일에 거사키로 하고, 만일 그 날 비가 오면 다음날인 12월 5일로 연기하기로 최종 확정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서재필의 자택에서 여러 동지들과 거사 내용을 다시 점검하고 어두워지자 우정국으로 갔다. 장사패를 이끌고 교동 일대의 경비 책임을 맡았다. 그는 이인종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가다. 밤에 김옥균 일행이 고종을 만나 정변이 일어났음을 알리었다. 고종을 경호하여 경우궁까지 무사히 인도하였다. 고종 내외를 경우궁으로 파천시킨 뒤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이조연이 "내 주상께 뵈옵고자 하노니 들어가게 하라"고 큰 소리로 말하면서 국왕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에 서재필이 칼을 빼어들고 "내가 이 문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이상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문안에 들어가기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하고, 서재필의 부하 장사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만일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그대로 둘 수 없다는 태세를 보였다. 이에 이조연과 한규직은 경우궁 뒷문으로 나아갔다. 막 문 밖에 나아가자 황용택, 윤경순, 이규완, 고영석 등에 의해 타살당했다.

12월 5일 개화파는 개화 신내각을 발표하였으며,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후영 정령관에 임명되었다. 김옥균은 갑신일록에서 그를 병조참판 겸 정령관으로 기록하였으나 실록을 비롯한 공식문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특히 그는 정변 과정에서 대신들을 참살하는 행동대장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2월 6일 청나라 병의 내습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5.3. 갑신정변과 삼일천하[편집]

1884년 12월 4일 오후 6시 한성부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는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초청으로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하여 낙성 축하연을 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김옥균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 서기관에게 이날 거사를 일으킬 것임을 은밀히 알려서 일본군 동원을 준비시켰다. 김옥균의 연락을 받은 서재필은 바로 병력을 집결, 이동시켰고, 우정국 입구에 매복시켰다.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우정국 북쪽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화재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던 민영익이 매복하고 있던 개화파 무사들에게 칼을 맞고 한쪽 귀가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다시 들어오자 연회장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급히 우정국을 빠져나와, 매복하고 있던 서재필 휘하 사관 생도들을 다시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김옥균은 교동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후에 대궐로 향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토야마군관학교에서 같이 훈련받은 생도들과 함께 한때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을 처단하였고, 문신 조영하와 민태호, 민영목 등을 대한제국 고종이 지켜보는 데에서 살해하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민씨 대신들은 그를 증오하였고,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

그러나 민씨 척족 정권은 청나라와 연락하여 청나라 군대의 조선 개입을 요청하였다. 그는 외세의 개입을 규탄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민가로 은신하였다.

12월 9일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이들의 피신을 주선해주었다.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란교, 서광범, 변수 등 일행 9명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일본 공사관에 숨었다가 12월 12일 인천주재 주조선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 츠지 가츠사부로의 일본 선박 치토세마루 호에 승선했다.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에 있던 일본 상선 치토세마루에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과 함께 숨어있던 중 묄렌도르프가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 외무독판 조병호와 인천감리 홍순학을 대동하고 다케조에에게 국적[1] 서재필과 김옥균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배 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행은 품속에 비상약을 쥐고 자살을 각오했다. 한참을 뮐렌도르프들과 우물쭈물대던 다케조에는 배로 올라와 어쩔수 없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그러나 배 안의 일본인들이 자국 공사의 비열함에 혀를 차며 질타했고, 선장 츠지 가츠사부로 역시 그의 무책임함을 지적하며 말하길, '당신을 믿고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와서 내리라 하면 이들을 죽이는 것밖에 더 되느냐'며 힐난했다. 다음은 그의 발언이다.

“내가 이 배에 조선 개화당 인사들을 승선시킨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의 말을 믿고 모종의 일을 도모하다가 잘못되어 쫓기는 모양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들더러 배에서 내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도리인가? 이 배에 탄 이상 모든 것은 선장인 내 책임이니 인간의 도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 

선장 츠지 가츠사부로는 직접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은 없으며, 일본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할 수는 없다, 임의로 수색했다가는 본국에 통보하여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그들을 따돌렸다. 츠지 선장의 배려로 서재필과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5.4. 정변의 실패와 가족들의 최후[편집]

갑신정변이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본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아 일본 정부가 조선의 망명 정객들을 냉대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미국 선교사들이 이들을 도왔다. 갑신정변 주역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은진 감옥에 투옥당했다.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 등 가족들이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 광산김씨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 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어린 딸 한 명은 딸이라 하여 연좌되지 않고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풀려난 딸은 후에 안동김씨 김태균의 아들 김두진과 결혼하였는데, 그는 선원 김상용의 10대손으로 청음 김상헌의 자손 고죽 김옥균과는 먼 친척이었다. 그러나 김두진과 결혼한 딸과는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서재필의 배우자 광산 김씨는 자신의 본가를 찾아갔는데, 부모들은 대역의 죄인이라 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승지였던 장인 김영석은 딸에게 서씨 집 귀신이 되라며 되돌려보냈는데 가서 자결하도록 하며 가마에 태울 때 독약 그릇을 하나 넣어 시가로 쫓아보냈다. 이에 서재필은 후일 귀국한 뒤 장인 김영석이 찾아오자 거지 취급하고 냉대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옥중에서 절곡 끝에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맏형 서재춘은 은진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노사령들이 화석이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주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망했지만 며느리 김씨는 못다 죽어, 어느날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그러나 생모 성주이씨나 배우자 광산김씨는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의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아내의 묘소는 연무읍 죽평리 어머니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구자곡면으로 이장된 뒤, 서재필의 유골이 봉환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자 1995년 서재필 묘소에 합장되었다.

한성부 종로방 화동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김옥균의 집과 인접해 있었는데, 김옥균의 집과 서재필의 집터는 조정에 의해 몰수당한 뒤 후일 한성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현. 서울 정독도서관 터)가 된다. 담양 가사문학면 지실 정해은과 결혼한 큰누나 서씨는 이미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모면하였다.

5.5. 일본으로 피신[편집]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 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망명 초기 그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의 위협에 시달려 은신하였으나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이 있던 독지가의 후원으로 도쿄 근처의 판자촌에 숨어 지냈다. 일본 도착 직후 그는 혁명의 실패와 서툴렀음을 자책하며 대성통곡을 하다 실신했다. 한달 가까이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1개월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수시로 자객을 보냈고 그는 변장하고 은신해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그의 딱한 소식을 듣고 생활비와 음식과 옷을 지원해 주었다.

서재필 자신은 1년간 일본에 피신해 있었지만, 갑신정변 주역들을 둘러싸고 일본-청나라 사이의 외교문제가 생겼고, 일본은 조선의 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하였다. 그는 자객을 피해 걸인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박대에 분개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 김옥균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기독교 선교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게 된다.

6. 1차 미국 망명[편집]

1885년(고종 22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비용이 없었고 능통하지 못한 영어 실력과,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을 피해 숨어있어야 했던 이들은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후원과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씨가 보내준 생활비와 차비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조병옥에 의하면, 이들은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상륙하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닥쳐올 생활위협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서광범도 얼마 동안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결국 앞서 돌아간 박영효의 뒤를 따라 그도 양반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훗날 서재필은 그가 처음 미국 땅에서 살기 위해서 발버둥쳤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 뿐, 말도 모르고 풍속이 다른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의 진로를 개척하려던, 고독에 겨운 참담한 생활은 그의 자립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문방구점의 경영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근면과 창의력은 상점의 번영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유색인종에 대한 무시와, 차별에 시달림을 당했고 열차에 탑승할 때도 짐칸으로 밀려나는 등의 모욕을 당한다.

미국 망명 초기 장로교 선교사이자 안면이 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편지로 보낸 소개장 덕에 거처를 구할 수 있었다. 미국생활 중 감리교회에 나가 감리교 신자로 개종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1887년 3월부터 1894년 3월 10일까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번갈아가며 홍국영을 부관참시하고 노륙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동시에 서재필과 서광범, 박영효도 기한을 정해 잡아들이거나 사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매일 올렸다. 이는 승정원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동일한 내용의 상소가 수시로 계속되자 고종은 나중에 이를 모두 물리쳤다.

