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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طالبان
Taliban[1]
파일:아프가니스탄 국기11.png
파일:아프가니스탄 국장.png
깃발
문장
أشهد أن لا إله إلا الله وأشهد أن محمدا رسول الله
나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음을 증언하며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언한다.
결성
1994년 (민병대)
활동 기간
1994년 ~ 1996년 (민병대)
1996년 ~ 2001년 (정부)
2001년 ~ 2021년 (반군)
2021년 ~ 현재 (정부)
성격
민병대, 정치 단체, 종교 단체(1994 ~ 2021)
군사정부 (2021 ~ 현재)
지도자
하이바툴라 아훈드자다 (2016년 ~ 현재)
본부
칸디하르 (1996년 ~ 2001년)
카불 (2001년 ~ 현재)
1. 개요2. 상세3. 비판
3.1. 이슬람 극단주의 정책3.2. 바미얀 불상 파괴
4. 문서 출처

1. 개요[편집]

탈레반 또는 탈리반은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파슈툰족에 바탕을 둔 부족 단체에서 출발한 반군 단체이다. 

2. 상세[편집]

마드라사의 학생 또는 탐구자를 가리키는 탈레브 또는 탈리브(파슈토어: طالب 탈리브)에 파슈토어 복수형 어미 ان 안을 붙여 만들었다. 탈레반은 1990년대 중반 활동을 시작, 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를 중심으로 결속해 1997년 정권을 장악했으며 이후 2001년 미국의 공격으로 축출되기까지 아프간을 통치했다. '얼굴없는 지도자', '애꾸눈 지도자'로 알려진 무하마드 오마르는 추종자들 사이에 '물라'(mulla;mullah)라는 호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탈리브'에 상대되는 말로 '스승'이라는 뜻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잡았을 당시 남녀차별 정책으로 인해 세계로부터 많은 강한 비판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은 1979년 옛 소련군의 침공을 계기로 소련의 점령 하에 들어갔으며 이슬람 조직들을 중심으로 미국 등의 지원을 받은 저항세력들이 10년 이상 반 소련 항쟁을 벌였다. 1989년 소련은 아프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아프간에선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정전불안이 계속됐고 정부의 공백을 틈타 군벌들이 내전을 벌였다.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등 냉혹한 군벌들은 카불 시내를 폭격해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같은 혼란 속에서 등장한 탈레반은 엄격한 이슬람 규율로 무장하고 전국을 빠른 속도로 장악해갔다. 카불의 무력한 기득권층과 북부 양귀비 재배 지역에서 아편 매매 수입으로 횡포를 부리던 이른바 마약 군벌들과 경합하다가 1997년에는 정권을 장악했다. 군벌 경쟁자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지만(군벌들 중 일부는 북부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아프간 공격 때 미군 쪽에 협력했다.), 정국은 다소 안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을 탈레반이 예전부터 숨겨주고 있었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탈레반은 미국의 힘 앞에 저항하지 못하고 6일만에 주요 도시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2011년까지 미국은 오사마 빈라덴을 찾지 못했으며,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사람들만 죽인다며 비판을 받아왔다. 2011년 5월 1일 버락 오바마가 서명한 작전에 의하여, 오사마 빈라덴이 사살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으며,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점령하면서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접수했다.

3. 비판[편집]

3.1. 이슬람 극단주의 정책[편집]

탈레반이 집권할 당시만 해도 미국은 옛 소련의 영향력에서 아프간을 빼낸다는 쪽에 무게를 둬 경계를 하지 않았었다. 실제 당시 탈레반 정권은 민주적 투표로 집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통성이 있는 정권으로 인정을 받았다. 국제사회의 공인은 몇몇 나라에서 받는 데 그쳤으나 아프간 내 지지율은 60% 이상이라는 조사결과가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뒤에는 탈레반의 극단적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이 도마에 올랐다. 부정부패를 청산하는 숙청작업에 그치지 않고 언론을 탄압하고 거의 대부분의 방송국을 폐쇄했으며 서방 문화를 전파하는 언론 활동을 엄금시키고 종교 자유를 억압했다.

특히 국제사회를 경악하게 한 것은 여성의 교육을 전면 엄금시키고 모든 여성들을 집안에 감금시킨 탈레반의 조치였다.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 부인 등이 나서서 국제무대에서 탈레반을 비판했던 원인은 바로 탈레반의 여성탄압 정책이었다. 탈레반은 부르카(얼굴과 온몸을 가리는 검은 옷) 착용을 의무화한 것은 물론,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전면 금지시키고 심지어 집 밖에 여성이 혼자서, 혹은 여성들끼리 외출하는 것도 막았다. 남성이 특정 여성을 간통했다고 지목하기만 하면 여성을 유죄판결에 돌로 때려죽이게 하는 끔찍한 사형제도도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은 예로부터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았고 사회활동도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보다 훨씬 활발하게 벌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에 대한 이같은 탄압이 가져온 충격은 더욱 컸다.

2001년 3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바미얀 석불을 폭파시켜 아프가니스탄과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고 탈레반의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는 같은 이슬람주의를 내세운 이란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3.2. 바미얀 불상 파괴[편집]

2001년 3월 8일, 탈레반은 바미얀의 불상 두개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다. 바미얀의 불상 두개는 바미얀의 절벽에 조각된 두 개의 불상으로서, 하나는 38 미터 높이이며 507년에 제작되었다. 다른 하나는 높이 53 미터이며 554년에 제작되었다. 불상을 폭파한 후 탈레반은 유네스코와 많은 국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폭파의 의도는 분명하지 않다. 탈레반의 지도자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는 처음에는 아프가니스탄 유적의 보존에 대해 지지를 표방했었고, 불교가 주요 국교인 국가들 중 돈이 많은 일본이 바미얀 불상의 보존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불할 것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 우상에 대한 부정적인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종교적 우상이 되는 물건들은 박물관 내에 있는 것까지도 모두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많은 수의 오래된 불교 예술품을 소유하고 있는 파키스탄 정부는 바미얀 불상을 파괴하지 말 것을 UN 등 각 국가와 더불어 탈레반측에 촉구했으나, 탈레반이 이를 무시하고 끝내 그들의 주장을 국제사회에 관철시키고자 그들의 계획을 강행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 에미리트 연합은 이러한 탈레반의 강경한 행위를 비판했다. 순회대사로 임명된 탈레반의 고위급 대표자인 시드 라마툴라 하셰미는 2001년 3월 미국을 방문하여, 탈레반의 행위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며, 전쟁으로 인하여 손상되었던 불상을 수리하기 위한 자금 사용을 반대한 유네스코와 몇몇 서방 정부들에 대하여 분노를 표출하였고, 이와 더불어 자금을 가뭄 극복을 위해 쓰려 했다고 주장하였다.

4. 문서 출처[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내용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한 내용을 알립니다.

[1] 영어로는 탈리반이라 발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