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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1절까지 |
D-100 |
3.1절 三一節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ay | |
105주년 3.1절 행사(2024년 3월 1일) | |
날짜 | 3월 1일 (+38617일, 105주년) |
지위 | 국경일, 법정 공휴일 |
근거 법령 |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제2조 제2항 |
중요도 | 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 선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원 |
축제 | 경축 행사 |
행사 | 일제로부터의 독립 선언과 한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 봉기를 축하하며 기념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이후 1920년에 <독립선언일>(Korean Independence Day)이라는 국경일로 지정되어 재외교포와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가에 의해 그 기념이 시작되었다. 광복 이후 '1946년 3월 1일 제27회 기념식을 기해 국가 경축일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민국 제1공화국 수립 이후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재지정되었다. 이는 2005년 12월 29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3ㆍ1운동 때 유관순, 손병희를 포함해 3000명이 참여했다.
이 날에는 정부 주최로 3부 요인은 물론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여 대한민국의 헌법 기본정신인 3.1정신을 되새긴다. 이와 함께 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한 선열들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따로 파고다 공원에 모여 그 날의 깊은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한다. 또한 민간 차원의 갖가지 문화 공연도 이날에 베풀어지며, 전국 관공서 및 각 가정에서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한다.
이 날에는 정부 주최로 3부 요인은 물론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여 대한민국의 헌법 기본정신인 3.1정신을 되새긴다. 이와 함께 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한 선열들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따로 파고다 공원에 모여 그 날의 깊은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한다. 또한 민간 차원의 갖가지 문화 공연도 이날에 베풀어지며, 전국 관공서 및 각 가정에서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한다.
3. 역사[편집]
3.1절은 1919년 대한민국의 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족과 함께 시작한다. 1920년 2월 임시정부 내무부 주최로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 준비회를 설치하고 갖가지 행사를 준비하였다. 제1주년 3.1절은 임시정부 주최의 기념식과 교민단 주최의 3.1절대축하식, 시가행진, 기념공연 등으로 성대히 축하되었고, 당시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은 이날을 국경일로 적으며 기쁘게 맞이할 것을 동포들에게 주문했다.
3.1절 행사는 연해주와 만주, 미국, 심지어는 일본에서도 한인들에 의해 개최되었는데, 이들은 기념식을 가진 뒤 브라스밴드를 앞세워 퍼레이드를 벌였고, 기념 공연과 축포, 전단 살포 등의 다채로운 행사로써 3월 1일을 경축했다. 임시정부 시기 3.1절의 정식 명칭은 독립선언일이었으며, 이외에도 독립절, 혁명기념일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다. 3.1절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쌍십절이나 미국 독립기념일의 별칭인 4th of July에서 따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전단과 기록에서 3.1절은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이나 독립기념일 등으로 언급되었다.
국내에서 열린 최초의 3.1절 행사는 해방 이후인 1946년 보신각 앞에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주최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승만의 개회사와 김구의 경축사, 김규식의 선창 순으로 식전이 열렸으며, 이날을 경축하기 위한 음악회와 전시회, 예술공연, 체육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예술행사들이 베풀어졌다. 그러나 3.1절 행사는 당대 좌익과 우익 진영 간의 분열 속에 치러졌으며, 1947년에는 동대문운동장과 남산에서 각각 경축 행사를 거행하던 우익과 좌익이 충돌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949년부터 3.1절은 4대 국경일로 지정되었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겨레 최대의 명절로 인식되고 있었다. 정부 주최의 경축식 이외에도 국방군의 축하 비행, 예술제, 퍼레이드, 학예회, 체육회, 연극 등 다채로운 행사가 거행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의 경축 행사는 6.25 전쟁을 기점으로 사라졌으며, 5.16 군사정변과 5공화국 정권을 거치며 3.1절은 크게 천시되었다. 1998년 이후로는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실시되어 사실상 유일한 3.1절 행사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3.1절 행사는 연해주와 만주, 미국, 심지어는 일본에서도 한인들에 의해 개최되었는데, 이들은 기념식을 가진 뒤 브라스밴드를 앞세워 퍼레이드를 벌였고, 기념 공연과 축포, 전단 살포 등의 다채로운 행사로써 3월 1일을 경축했다. 임시정부 시기 3.1절의 정식 명칭은 독립선언일이었으며, 이외에도 독립절, 혁명기념일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다. 3.1절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쌍십절이나 미국 독립기념일의 별칭인 4th of July에서 따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전단과 기록에서 3.1절은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이나 독립기념일 등으로 언급되었다.
국내에서 열린 최초의 3.1절 행사는 해방 이후인 1946년 보신각 앞에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주최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승만의 개회사와 김구의 경축사, 김규식의 선창 순으로 식전이 열렸으며, 이날을 경축하기 위한 음악회와 전시회, 예술공연, 체육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예술행사들이 베풀어졌다. 그러나 3.1절 행사는 당대 좌익과 우익 진영 간의 분열 속에 치러졌으며, 1947년에는 동대문운동장과 남산에서 각각 경축 행사를 거행하던 우익과 좌익이 충돌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949년부터 3.1절은 4대 국경일로 지정되었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겨레 최대의 명절로 인식되고 있었다. 정부 주최의 경축식 이외에도 국방군의 축하 비행, 예술제, 퍼레이드, 학예회, 체육회, 연극 등 다채로운 행사가 거행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의 경축 행사는 6.25 전쟁을 기점으로 사라졌으며, 5.16 군사정변과 5공화국 정권을 거치며 3.1절은 크게 천시되었다. 1998년 이후로는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실시되어 사실상 유일한 3.1절 행사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4. 현대[편집]
대한민국에서는 국경일로 지정되어 태극기를 게양하고 쉬도록 하고 있다. 심야에는 종종 폭주족이 과속 운행을 할 때가 많은데, 이 때는 특히 경찰의 단속이 심해지며, 전국 초·중·고생 3천919명을 상대로 `3·1절 관련 학생인식에 관한 조사'를 한 결과 40%가 3·1절의 의미를 모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5. 3.1 운동[편집]
3.1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