6.1. 미국 망명생활 초기[편집]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재필은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서재필이 처음 구한 일자리는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서재필은 다른 노동자들이 하루 5마일을 다닐때 10마일을 뛰어 다니면서 일했다. 낮선 땅에서 대화가 통하지 않아 손짓과 발짓으로 어렵게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고, 정신병자, 부랑아로 몰려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으며 1년을 보낸다. 언어도 통하지 않은 데다가 노동법령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임금도 못받고 사업장에서 쫓겨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한다.

처음에 미국에서 생활하며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렸다. 언어 장벽과 유색인종이라는 부정적인 시선 등으로 불이익과 차별을 당하는 것에 좌절하여 사람들을 기피하기도 했다. 낮선 환경에 적응하기 쉽지 않아 여러번 일자리를 바꾸기도 하며 차가운 시골과 변두리의 판자집을 전전해야 했는데, 위생상태의 불결함 등으로 감기와 피부염증, 동상에 자주 걸려 육체적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막노동과 잡역, 식당 서빙, 청소부, 인쇄소 전단지 돌리는 일 등 잡일을 가리지 않고 이역만리를 헤매며 오렌지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 가구점 점원, 잡화상회 점원 등을 전전하며 미국생활을 견뎌냈다 한다.

고단한 미국생활에서 연락을 주고 받은 유일한 친구는 윤치호였다. 여러번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치호는 선뜻 그에게 생활비를 우편환으로 송금해주었다. 주소가 수시로 바뀌었지만 그가 먼저 윤치호에게 연락을 하였으므로 연락이 계속될 수 있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한 차례 만났었다. 189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되돌아가기 전인 윤치호는 인사차 서재필을 방문했었다. 서재필은 윤치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나자 잊고 있었던 십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정변이 떠올라 회한에 잠겨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신 때문에 죽은 부모와 처자를 떠올렸다. 서재필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치호는 왜 그런지 알면서도 무척 서운해했다.

조선에서는 미국에 있는 그를 제거하려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그와 친분이 있던 인물들에 대한 감시, 탄압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조선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민중에 대한 희망과 기대 역시 배신감과 증오로 변하게 된다.

6.2. 고등학교 재학 시절[편집]

낮에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 야간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교회에 나가던 그는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적 인권사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운 좋게 교회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1886년 9월 서재필은 홀렌백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 배리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머무를 거처가 없었던 서재필은 해리힐맨 고등학교 교장 집에서 집안 일과 정원 조경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사립고를 다녔다. 또한 한편으로 제이슨(Philip Jason)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언론에 칼럼을 기고할 때의 필명은 오시아(N. H. Osia)라 하였다.

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6.3. 대학 재학 시절[편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의 예과(대학 예비 과정)의 야간부인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 야간반에 입학, 1년간 자유전공으로 전공 없이 주로 자연과학과 역사를 배웠다.

1889년 6월 서재필이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 다음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에 기독교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 앞으로 더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1890년 서재필은 그해의 라파예트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했고, 곧 라파예트 대학 하트 교수의 도움으로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에 다닐 무렵, 서재필은 하루 3불의 품삯을 받고 유리창닦이 등 잡역부로 노동을 하였고, 여가를 틈타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한다. 그 뒤 교회당을 찾아 신앙을 발견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 D.C.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의과대학에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문구점을 설립했는데 낮에는 문구점 주인으로 밤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하였다.

6.4. 의사 면허, 미국 시민권 획득[편집]

컬럼비안 대학 예과를 마친 서재필은 컬럼비안 대학교의 본과로 진학[59], 1893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무박사가 되었다.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1892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재학 중 바로 가필드 병원에서 1년간의 수련의 인턴 과정을 거쳤다.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1893년 6월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 야간반을 2등으로 졸업하였다.

1893년 8월 워싱턴 D.C에서 만난 윤치호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의과대학 졸업 후에도 박물관에 계속 근무하였다.[27]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1893년 6월 바로 모교인 컬럼비안 대학교의 강사가 될 목적으로 모교의 조교가 되었다. 그러나 유색인종에게서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1년만에 그만두고 만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서재필로 하여금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했다. 미국과 서구적 안목으로 조선을 돌아볼 때 그의 피는 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여전히 열강의 각축장이 된 채 외세종속적이면서 후진적인 사회로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의 불결함과 미개함, 민주주의 정치를 정착시키려던 개화당 인사들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증오에 환멸을 느낀 그는 미국 사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서재필은 1894년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을 만나 그의 과외 가정교사가 되었다. 뮤리엘 암스트롱의 가정교사로 있다가 연애를 시작,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 냉대 등으로 이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그에게 뮤리엘 암스트롱은 친절하게 대했고, 때로는 그의 고충을 들어주기도 한다. 뮤리엘의 인간미에 감격한 서재필은 곧 뮤리엘에게 청혼하였고, 뮤리엘은 가난할 것이다, 힘들 것이다, 유색인종이다 등등의 이유로, 주변의 반대와 조언,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혼 비용에 부담을 느낀 서재필을 배려하여 같은 해 6월 20일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카버넌트 교회에서 친지들을 불러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됐다. 미국 시민권을 받자 바로 병원에 처음 취직한 그는 세균학 연구를 주로 하였다.

뮤리엘은 제임스 뷰캐넌 전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해 초대 국장을 지낸 미국 육군 대령 출신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의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지만, 의붓아버지인 예비역 육군 대위 출신 제임스 화이트가 워싱턴에서 유명 인사였던 탓에 그는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그 후, 서재필과 뮤리엘 암스트롱은 두 딸 스테파니와 뮤리엘을 두었다. 서재필은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1894년 6월 워싱턴에서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로 생계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신혼 살림도 워싱턴에 있던 주미조선공사관 직원 관사에 방을 빌려 차렸다.

이후 평생을 독립운동 참여 등 그가 가정 생계에 초연하여 빚과 파산,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아내 뮤리엘은 남편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고, 이는 그가 전심전력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193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내에는 노예와 시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당연하다는 시각과 흑인,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당연하다는 시각이 존재했는데 그는 노예 해방론과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제임스 뷰캐넌의 사상에 감동, 깊이 공감하게 된다.

서재필은 개업 후 백인들의 인종 차별 의식 때문에 병원을 별로 찾지 않아 매우 심한 궁핍에 시달렸다. 1894년(고종 31년) 3월 김옥균의 암살 소식과, 5월 뉴스와 신문을 통해 김옥균의 부관참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조선 조정이 상하이에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고, 시신을 환국시킨 뒤 능지처사한 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보도되었다. 김옥균의 참혹한 죽음과 부관참시를 보고 그는 조선 조정과 조선 민중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한층 증폭시켰다. 한편 1894년 6월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는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95년초 모교인 컬럼비아 대학 의과대학의 세균학 강사로 출강하였다.

7. 복권과 귀국[편집]

1895년(고종 32년) 3월 1일 법무대신 서광범의 건의로 작위가 회복되었다. 5월 10일에는 미국 체류 중 외부 협판에 임명된다. 8월에는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다.

서재필은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주미조선 공사관에서는 그에게 공사관의 방 하나를 무료로 빌려주었고, 식비까지 제공하였다.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1895년 가을, 미국을 방문 중 워싱턴 시에 들른 박영효를 워싱턴 시 내에서 10년만에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조선의 정세를 접하게 된다.

박영효를 만난 뒤 다시 조선을 개혁해 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그는 김홍집 내각이 다시 서재필에게 귀국을 요청함에 따라 귀국을 결심한다.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추가로 마련해준 여비까지 더 받고, 1895년 11월 10일 워싱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를 출발, 하와이와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경유할 때 일본 동경의 모교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12월 26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인천항에 도착한 서재필과 그의 부인 뮤리엘은 출국 전 고용한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인력거로 비밀리에 한성부에 당도하였다.

그는 귀국 직후 외무 협판과 학부대신 서리 직을 사직한다. 후일 1900년 6월 윤용선은 그가 이름뿐이지만, 당시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된 것을 근거로 을미사변 관련자로 몰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주하기도 한다.

7.1. 개화 계몽 운동[편집]

당시 그는 조선의 모든 것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에 크게 낙심, 좌절했고 이를 역적시하는 고종 등의 태도, 일가족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 일본 망명 중에 조선 조정에서 자신을 암살할 자객을 보낸 것, 미국생활 초에 당했던 온갖 인종차별과 멸시는 그에게 원한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거의 영어로 대화했고, 독립문 기공식 때에도 영어로 연설했다. 또한 윤치호 등과 살아남은 조카들이 그에게 자결로 죽은 전처의 묘소와 논산 연무대 근처에 있던 생모 성주이씨의 묘소 위치를 알려주었으나 그는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보라는 권고를 거절한다.

