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Franciscus | Pope Francis
파일:프란치스코 교황 사진.jpg
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Jorge Mario Bergoglio
국적
출생
1936년 12월 17일 (87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부에노스 아이레스
재위기간
제266대 교황
2013년 3월 13일 ~ 현직 (11년)
관저
가족
부 : 마리오 호세 베르고글리오
모 : 레히나 마리아 시보리
신체
175cm
교파
1. 개요2. 상세3. 생애
3.1. 교황 선출
3.1.1. 즉위3.1.2. 거주지
4. 논란
4.1. 성범죄 묵인 주교 옹호 논란
5.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교황 프란치스코는 제266대 교황이다.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이다.

2. 상세[편집]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면서,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이다. 또한 최초의 남반구 국가 출신이자 이중국적을 보유한 교황이기도 하다. 또한, 시리아 출신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3세 이후 1,282년 만에 즉위한 비유럽권 출신이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이후 35년 만의 이탈리아계 교황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는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포르투갈어, 영어, 우크라이나어를 구사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으로 화공학자와 나이트클럽 경비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생이 되었다. 1969년에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예수회의 아르헨티나 관구장을 지냈다. 199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001년에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2013년 2월 2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스스로 교황직을 사임한 후에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다수의 표를 얻어 같은 해 3월 13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에 선출된 그는 교황으로서의 자신의 새 이름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따서 프란치스코라고 명명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항상 검소함과 겸손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사회적 소수자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관용을 촉구한다. 그는 소박하고 격식에 덜 얽매인 형식에 따르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거에 전임자들이 사도 궁전에 거주했던 데 반해 프란치스코는 성녀 마르타 호텔을 자신의 거주지로 선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황직에 선출될 당시에 전통적으로 교황 선출자가 전통적으로 착용하는 붉은색 교황용 모제타를 입지 않았으며, 전례를 집전할 때에도 입는 화려한 장식이 없는 검소하고 소박한 제의를 입는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순금으로 주조해왔던 어부의 반지를 도금한 은반지로 교체하였으며, 목에 거는 가슴 십자가는 추기경 시절부터 착용하던 철제 십자가를 그대로 고수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낙태, 피임, 동성애 등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동성애자들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추기경 시절에 그는 이미 아르헨티나 정부의 동성 결혼 합법화 시도에 대해서 반대한 적이 있었다. 교회의 가르침에 관해서 ‘교회의 아들’로 자처한 그는 낙태에 대해서도 ‘소름이 끼치는 행동’이라고 언급하였으며, 교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 확대를 강조했지만, 여성의 사제 서품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가 이미 안 된다고 밝혔다며 교회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미혼모 자녀의 세례를 거부하는 사제들에게는 “사람들과 구원의 길 사이를 갈라놓는 위선자들”이라고 질책한 바 있다. 더불어, 그는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2014년 3월, 미국의 유력지인 《포춘》(Fortune)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 50인을 선정했고, 그 중 1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정되었다.

3. 생애[편집]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바리오 중 하나인 플로레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이주한회계사 마리오 호세 베르고글리오와 그의 아내 레지나 마리아 시보리 사이에서 태어난 5남매 중 장남이다. 부친 마리오는 아스티현 포르타코마로에서 태어났으며, 모친 레지나는 북이탈리아 태생이지만 고향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이다. 베르고글리오의 누이 마리아 엘레나는 그의 부친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 당시 이탈리아에 파시즘이 출현하여 만연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현재 교황의 형제 자매 중에 유일하세 생존한 사람이다. 가장 최근에 사망한 형제는 알베르토인데, 그는 2010년 6월에 사망하였다.

베르고글리오는 축구에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CA 산로렌소의 팬이었으며, 2008년에는 클럽의 정식 회원으로 등록되었다. 또한 그는 신사실주의와 탱고 춤에 관한 영화로 유명한 티타 메레요의 영화들을 좋아하는데, 이 영화들은 아르헨티나의 우루과이의 전통 음악으로 알려진 밀롱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담겨 있다. 6학년이 된 베르고글리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모스메히아에 있는 살레시오회 학교에 재학하였다. 중학생으로 올라갈 무렵에는 기술학교에 입학하여 화학 기술 자격증을 따고 졸업하였다. 베르고글리오가 젊은 시절에 겪은 유일한 위기는 건강 문제였다. 21살이 되던 해에 그는 폐렴에 걸려 세 개의 낭종을 앓았는데, 결국 폐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이후 미사 중에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거나 운율에 맞추어 기도를 바치는 것을 못하게 되었다.

