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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 문서: 세조(조선)
1. 개요[편집]
2. 사육신에 대한 가혹한 숙청[편집]
사육신의 단종복위 거사에 참여했던 한 사람인 성균관사예 김질이 실패의 두려움 또는 장인 정창손의 회유로 장인 정창손에게 거사를 알리고 함께 세조를 찾아와 반역을 고변하였다. 세조는 즉시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세조는 사육신을 친국하였다.
세조는 사육신 본인과 자녀, 부친, 형제 및 집안 직계 남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집안 여성, 4촌 이상은 노비로 보내거나 변방으로 유배보냈다. 그러나 몇번에 걸쳐 공신에게 노비, 관비로 분배된 이들은 세조 말년부터 서서히 석방되었고, 중종 때에 가서는 사림파에 의해 사육신의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도 했다.
세조는 사육신 본인과 자녀, 부친, 형제 및 집안 직계 남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집안 여성, 4촌 이상은 노비로 보내거나 변방으로 유배보냈다. 그러나 몇번에 걸쳐 공신에게 노비, 관비로 분배된 이들은 세조 말년부터 서서히 석방되었고, 중종 때에 가서는 사림파에 의해 사육신의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도 했다.
3. 회유와 박팽년의 조롱[편집]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귀부하여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하위지에게도 그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은밀히 사람을 보내 다른 사육신과 함께 정변을 일으킨 것을 시인하고 사죄하면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하위지 역시 그의 회유를 뿌리쳤다.
세조는 여러번 박팽년에게 사람을 보내 회유한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진사라 하고 상감(上監: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하였는데도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박팽년이 보낸 장계와 상소를 모두 갖다보니 신하 신이 아니고 클 거로 되어 있었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박팽년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정·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자신의 아비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박팽년은 혹독한 형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에게 상감, 주상이라 하지 않고, 진사, 나으리라고 불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과 아들 헌·순·분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하위지 역시 1456년(세조 2) 사예 김질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그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 하위지의 재주와 능력을 높이 산 세조는 여러번 하위지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하위지는 이를 거절한다.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 하였다. 세조는 국문장에서 그에게 자신의 편으로 올 것을 요청하였지만 하위지는 거절한다. 그는 국문과정에서 성삼문 등이 당한 작형(灼形,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와 박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았다. 이때 하위지의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 다른 사육신은 아들, 아버지, 형제, 조카들까지 처형하였으나 하위지에게만은 예외를 두어 그의 어린 조카들인 하포, 하원은 사형에 처하지 않고 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세조는 여러번 박팽년에게 사람을 보내 회유한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진사라 하고 상감(上監: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하였는데도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박팽년이 보낸 장계와 상소를 모두 갖다보니 신하 신이 아니고 클 거로 되어 있었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박팽년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정·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자신의 아비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박팽년은 혹독한 형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에게 상감, 주상이라 하지 않고, 진사, 나으리라고 불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과 아들 헌·순·분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하위지 역시 1456년(세조 2) 사예 김질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그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 하위지의 재주와 능력을 높이 산 세조는 여러번 하위지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하위지는 이를 거절한다.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 하였다. 세조는 국문장에서 그에게 자신의 편으로 올 것을 요청하였지만 하위지는 거절한다. 그는 국문과정에서 성삼문 등이 당한 작형(灼形,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와 박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았다. 이때 하위지의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 다른 사육신은 아들, 아버지, 형제, 조카들까지 처형하였으나 하위지에게만은 예외를 두어 그의 어린 조카들인 하포, 하원은 사형에 처하지 않고 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4. 사육신의 유래[편집]
단종복위운동이 있을 때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이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 등 여섯 사람을 골라 그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기니, 이것이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다. 그 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이르러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