그를 파양했지만 연좌제에 의해 천민으로 격하된 양아버지이자 7촌 당숙인 서광하가 찾아왔지만 못본 척 냉정하게 외면하였다. 역시 연좌되어 삭탈관작 당하고 거지가 된 본부인 광산 김씨의 친정부모 김영석과 박씨 내외 역시 외면했다. 서재필은 김영석 내외에게 그대가 어떻게 나의 장인인가, 자신의 딸과 어린 외손을 외면한 금수에게 내가 왜 인사하느냐며 박대하고 내쫓았다. 그는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입궐하였으며, 입궐한 뒤에 고종의 앞에서 절하지 않은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악수를 청하였다. 이를 본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충격을 받았고,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박정양, 박영효, 김홍집, 유길준, 윤치호 역시 경악했다. 영재 이건창은 이를 듣고 사람이 망가졌다며 그를 비난하였다.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서재필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자기 이름을 필립 제이슨 또는 제이슨, 피제손으로 지칭하였다. 피제손은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한글로 음역한 것이다. 1900년대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다시 제선 또는 피제선으로 음역하였다.

7.2. 독립신문 발간[편집]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순한글과 영어로 인쇄,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창립 자금 4400원을 지원 받아 시작하였다.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백성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한성 백성만을 위할 게 아니라 조선 전국 백성들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려 주려 함.

우리가 이 신문을 출판하는 것은 취리(이익을 취함)하려는 것이 아닌고로 값을 매우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하려 함이요, 또 귀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게 하도록 함이라.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고 해도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펼 터이요, 사사백성이라도 무법한 짓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내 신문에 설명할 터임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되었다. 한편 그는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박영효, 윤치호, 유길준, 이상재, 박정양, 이완용, 주시경, 김규식, 박중양 등을 영입했다. 그 중 주시경은 독립신문사 회계사무원 겸 교보원으로 임명하여 신문사의 재정과 교열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언더우드 학당에서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인 김규식을 영입하여 취재기자로 고용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을 편집할 때 그는 띄어쓰기를 반영하였다. 후일 1896년 4월 7일의 그의 독립신문 창건을 기념해 후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57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는 독립신문의 논설이며 모든 것은 내가 혼자 원고를 썼다"고 회고하는데, 이보다 전인 윤치호가 1893년 그를 미국에서 만났을 때, "서재필이 모국어 쓰기와 말하기를 거의 잊어 버려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신문 발간 추진 과정에서 윤치호에게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번역 업무를 맡아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문 용어보다는 쉽게 한글로 풀이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발행부수 3,00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10여명으로 시작된 독립협회는 이내 4,0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큰 단체로 발전하면서 국민적 개혁 운동 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7.3. 지방자치제도 주장[편집]

1896년 4월 독립신문 설립 직후 그는 조선도 감사나 수령, 관찰사나 군수, 부윤 등은 주민이 직접 선출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지방관이 황제나 정부에서 임명하는 지방관보다 훨씬 낫고, 훨씬 자기 소신껏 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4월 15일~4월 16일에는 그는 독립신문 사설에도 지방관을 백성들이 직접 선출하게 할 것을 서술하였다.

189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발행신문인 독립신문이 자치단체장의 주민직선제를 골간으로 한 지방자치제를 주장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져 관심을 끌고 있다. 독립신문 논설에는 “관찰사와 고을 원은 정부의 내각 대신이나 협판(協辦 ·구한말 당시 궁내부와 각 부의 차관급)이 천거할 것이 아니라, 지방 백성이 투표로 뽑아야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1991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91년 5월 이 내용을 발견한 경북대학교 물리학과 주창호 교수(54 ·양자역학)는 “독립신문 논설을 쓴 것으로 알려진 徐載弼 박사 과거의 1세기 전에 자치제를 거론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주창호 교수는 한국교회사 관계 자료를 모아 오던 중 1991년 5월 독립신문 논설에서 지자제 주장 대목을 발견했다.

7.4. 아관파천 전후[편집]

한편 귀국 직후 그는 부패한 외척 출신을 관리로 중용하고 무속인을 신봉했던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멸했다. 또한 수구파 대신들의 탐욕과 비리를 거침없이 질타, 지적하는 한편 참정권을 그릇된 것으로만 이해하고, 갑신정변에 부정적이었던 민중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다. 윤치호에 의하면 서재필은 3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조선 사람을 어린애나 미개인 다루듯이 하여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가 미국인이어서 다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서재필은 매사에 지시하기를 좋아하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력적이고 단호하고 기민했다. 원로 대신, 젊은 관료 할 것 없이 마치 버릇없는 애들을 타이르듯 말하거나 다루었으나 이들은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 윤치호 일기

윤치호, 유길준은 그에게 시정과 자제를 요구했지만 오히려 서재필의 말을 듣고 깊이 공감하는 점을 느끼면서 훈계를 그만둔다. 미국공사관 공사 알렌은 그에게 분노하더라도 겉으로는 웃으며 좀 외교적인 태도를 가지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고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시민단체인 독립협회를 만들고 그 첫 사업으로는 독립문 건립 계획을 수립한다. 그는 또 고종에게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자주권을 주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독립협회의 동지들에게도 조선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민족이며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국가를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어서 빨리 청나라와 결별해야 된다. 그게 이 나라가 사는 길이다. 그리고 고루한 중국 서적과 유교 서적은 쓰지 말아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일본은 조선의 유길준, 윤치호가 국민들을 개화한다는 취지로 신문을 제작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반외세, 교육 계몽, 자립, 실력 양성 등을 논설로 내보내는 것을 내심 경계하였다. 아관파천을 단행하는 고종을 보고 그는 조선에 가능성이 없음을 간파하고 단념하게 된다. 민중들은 개화파를 왕실에 저항하는 역적 정도로 취급하였고, 계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 민중의 냉대에 좌절한다.

1896년 3월 14일, 그는 중추원 고문으로 재직 중이면서 신문 담당 부서인 농상공부 임시 고문을 겸하게 되었다. 학부에서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에게 신문을 구독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내부에서는 각 지방관청에 구독을 명령함은 물론 우송 상의 혜택까지 부여했다.[77] 아관파천 전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침투에 한계를 느끼던 러시아는 조선에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확대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폈다. 이에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여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언문'을 공식적인 인쇄 언어로 채택하며 띄어쓰기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는 교육 확대 및 산업 발전을 강조하였고, 그를 위해 의무 교육 도입,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 식생활과 위생의 개선에 대한 여러 가지 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에 의존하면 조선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외부적으로는 중립 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일반 민초들이 쉽게 알아보게 하기 위해 한글 단어 사용을 신중히 고려하였고, 국문학자인 주시경을 영입하려 했고,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할 수 있었다.[86]

'독립신문'은 근대적 여론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87] 독립신문 창간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정동구락부, 정동파, 친미파 등으로 불린 영어파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뤄졌다.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 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 1898년 7월 4일자 독립신문에는 영어 교습 광고도 실려 있었다. "대한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고자 하나 학교에는 다닐 수 없고, 또 선생이 없어서 못 배우는 이가 많다 하기로, 영국 선비 하나가 특별히 밤이면 몇 시간씩 가르치려 하니, 이 기회를 타서 종용히 영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독립신문사로 와서 물으면 자세한 말을 알지어다."라고 발표했다.

서재필은 조선인의 의식부터 개조해야 진정한 독립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고, 민권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당대에는 민주주의 체제의 등장이 어렵다고 내다봤다.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주의자들은 '독립신문'에서 “조선인의 타고난 체형은 동양 인종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자랑하거나 한때 ’상것’이라고 금기시했던 상민들의 석전(돌 싸움)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했다.

또한 그는 독립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서구식의 개선된 생활도 보급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1896년 11월 14일자의 독립신문 칼럼에서 그는 조선사람들의 매너없는 행동을 지적, '남의 집에 갈 때 파,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은 아니며(실례이며),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하고 지나가야 한다'고 했고, 1896년 10월 10일자에서는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만 먹지 말고 소고기와 브레드도 먹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외부 문명과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독립신문이 반일 사상을 고취한다며 조선 정부에 압력을 놓았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독립신문을 일본이 서재필과 필진들을 앞세워서 운영하는 것으로 판단,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독립신문 후원금은 점차 감소, 끊어지게 된다.