예수회에 입회하기 전에 베르고글리오는 나이트클럽 경비원과 청소 관리인, 화학 실험실의 연구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3.1. 교황 선출[편집]

2013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고령으로 인한 직무 수행의 어려움을 이유로 스스로 교황직을 사임함으로써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다섯 차례의 투표 끝에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2/3의 표를 얻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74]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발코니에서 그의 하베무스 파팜 소식을 대중에서 알리는 일은 장 루이 토랑 추기경이 맡았다.

교황 선출 직후, 프란치스코는 교황 전용 의자에 착석한 채로 추기경들의 축하 인사를 받지 않고 일어서서 받았다. 이는 이전까지 바티칸에서 통용되었던 관례의 변화를 예고한 분명한 증표였다. 하베무스 파팜이 선포된 후 그는 이전 교황들과는 달리 교황 전용 붉은색 모제타를 입지 않고 흰색 수단만을 착용한 채 ,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발코니에 교황으로서 처음 대중 앞에 나타났다. 또한, 그는 전임자들처럼 순금으로 만든 가슴 십자가 대신에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시절부터 착용한 철제 가슴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

프란치스코가 교황으로서 한 첫 활동은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을 향해 인사하고 교황 강복인 우르비 에트 오르비를 준 것이었다. 군중에게 강복을 주기 전에 그는 먼저 그들에게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위해 같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또한 기도가 끝난 후에는 다시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3.1.1. 즉위[편집]

교황 프란치스코의 즉위 미사는 2013년 3월 19일 오전 9시 30분(한국 시간 19일 오후 5시 30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자신의 즉위식에 아무런 조건 없이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을 초대하였다.하지만 모국인 아르헨티나를 포함하여 주교들과 평신도들에 대해서는 바티칸에서 열리는 즉위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굳이 비싼 여행 경비를 사용할 바에는 차라리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자선 단체에 기부할 것을 당부했다. 교황청에 따르면 이날 즉위 미사에는 6개국 국왕과 31개국 대통령, 3개국 왕자, 11개국 총리가 참석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사절단 대표로 참석했다. 종교계 인사 중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였다. 동방 정교회의 지도자가 교황의 즉위식에 참석한 것은 1054년 기독교가 동서방 교회로 분열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즉위 미사 중 강론에서 그는 성 요셉을 주제로 삼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즉위 미사가 열린 3월 19일은 보편 교회의 수호자 성 요셉 대축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성 베드로 광장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즉위 미사를 보기 위해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교황의 출신국인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브라질과 멕시코 등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국기를 흔드는 사람이 많았다. 바티칸에 100만 명이 넘게 모인 것은 2011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 이후 처음이었다.

3.1.2. 거주지[편집]

프란치스코는 보다 많은 사람과 만남의 자리를 갖기 위해 자신의 거주지로 교황의 공식 관저인 사도 궁전 대신에 성녀 마르타 호텔을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는 교황 비오 10세 이후 처음으로 교황의 관저 밖에서 기거하는 교황이 되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또한 전임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주일마다 삼종 기도와 훈화를 위해 사도 궁전의 창 밖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4. 논란[편집]

4.1. 성범죄 묵인 주교 옹호 논란[편집]

칠레의 페르난도 카라디마 신부는 수십명의 아동들을 성추행 하였다. 아동 성추행 사건은 2002년부터 피해자들의 고발이 이어졌고 2010년 이후부터 언론에 보도되었다. 결국 카라디마 신부는 2011년 면직 당했다. 사건은 이렇게 묻히는듯 싶었다. 2015년 바티칸 교황청이 아동 성추행이 벌어진 오소로노 교구에 카라디마 신부의 제자인 바로스 주교로 임명하면서 다시 불거졌다. 성추행 피해자들은 바로스 주교가 성추행을 알고도 묵인했다며 강력히 반발하였다. 카라디마 신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들은 바로스 주교가 성추행 장면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도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카라디마 사건으로 칠레에서 가톨릭의 신용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교구의 분열이 이어졌다. 수백명에 달하는 신자와 시민들은 바로스 주교의 취임식에서 “바로스, 오소르노를 떠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1월 18일(현지시각) 칠레를 방문한 자리에서 바로스 주교를 둘러싼 성추문 은폐 의혹에 대해 "증거를 가져오면 이야기할 것"이라며 "단 하나의 증거도 없고 모든 것이 중상모략"이라며 바로스 주교를 두둔하였다. 세계 각국서 교황에 대한 비판이 들끓자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며 결국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