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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r5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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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경성부협의회 의원
안상호
安商浩
파일:안상호 사진.jpg
출생
187년
사망
1927년 12월 31일 (향년 55세)
묘소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당목리
국적
본관
순흥 안씨 (順興 安氏)
학력
관립일어학교 (졸업)
동경자혜의원의학교 (졸업)
가족
아버지 안건영 (사망 150주기)
배우자 카와구치 이소코
장녀 안견자, 차녀 안순자
장남 안정호[1], 차남 안강호, 삼남 안덕호, 사남 안부호
손자 안병문[2] (75세)
증손녀 안경민 (43세), 안하영 (33세)
직업
의사, 교육자
경력
부협의회의원 선수 : 3
부협의회의원 대수 : 1,2,3
1. 개요2. 생애3. 논란 및 사건 사고4.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안상호는 구한말 내지 일제강점기의 의사다. 호는 해관(海觀), 본관은 순흥(順興) 안씨다.

2. 생애[편집]

규장각에서 화원으로 일하던 안건영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광무 6년(1902) 일본 동경자혜의학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모교에서 수련을 마치고 광무8년(1904)에 귀국하여 지석영이 세운 의학교와 동담한의학교에서 서양의학을 강의하였다.

이어 순종의 전의로 임명되어 의친왕과 친분이 두터웠다. 서울 종로 3가 16에 개인진료소를 차렸는데 환자가 쇄도해 차례를 주어 진찰할 만큼 크게 붐볐다. 이때 진료관계로 학교와 전의를 사임했다. 진료는 오전에는 외래진료, 오후에는 왕진과 입원환자를 보살폈는데, 궁중이나 북촌대가집에의 왕진이 큰 고역이였다. 왜냐하면 국왕이나 비빈을 진찰할 때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많고, 또 대가집에서는 환자를 보기전에 술상이 나오고 병세를 얘기하는 등 시간허비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상같은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아니하고 거드름을 떠는 이들에게는 대충 말대꾸를 하고는 빨리 돌아와 진료소 환자를 돌보았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냉정하고 쌀쌀하며 교활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후일에 많은 오해를 가져왔다.

1904년 의학교 교관에 취임하여 판임관 6등에 보임 되어 이해 12월에 주임관 6등에 승진되었으나 임상개업에 전념코자 1905년에 교관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1908년 일본인들이 조직한 경성의사회에 대항하여 의사연구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이어 1910년 동서의학강습소에서 서양의학강의를 담당했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조직한 경성의사회가 단체행동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를 좌지우지하는 행세를 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오긍선,박종항 등과 한성의사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뽑혔다. 1916년 12월에는 대정실업친목회의 평의원에 이름을 올렸다.

1910년에 통정대부에 올라 비서원승지를 역임한 후 1927년 12월 31일 사망했다. 묘는 군포시 금정동에 있었는데 1990년 4월, 산본신도시 개발로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당목리로 이장되었다.

3.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 자세한 내용은 안상호/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1912년생으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치과의사였다. 1965년 별세했다.[2]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져형외과 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