1897년(건양 2년) 3월 23일 조선 정부는 조선 정부의 외국인 고문관인 프랑스인 찰스 르 장르드 그찰스 레이트하우스, 존 맥레이 브라운와 서재필을 대한제국 중추원의 헌법개정 자문기관인 중추원 교전소 위원에 임명했다.

그는 독립신문을 통해 국내외의 사정, 고종과 대신들,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 국외의 정세를 한글로 번역하여 보도하고 그 옆면은 영어로 된 기사를 보도했다. 그는 조선 사회의 혼란의 원인을 무능한 탐관오리들과 인맥, 문벌, 연줄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또한 지방관이나 아전 등이 뇌물수수를 한 것이 적발되면 바로 신문에 보도하거나 특별 호외를 내서 사건의 전말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는 매관매직과 인맥, 문벌로 채용된 인사들, 탐관오리들이야 말로 민중의 고혈을 짜는 자들이라며 '매관매직을 하는 탐관오리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여야 하고, 그 시체를 실은 배도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시켜야 한다.'며 신랄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7.5. 교육, 청년 계몽과 토론 문화 보급 활동[편집]

1896년 내내 계몽강연 활동과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매주 비용 한푼 받지 않고 무료로 배재학당에 출강해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등의 젊은이들에게 세계사를 강의하면서 자유 민주주의와 참정권, 인권 개념, 사회 계약론 등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 때 이승만도 그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96년 11월 학생들은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 협성회에도 이승만, 김규식 등의 학생지사들이 모여들었고, 서재필은 학생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그 밖에 그는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조선 팔도를 순회강연하기도 했다. 조선을 순행할 때 그는 항상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돌아다녔다. 그는 배재학당과 언더우드 학당의 학생들에게 수업 이외에도 별도로 논리적 설득의 필요성과 토론하는 방법을 틈틈이 가르치기도 했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 2부는 갈고 닦은 협성회 토론 시범을 보이는 차례였다.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 그 순간 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서 영어로 연설하여 우등상을 받았을 때의 감격을 다시금 느꼈다 한다.

그는 '이제 이 학생들로 크게 변하여 조선을 위한 큰 인재가 될 것이다.'라고 확신하고 토론 기술과 방법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교정시켰다. 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인근 배재학당으로 가서 다과로 연회를 열었다. 서재필은 귀국하며 세웠던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연설했다.

"오늘 여러분은 1년간의 공부를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크게 배웠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여러분에게서 크게 배웠습니다. 배움의 자세는 진지했고, 배움의 목표는 웅대했습니다. 그 기상과 성실을 토대로 여러분은 이제 조선을 크게 변화시키는 길로 나아가리라 굳게 믿습니다. 비록 오늘로 배재학당에서의 수업은 끝나지만 제 마음은 영원히 여러분 곁에서 함께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서재필의 연설이 끝나자 사은의 예로 준비한 선물인 영어 사전을 정중히 올렸다. 이때 그를 도운 이승만과의 관계는 1945년, 해방될 시기까지 한미협회를 주최하는데도 함께하며 오래도록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1920년경에 이르러 서재필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이기도 한 이승만에게 이군이라는 호칭 대신 이형 또는 우남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역시 서재필을 선생님이라 칭하였다.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 이후에도 서재필은 협성회 활동과 계몽강연을 지도하며 전국을 순회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토론하는 방법과 절차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했고 초기에는 억지로 참석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토론하는 문화가 조성되었다. 서재필은 한국에 민권 사상, 참정권, 민주주의 시민의식이 싹트려면 일단 다른 사람의 뜻을 듣고, 토론, 조절하는 능력부터 배양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런 성공적인 토의 활동은 윤치호, 박정양, 유길준 등을 고무시키게 된다.

7.6. 독립문 건립과 독립협회 활동[편집]

서재필은 1896년 초부터 서울 영천에 있는 영은문이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치욕스러운 존재라고 하여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이 일을 위해 1896년 7월 2일 이완용을 비롯 남궁억·박영효·김가진·안경수 등과 함께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다. 독립협회의 지도자는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양기탁, 이동녕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서재필은 독립협회 고문에 선출되어 윤치호와 함께 협회의 제반사무를 총괄하였다. 윤치호는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 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

1897년 11월 20일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 맞은 편에 '독립문'이 들어섰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 입수한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그린 그림을 소지하고 있었다. 독립협회가 기금을 모아 완공한 독립문은 서재필이 가지고 있던 화첩 중에서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그 규모를 축소하되 모양만은 똑같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특별히 초빙한 건축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하였다. 후일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곽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담당했다. 토목·건축공사는 한국인 건축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고 중국인 노무자들이 노역을 맡았다.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후일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의 출신과 관련, 서재필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인 기사라고 언급했다.

그는 사대사상의 증거인 한성부 서대문방 현저동 모화관과 영은문을 헐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모화관은 조선 말기인 1897년 서재필 같은 독립협회 인사들에 의해 '독립관'으로 개축돼 독립협회 회관으로 쓰였다.

또한 독립협회보를 발간, 자유 민권활동과 참정권,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는 조선이 신라, 고려, 조선의 1,200년간 중국의 속국이자 종으로 살아왔다며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천명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만민공동회 개최 (1897)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96] 그러나 정부 관료들은 그가 황제에 불충하는 선동을 한다고 비난했다. 대한제국 조정의 수구파는 서재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가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해코지하였다가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중단하게 되었다. 한편 서재필은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배우고 유학을 가서 신문물을 보고, 보는 시야를 넓혀야 된다고 하였다. 이승만과 김규식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한 것도 서재필이었다.

1897년(고종 34년) 7월 30일의 한 강연에서 서재필은 "인간의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97]"는 발언을 하였다. 서재필은 인간의 권리는 하늘이 내린 것(천부인권)이며 아무런 잘못 없이 누구도 다른 인간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대한제국 중추원에서 대신의 물망에 적합한 인사들을 추천하고 그 명단에 서재필이 들어있는 것을 본 대신들은 그가 중추원을 사주하여 체제 전복을 꾀한다고 무고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배재학당과 언더우드 학당을 비롯, 학생 청년들을 모아 배재학당 회관에서 토론, 토의하는 법을 비용없이 무료로 가르쳤다. 또한 원산에 있는 원산학사에도 매주 주말에 방문하여 토론 기술과 화법을 가르쳤다. 그는 배움을 청하러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신분 차별을 두지 않고 받아들였다.

7.7. 노비 해방 운동 추진[편집]

서재필의 귀국 직후부터 노비 해방문제를 상의하던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의하고, 1897년 10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하고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의 토론에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론을 공론화시켰다.

1897년 11월 1일의 제8회 토론회의 광경을 보면, 약 500명의 회중이 참석한 가운데 먼저 회원의 호명이 있었고, 다음 지난 회의 토론회 기록의 확인이 있었으며, 내빈 소개와 신입 회원 소개가 있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회장에게 노비 해방에 대한 것을 건의하였고, 11월 1일 독립협회 회의의 주제로 채택된다. 회장이 토론회의 주제, 이날의 주제는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 상에 대단히 불가하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전 주의 선정에 의거하여, 주제에 대한 찬성편은 힘껏 주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주제에 대한 반대편은 토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발언을 했으며, 토론회에 참석한 일반 회중은 토론에 자유롭게 토론하였다.

이 중 한 발언자가 용역은 '하나의 필요한 제도이며 노비 제도는 그러한 용역의 하나라고 발언하자, 회중의 하나가 일어서서 토론자가 명제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않다고 의사 규칙 위반을 들어 항의했으며, 많은 회원들이 주제의 찬성편에 서서 발언하였다. 1897년 11월 1일 윤치호는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는 연설을 하고,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들의 참상을 들어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주제에 대한 회중의 의견을 투표에 붙인 결과 만장일치로 주제에 대한 찬성이 의결되었으며, 주제에 찬성한 사람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가 가결됨으로써 토론회를 끝내었다.[100]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한성부의 양반 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각각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다녔다. 시중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위험한 사상이며 반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해괴한 요설, 궤변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97년 11월 1일의 노비해방에 대한 기습 토론 이후 노비 해방 풍조가 한국사회에 점차적으로 확산되었다.

1898년(고종 35년) 1월 초, 수구파 대신들이 보낸 자객이 서재필의 거처를 내습했으나, 그가 고용한 미국인 경호원의 총격을 받고 달아났다. 1898년 3월 8일 김홍륙 등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하자, 정교와 최정식 등은 그에게 시골로의 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

은신처에서 그는 척신파 대신들의 김홍륙 사건을 계기로 연좌 제도와 노륙형을 부활하려는 움직임을 규탄, 항의하는 소를 지어 올렸다. 은신해있던 그는 윤치호와 함께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를 주관한다. 1898년 3월 16일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수원부 유수로 임명되면서 공직과 협회 직을 겸할 수 없으므로 서재필이 회장이 되었다. 결국 그해 5월 14일 서재필이 추방령에 의해 용산을 출발, 미국으로 추방되자 그는 윤치호에게 독립협회의 권한을 일임하게 된다.

7.8. 정부의 탄압과 외세의 공격[편집]

당시 주조선러시아공사 스페이어는 독립협회가 러시아의 절영도 할양 요구를 반대하는 구국선언 상소를 올리고 언론에 공표한 것을 두고 주조선미국공사 알렌을 방문해 항의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강력히 요청했다. 러시아 공사관의 계속된 항의에 결국 알렌은 서재필이 봉급을 받는 즉시 출국시키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주미러시아 대사 캐시니 백작은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에게 이를 전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요청했다. 일본 역시 일본의 정부고문으로 와 있는 미국인 윌리엄스를 설득, 미국 정부에 서재필의 소환을 강력히 요청하게 했다.

친러정권과의 대립 외에도 보수파가 다시 정권을 잡자 서재필을 사형에 처하거나 살해할 모의가 진행되었으나 미국 시민권자라는 외교문제 비화에 엮일 수 있다는 외교에 밝은 일부 보수파 인사들의 설득으로 살해위기는 모면되었다. 고종 황제에게 그는 자신을 "외신"이라 칭했고, 고종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등, 완전히 미국인 행세를 한 점 역시 눈밖에 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1898년 러시아 및 청나라, 일본 등의 서재필 추방 압력과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정부의 권유로 중추원 고문 직에서 해고되고, 1898년 5월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미국정부는 서재필이 지도하는 독립협회가 열강의 이권침탈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그가 미국 시민권자임에도 그와 같은 행위를 함을 그를 불온시하기 시작했다. 한편 귀국 직후부터 그의 신문 발행과 토론, 참정권 주장을 이상한 사상으로 여긴 일부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가 서양에 가서 이상한 약물을 먹었다, 귀신이 씌워 돌아와서 사람들을 오염시킨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훗날 서재필은 '어느 날 미국 공사 알렌이 나를 찾아와 황제와 정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니 신변에 위해가 미치기 전에 속히 가족과 함께 귀국할 것을 권했다. 나는 내가 떠난 뒤라도 성과를 거둘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할 수 없이 다시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하였다. 서재필은 거절했고, 주조선미국공사 알렌은 서재필을 귀국시키기 위해 그의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의 친정어머니를 설득하여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를 보내게 했다. 뮤리엘이 조속한 귀국을 재촉하는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촉하면서 그의 출국을 요청했다. 그는 이 사실을 알렸고, 독립협회는 조정에 항의공문을 발송했으며, 남대문 앞에서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열고 정부의 행위를 강력 규탄했다. 서재필은 자신을 고문 직으로 초빙할 마음이 확고하다면 체류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대한제국 정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자객을 보내 자신을 암살 또는 제거하려한 대한제국 정부와 친러파, 친일파 정객들, 자신을 정신이상자, 역적 취급하는 민중들에 대한 강렬한 반감과 적개심을 품은 서재필은 한때 독립신문을 일본이나 러시아에 매각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 이상재의 만류로 독립신문 매각은 단념한다.

7.9. 의회설립운동 참여[편집]

1898년 3월 서재필·윤치호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간에 의회설립문제가 논의되고, 4월 3일 독립협회토론회에서 ‘의회원을 설립하는 것이 정치상에 제일 긴요함’이라는 주제로 의회의 필요성을 공식 거론함으로써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은 표면화되었다.

독립협회 고문 서재필은 1898년 4월 30일자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세계 개화 각국의 선례에 따라 의회를 설립하면, 첫째 정책의 결정업무(의회)와 집행업무(내각)가 분업화되어 국정에 효율성을 기할 수 있게 되고, 둘째로 민의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어 국민과 국가가 일체감을 갖게 되며, 셋째로 관과 민이 협력하여 국가와 왕실의 기초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취지하에 의회설립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1898년 7월 3일과 12일 독립협회는 구주 각국의 상하의원의 설치는 만국통행의 규범이라 하고, 홍범의 준행과 인재의 등용 및 민의의 채용을 주장하면서 의회설립을 완곡하게 주장하였다. 7월 중순에 이르러 의회설립문제와 관련하여 조야의 여론은 일단 중추원의 의회식 개편으로 기울어졌고, 7월 하순에는 중추원을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개편한다는 설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와 민중이 수구파의 7대신(신기선, 이인우, 심순택, 윤용선, 이재순, 심상훈, 민영기)을 탄핵하여 모두 퇴진시키고 내각교체를 단행시킴으로써 의회설립운동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운동이 계획대로 진전되자 국정의 기본방향을 관민이 협의하기 위한 관민공동회 개최를 정부에 제의하였다. 1898년 10월 29일 관민대공동회에서 6개조의 국정개혁강령(헌의6조)을 결의하고 정부대신을 통해 국왕의 재가를 얻었다.

그러나 1898년 11월 4일 밤 조병식·이기동 등 수구반동세력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고종을 충동하여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전복시키고 독립협회를 혁파시켰다. 이로써 눈앞에 둔 의회식 중추원의 실시도 좌절되고 말았다.

7.10. 출국[편집]

1897년에 들어와서 러시아의 적극적인 간섭정책과 대한제국 수립을 통한 황제권 강화는 서재필과의 대립을 야기하였다. 이때부터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서재필은 남은 계약기간의 봉급을 모두 지불하면 해약하고 출국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조선정부에 계약 위반과 해촉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계약 위반에 따른 보상으로 10년 계약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왔으나 아직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월급 2만 8,200원과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00원을 포함해 총 2만 8,800원을 조선조정에서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조선 조정에서는 비용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부분 수용했다. 그는 2만 4,400원의 위약금을 지불받았다.

그는 윤치호에게 독립신문을, 이상재, 양기탁, 이승만, 이동녕 등에게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에 윤치호는 서재필이 출국하면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독립신문 등을 3년도 유지시키기 어렵다고 했는데, 그는 최소한 1년 이상은 유지시킨다면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유지가 어렵더라도 1년 이상만 협회 등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1898년 1월 15일 가토 변리공사가 西 외무대신에게 보낸 서신에는 서재필이 독립신문의 소유권을 일본에 매각하려던 계획과 일본 공사측이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104] 하지만 1898년 5월 23일 가토 변리공사의 서신 내용에 따르면 독립신문-일본 쌍방이 각각 여러 가지의 사정으로 인하여 독립신문의 양도는 성사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추진하는 등 과거사 규명에 앞장서온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민철 연구실장은 "서재필과 독립신문이 친일적 논조를 펼친 것은 러시아의 침략을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1898년(고종 35년) 5월 14일 그는 독자와 동포들에게 올리는 인사말을 남기고 독립협회 간부들의 환송 속에 서울서 낳은 큰 딸 스테파니와 부인을 대동한 채 용산에서 인천행 배에 올랐다. 5월 27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해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향했다. 자신을 박해하고 생명을 노린 대한제국 조정에 대해 분노한 서재필은 주변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없다고 하여 가는 것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인천항을 통해 한국을 떠난다. 한편 그가 조선 조정을 "귀국 정부"라고 지칭하자 예상 외의 발언에 그를 전송하러 나왔던 윤치호, 이승만, 박영효, 박정양, 이상재, 김규식 등은 충격을 받고 말문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에 입사한 김규식 등 청년들에게 미국으로 유학할 것을 설득, 권고하여 그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내는 데 성공한다. 이승만, 김규식 등이 미국으로 유학한 뒤 이들의 학비를 일부 송금해주기도 하였다. 그가 출국하고 그해 12월 26일 독립협회도 결국 해산되고 만다.

1898년 12월 10일 최익현이 서재필, 유길준의 사형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날 최익현의 상소를 필두로 1900년까지 거의 연일 서재필과 유길준, 김윤식 등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상소가 올려졌다. 1900년 윤용선은 그가 을미사변에 개입된 인물이라며 처벌할 것을 청하는 상소까지 올리기도 했다.

8. 2차 미국 망명[편집]

1898년 4월 미국으로 환국, 4월부터 1899년 8월까지 미국-스페인 전쟁에 미국군 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하였다. 이때 그는 미군 병원선 하지 호에서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부상병의 진료와 수술을 담당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뒤 노동과 상점의 아르바이트로 활동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바로 필라델피아 대학교 의학부로 돌아가 해부학 강사가 되어 해부학 강좌를 담당했다. 필라델피아 대학의 해부학 강사 직은 1914년까지 출강하였다. 1899년말부터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위스터 연구소에서 병리학 연구원으로도 근무하였다.

필라델피아 대학의 해부학 강사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연구원으로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1899년 조선에 있던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으로부터 독립협회가 실패했다는 전보와 연락을 접하였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참정권 요구 활동 등을 백성들은 사갈시하며, 갑신정변을 일으키려 한 역적 정도로 취급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운동의 실패에 크게 좌절, 민중에 대한 실망감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서재필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나중에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해리힐먼 고등학교를 하숙하며 다녔던 윌크스베리에서, 힐맨 아카데미 고등학교 시절의 일 년 후배 해롤드 디머와 함께 문구 및 인쇄 사업을 하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를 설립하였고, 1905년에는 해롤드 디머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 윌크스 베리 본점을, 서재필은 '디머 앤 제이손 상회' 필라델피아 분점을 맡아 경영하였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한국 정부에 조약은 부당하고 조선이 국가로서의 능력을 상실함을 의미하니 지금이라도 조약을 파기하라며, 을사 조약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는 윤치호에게 편지를 보내 을사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윤치호로부터 이미 정부의 고관들이 나라를 팔아치우기로 작심한 것 같다는 내용의 답장을 받았다.

8.1. 양자 입양 탄원과 거절[편집]

1898년 12월 미국으로 2차 망명을 떠난 후 서재필은 대한제국 정부에 상소문을 보내 양자를 들여 가계를 잇도록 허락해줄 것을 청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1898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보낸 이 상소문은 김원홍에 의해 발견되었고, 1982년 9월 8일 김원홍은 자신이 소장한 것을 국사편찬위원회 최근영 교육연구사에게 공개하였다.

상소문의 내용은 주로 대가 끊긴 가계를 양자로 잇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그의 탄원들을 거절했다. 이후 조선 사회와 조선인에 대해 분노와 환멸감을 느끼게 된 그는, 해방 후 양자 또는 봉사손을 들이라는 친척들의 권고를 스스로 물리치게 된다.

8.2. 을사 조약 전후[편집]

1905년,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온 이승만을 만나서 테오도어 루즈벨트에게 전달할 청문서의 영문을 유려하게 고쳐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 해 8월 5일, 서재필은 주미국 조선공사 김윤정에게 이승만을 소개하는 소개장을 하나 써 주었다.

1906년 1월, 윤치호가 외무협판 직과 외무대신 사무서리직을 사퇴하자 그는 윤치호에게 전보를 보내, 현직에 있으면서 정세를 바꿔보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하였다. 윤치호는 최소한의 양심마저 상실한 매국노들의 소굴에 더 이상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답장을 보냈다. 답장에서 윤치호는 당시 고위 관리들은 최소한의 양심조차 상실한 매국노들, 중간급 관리들은 세금만 축내는 무책임한 기생충들이라며 질타하였다.

1913년까지 해롤드 디머와 동업을 계속하였고, 1915년부터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적으로 필립 제이슨상회를 운영했다. 그 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1924년까지 인쇄업과 각종 장부를 취급하면서 사무실용 가구 등을 파는 필립 제이슨 상회를 경영했다. 그의 회사는 필라델피아의 상업 중심지인 1537 체스트넛 가에 소재하였다. 이후 필립 제이슨 상회는 본점 외에 필라델피아 시내 두 곳에 분점을 둔 종업원 50명의 큰 사업체로 성장하였다. 자신이 기존에 경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의 장사가 잘 되어 어렵지 않은 나날을 보낸다.

1909년 1월초, 신문 보도와 전화 연락을 통해 신돌석이 1908년 11월 잡혀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신돌석의 은신처를 신고, 제보한 사람이 조선인들이라는 것과, 신돌석이 평민 출신이란 점을 불쾌하게 여긴 양반 출신 의병들이 일본헌병에 자수했다는 점과, 현상금에 눈이 먼 지역 주민들이 신돌석의 은신처를 알려준 점, 신돌석의 외척 등도 제보에 가담한 점을 알게 되면서 절망한다. 이후 한동안 조선 독립에 대한 관심을 접고 병리학과 해부학 등 의학과 연구 활동, 문구점 영업에 전념하였다.

8.3. 한일 합방과 독립운동 준비[편집]

1910년 8월 미국 체류 중 한일 합방의 소식을 접하였다. 서재필은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개혁 인사들을 제거하고 척신들로 정부를 채웠으며, 내부부터 부패한 이상 어쩔수 없다고 봤다. 더구나 왕족들이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고 합방 은사금을 받는 것을 보고 실망,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는 친구 윤치호와 유길준이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는 윤치호, 유길준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미국으로 건너올 것을 종용했지만 윤치호는 가족을 책임져야 됨을 들어 거절하였고, 유길준은 병으로 가지 못했다. 1914년 9월 유길준의 부음 소식을 듣고 일제 치하 조선에 입국했다가 문상 후 바로 출국하였다.

1916년,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의논하기 위해 노백린이 미국 본토로 건너왔다. 그러나 무장 독립론을 주장하던 노백린의 견해에 그는 회의적이었다. 노백린은 캘리포니아에서 재미동포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 등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아 비행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재필은 약간의 경비와 무기상 등을 소개하면서도, 비용 부담과 장비 구매, 위험한 일을 기피하려는 조선인들의 소극성 때문에 장기적인 무장 투쟁은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한일 합방을 자신을 황제에 불충하는 역적으로 보던 조선 민중들에게 당연한 대가로 받아들였다. 서재필은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독립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직후인 1918년 12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회장으로 있던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에도 드러난다.

“오늘날 조선의 백성은 승전국 일본의 노예가 되어 구차한 명을 보전하고 있소. 그럼에도 아직 누구 하나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일본의 학대에 저항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려는 자가 없소. 그러니 바깥 세계에서 조선인을 위해 불쌍하다며 동정을 표하는 자가 없는 것이오.” 

— 1918년 12월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

그 뒤 그는 상점 경영과 조선인 교민 사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 12월 19일에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등에게 연락하여 영문잡지 발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파리강화회의 파견 문제로 잡지 발행은 뒷날로 연기하고 만다.

1918년 11월 독일이 일단 항복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서재필과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

8.4. 독립운동 참여[편집]

재미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는 미국내 한인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내 한인 교포들에게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2월 말 필라델피아에 방문했다가 라디오와 신문, 뉴스 등으로 3·1 만세 운동 소식을 접하게 된다. 3·1 만세 운동 당시 자신이 체포되거나 죽을 것을 알고 만세 시위에 뛰어든 학생들, 기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손목에 칼을 그은 학생들의 의거 소식을 접한 그는 깊이 감동한다.

“3월 1일의 대한독립 만세소리는 한라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들렸다. 나는 필라델피아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 조선의 독립운동이 이같이 급속도로 진전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메스를 버리고 시험관을 내던진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3.1 운동 이후 미국내 한인들은 단체 조직을 결정하고 서재필한테 대표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사양했다.

3·1 만세 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그해 3월 중순 서재필은 자신의 전 재산을 정리, 독립 운동 자금으로 바치고, 동시에 미국 잡지 《이브닝 레저 (The Evening Ledger)》지를 찾아가 인터뷰[78], 조선의 문제를 다룰 것을 설득하여 승락받았다. 또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군국주의를 규탄하는 자료와 논설, 칼럼을 기고하였다. 3.1 운동 직후,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7만 6,000 달러를 모두 독립운동에 투입하였다. 이때 그는 병원 외에도 60~70명의 종업원을 둔 문방구점과 분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파산하였다.

3.1 만세 운동 이후 서재필은 조선인들에게 독립의 의지가 미약하게나마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독립 운동에 대한 방략을 구상한다. 교육을 통해 문화, 기술 수준을 높이는 것과 미국과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 조선인 인력의 해외 진출을 통해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확산시키는 것 등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치제라도 실시한 뒤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독립하는 단계적인 방법도 대안의 하나로 검토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호응하고 한인 교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이승만은 한인 교민대회를 기획한다. 본래 서재필은 출판사를 차릴 계획이었으나 이승만의 설득에 의해 이 대회의 의장으로서 참가하게 된다.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소집되었고 연합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13일에서 15일까지 3일간 열린 이 행사에는 이승만, 정한경, 유일한, 조병옥, 장택상, 허정, 국민회 간부 등 150여명의 한인들이 참여하였으나 그는 열강들이 한국 문제에는 무관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회가 끝나고 그는 곧바로 전미 "한국 친구회"를 조직, 조선인 교포들을 결속시켰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아무런 이득 없이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일본과 싸울 이유는 없다고 내다봤다.

제1차 한인연합회의 대회 소집 이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외교위원회가 설치되자 구미위원회 산하에 한인통신부를 설치하고, 서재필은 영문 기관지 한국평론을 월간으로 발간했으며 '어린이', '순난자', '대한정신' 등 영문 소책자를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이 책들은 서재필의 자비와 여러 한인 지사들의 후원비로 발행되었으며, 미국에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독립의지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무료 배부 및 지방순회강연의 홍보책자로 활용되었다.

1919년 8월 한국위원부(임정 구미위원부의 전신)의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3.1 운동 후, 서재필은 자신의 상점을 보살피지 못했다. 드디어 상점은 파산하고 말았다.[56] 상점의 파산으로 생계에 곤란을 겪었지만 아내 뮤리엘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고, 그는 아내의 배려에 깊이 고마움을 느끼며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생계는 아내인 뮤리엘의 몫이 되었다.

같은해 8월, 서재필은 제1차 한인의회에 대표 기도자로 참석한 플로이드 톰킨스 목사 등 기독교인사들을 설득, 한국친우회를 조직하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구미외교위원부의 한국통신부에 한인연합대회에 연사로 초빙되었던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자유독립 원조 및 한일기독교도의 선교자유 보장과, 한인이 당하는 일본인의 악형을 영구히 방지하며 미국의 일반 국민에게 한국의 진상을 전파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한국친우회는 당시 미국내 정계 및 학계에 포진한 친일세력에 대항하여 조직된 기독교 네트워크로 미국 내 20여개 도시에 지부를 두었으며,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도 각각 하나의 지부를 두었다. 한국친우회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박해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고, 미국의 정치인사들이 이를 시정하기 위해 일본에 압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해 9월 한국위원회가 임정 구미위원부로 개편되었으나 생계 문제로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9월 구미위원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는 생계에 종사하면서 구미위원부의 외곽 단체인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 활동을 병행하였다. 한국친우회의 활동은 이승만의 구미외교위원회의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자신의 전재산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예순이 넘은 고령으로 생계를 위해 다시 본업인 의사로 돌아가 일해야 했다. 그러나 1919년 9월 구미위원부 고문이 되면서 1920년 무렵 그는 다시 한인단체 활동에 다시 참여한다.

1920년 초, 독립단사무처를 설치하고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114] 독립단 사무처는 1922년 재정난으로 문닫을 때까지 외교 활동과 홍보 및 독립운동 기금 모금 활동을 했다. 이외에도 서재필은 한국위원회와 구미위원부 활동, 국민회 등에 강연활동, 칼럼 기고 활동을 병행하였다.

9. 한인단체 활동과 독립운동[편집]

9.1. 미국에서의 독립운동[편집]

3·1 운동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을 가능성을 보게 되었고, 자제단을 조직해서 이를 진압하려 한 박중양 등과는 절교한다. 1920년 2월, 이승만에 의해 구미위원부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구미위원부 위원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현순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갈등하기도 했다.

1920년 2월 26일 구미위원부가 재무부 산하의 미주 지역 재무관서 기능을 갖게 하고, 그 위원인 서재필을 재무관에 임명했다.[115] 1920년 3·1 운동 기념식을 뉴욕에서 준비, 1920년 3월 1일에는 한국친우회 뉴욕지부 행사에 약 1,000여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한국의 3.1 만세운동과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1921년에도 뉴욕에서 3·1운동 기념식을 여는데 기여하였다.

미국에서 일본이 벌이고 있던 조직적 선전활동에 대항하고, 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사무실에 한국통신부를 설립한 후 Korea Review를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이 잡지를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1882년 맺어진 조미수호조약을 준수하라고 요구하였다.

1921년 4월 18일, 이승만이 상하이에서의 문제로 바빠짐에 따라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6월 29일, 이승만이 상하이 문제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임정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돌보며 업무를 계속해 나갔다.

서재필이 가장 기대했던 것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개최된 워싱턴 군축회의였다. 1921년 8월 일본의 해군력 팽창을 억제하고 중국 침략을 견제하려는 취지에서 미국이 주최한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 대표로 워싱턴에서 1921년~1922년동안 열리는 평화군축회에 파견되었다. 이때의 태평양회의 주제는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일본의 해군력 강화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라는 것을 지인을 통해 알아냈고, 그는 이 기회에 일본군의 철수와 조선의 독립을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 군축회의의 '조선인특파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단장은 이승만이 맡고 서재필은 부단장으로 임명되었다.

9.2. 워싱턴 군축회의와 좌절[편집]

평화군축회의 직전 회의장에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 당위성을 설명한 홍보물들을 태평양 연안 국가 대표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회의 개최 후 그는 조선 독립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줄 것을 요구하는 《한국독립청원서 (Korea's Appeal)》을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였지만,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었다. 파리평화회의에서 서재필은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일본측 대표 도쿠가와 이에사토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각국 대표와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논의는커녕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자 실망하여 경제난으로 한인통신부와 한국친우동맹에 관한 사업을 정지한다는 보고를 구미위원회로 보냈다.

1921년 11월부터 그는 워싱턴 9개국 군축회의에 나가 일본의 탄압을 호소했다. 그는 독립운동 지원에 많은 돈을 지원하는 바람에 이내 파산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워싱턴의 군축회의에서는 조선 문제를 상정조차 하지 않았고, 강대국 위주의 약육강식 논리가 적용되었다. 서재필은 이후 깊은 좌절에 빠져 이후 별다른 독립운동과 항일 언론 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1922년 1월 1일 조선 독립을 설득하는 서한을 들고 오하이오 주 매리언 시에서 휴양 중인 워런 하딩 미국 대통령을 찾아갔으나, 그의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하고 면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1922년, 조병옥이 뉴욕 주에 한인교포들의 모임인 한인회를 조직하자, 이승만과 함께 이를 지원하였다. 한편 한인회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시간적 여유를 얻은 조병옥은 서재필을 정치적으로 보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인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국민회 이탈파 및 동지회 계열이 갈등하면서 허정 등 일부 한국인 청년들은 서재필을 찾아 중재를 요청하였으나 서재필은 호응하지 않았다.

결국 재미한인들 간의 갈등은 조절하지 못하는 문제와 생계 문제까지 겹치면서 활동의 어려움을 겪었다. 1922년 2월 9일 구미위원부 위원직을 그만두고,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활동에서 손떼고 사업에 전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계속 활동을 전개하다가 결국 그해 7월 코리안 리뷰 7월호 발간을 끝으로 한국통신부의 활동은 중단되고 만다. 한국통신부는 문을 닫게 되었으나 대신 한국친우회만큼은 살리려는 그의 노력으로 조병옥, 허정과 국민회 계열에서 인수하여 친목단체로 계속 활동하게 된다. 1905년부터 잡화상을 경영하며 재산을 모았던 그는 독립운동 자금과 인쇄및 홍보활동, 한국인 대표단 파견 등의 경비로 재산을 쓰다가 파산을 맞이하게 됐다. 이때 일제강점기 치하의 한국에서 동지인 윤치호가 보내오는 약간의 생활비와 동포들이 기부하는 기탁금으로 겨우 연명해나갈 수 있었다. 상점을 문닫은 그는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며 취직을 준비한다.

9.3. 사업 실패와 생계 곤란[편집]

당시 활동에 필요한 홍보책자들은 모두 그의 사업체에서 인쇄하였으나 그는 꼬박꼬박 인쇄비를 받았다. 그리고 서재필이 주도하는 홍보사업에 만도 모금액 중 1만 2천 9백69달러가 지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던 서재필은 1922년 이후 양탄자를 취급하는 이탄뉴상회에 입사, 이탄뉴상회 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간간히 한인단체 활동에 관여하였고 수시로 자문을 청하는 이승만, 안창호, 조병옥, 허정 등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해 몇 년동안 사업을 돌보지 못했고, 개인 재산을 많이 지출함으로써, 1924년 법적인 파산을 맞게 된다. 파산으로 인해 극도로 생계가 곤란해졌다. 그는 생계 조달을 위해 막노동을 하기도 했고, 상점의 점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파산한 가정 경제력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재필은 다시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돌아가 연구를 다시 계속하기로 결심 하였다.

1925년 6월, 7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 회의가 개최되자 한국인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하와이로 건너갔다. 한국에서 온 송진우, 신흥우, 김양수, 유억겸, 김종철 등과 함께 윤용희[118], 필지성 등을 데리고 7월 1일부터 7월 14일까지 태평양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식민통치의 잔혹함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에 일본 측 대표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므로 국제사회가 조선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하자, 그는 미국이 필리핀을 속국으로 하고 영국이 캐나다를 속국으로 하고 있으나 캐나다와 필리핀의 발언권을 차단하지 않고 태평양 회의에 참석하게 한 점을 들어 일본측 대표의 주장을 논파했다. 이는 논란이 되었고, 캐나다, 필리핀 등 각국의 대표들이 한국 측 대표단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다시 배편으로 출발, 되돌아오는 길에 샌프란시스코, 스탁톤, 다뉴바, 리들리, 로스앤젤레스 등지에 있는 한인 교민 사회를 방문하여 재미 한국인 교포들을 면담하고 위로, 격려하였다.

9.4. 유한양행의 초대 사장[편집]

1924년 5월 유일한이 정한경 등과 함께 류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서재필을 초대 사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1926년 12월 10일까지 류한주식회사의 사장이었다. 유일한은 초대 사장으로 서재필 박사를 모시고 싶다고 제안했고, 서재필도 흔쾌히 수락했다. 당시 자금은 유일한이 제공했고 서재필은 경영을 담당했다. 서재필은 회사명을 '유일한 주식회사'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유일한에게 권했다.

“'유일한'은 세상에 하나 뿐인 기업이라는 뜻도 되거니와, '한'을 대한제국의 '한'으로 읽을 때, 새로운 한국이라는 뜻[122]이기도 하니 그렇게 하기로 하세. 자네 이름을 걸어야 책임감을 가지고서 회사를 경영하지 않겠나.”

서재필의 제안을 받아들인 유일한은 회사 이름을 한글로는 류한주식회사로 하고, 영어로는 New il-han & Company라 하였다. 한국어로는 ']]유일한\'에서 일을 빼고 유한이라는 이름만 사용하게 되었는데, '한(Han)'을 나라 한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을 때 그 뜻은 새로운 한국이 되었던 것이다.[120] 류한주식회사는 1926년 12월 10일 유일한이 정동에 유한양행을 건립하면서 소멸되었다.[121] 서재필은 1926년 6월 유일한의 귀국때까지 류한주식회사의 사장이었고, 12월 10일 유일한이 기존의 류한주식회사를 유한양행으로 변경, 국내법인으로 등록할 때까지 서재필은 류한주식회사의 명목상 사장이었다.

1926년 유일한은 귀국할 때 서재필에게 인사를 갔는데, 이때 서재필은 조각가인 자기 딸을 시켜 버드나무 목각화를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유일한이 귀국할 때 서재필은 조각가였던 장녀 스테파니 보이드에게, 유일한에게 줄 선물을 제작하게 했다. 스테파니 제이슨은 유일한의 성씨 '버들 류'를 상징하는 버드나무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여 기념 선물로 주었는데, 버드나무처럼 무성하게 번성하라는 뜻도 되었고, 그대가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는 뜻도 되었다. 유일한은 이 그림을 유한양행의 회사 상표로 사용하였다. 이후 그것이 유한양행의 상표가 되었다.

9.5. 의사 생활[편집]

그 뒤 서재필은 펜실베이니아 주 대학병원에서 연구 생활을 계속하였으며, 작은 딸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생활비와 빚에 쪼들렸고 전기 요금과 수도 요금을 겨우 납부하는 수준에 이르자 그는 생계에 뛰어들게 된다. 후일 작은 딸 뮤리엘 제이슨은 아버지 서재필의 비서와 보좌역을 수행한다.

서재필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친구로부터 2천 달러를 빌려 차임하였다. 그는 이것으로 2년간의 연구비와 가족의 생활비에 충당할 것을 생각했다. 이후 2년간은 그에게 있어서 극심한 생활난의 연속이었다. 아내와 두 딸을 포함한 네 식구가 끼니를 거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고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서재필에게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26년 암 치료 전문 병원인 잔느 병원에 취직하였다.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그는 실질적으로 조선이 멸망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조선의 정신적 지주이자 국부였던 인물이 사망함으로써 조선인들 사이에 구심점이 사라졌다고 봤다. 1926년 봄, 이승만의 초청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방문하였다. 이때 임정의 파벌싸움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서재필은 이승만이 한발 양보한다 하더라도 각 파의 파벌간의 암투를 조정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는 임시정부에도 연락,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억지로 단합, 단결시키기 보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연합, 연맹하는 것이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임을 지적했다. 또한 미국내에서 벌어지는 안창호파, 이승만파, 박용만파 간의 파벌다툼은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을 품게 했다. 그는 계속된 파벌 다툼과 자기 이익에 골몰하는 행위로는 독립을 하더라도 그 독립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계속 삼일신보와 미국의 언론에 일본의 탄압과 만행을 알리는 칼럼과 기고문을 지속적으로 게재하며 조선독립을 위한 청원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 공보부와 외무성,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에서의 통치가 무력 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뀌었다고 주장하고, 일선 동조론을 내세우며 이를 일축했다. 일본과 조선총독부는 미국에 암살자를 보내지 못하는 대신 하와이와 필라델피아에 첩자를 밀파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9.6. 펜실베이니아 대학 재학과 연구 활동[편집]

1926년 9월 62세의 나이에 다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에 특별학생으로 입학 하고 동시에 의업을 재개하였다. 1927년 4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을 수료하였다. 1926년 미국에서 병리학 전문의 면허제도가 시행되자 그는 병리학 의사 면허에 응시하였고, 여러 번 낙방하였다.

1927년 3월 29일 서재필은 월남 이상재의 부음을 듣고 조선일보에 한 기고에서 "그는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추모하였다. 이상재의 장례식 때 잠시 조선에 입국하여 경성에서 이상재 장례식과 노제를 지켜본 뒤 출국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그가 미국 시민권자였으므로 체포하지 못하였다.

1927년 6월부터 폴리크리닉 병원과 암치료 전문인 제임스 병원에 취직, 고용 의사로 생활하였다.

1928년 7월 28일 삼일신보사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 해 10월 28일, 박용만이 텐진에서 의열단원 이해명, 박인식 등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박용만 애도 성명서와 암살자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곧이어 이승만 등과 함께 박용만의 공적을 치하하며 암살단을 성토하는 글을 3.1신보와 국민보 등에 발표하였다. 이에 김구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박용만이 밀정이며, 이승만과 서재필에게 암살자를 성토, 규탄하는 행동을 중단해줄 것을 촉구하였다.

1929년 병리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다. 이로써 서재필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병리학자이자 한국인 최초의 미국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병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1929년 3월 필라델피아 대학, 펜실베이니아 대학, 콜롬비아 대학 등의 의학부 시간제 강사로 취직했으나 백인 학생들이 유색인종에게서는 수업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여 오래 못가고 그만두었다. 그는 필라델피아의 간호학원에도 강사로 나갔으나 역시 백인 학생들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꺼리게 되면서 얼마 못가 그만두게 되었다. 가족에게 실직 사실을 통보할 수 없었던 서재필은 이승만이나 동지회, 국민회를 방문하거나, 거리를 전전해야 했다.

10.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갑신정변 주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