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876년 8월 29일 | |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現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 | ||
사망 | 1949년 6월 26일 (향년 72세) | |
묘소 | ||
사인 | 폐결핵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 | |
국적 | ||
학력 | 독학 | |
가족 | ||
종교 | ||
임기 | 1926년 12월 14일~1927년 8월 | |
부통령 | 이인성 | |
전임 | 홍진 (제8대) | |
후임 | 이동녕 (제11대) | |
임기 | 1940년 3월 13일~1947년 3월 3일 | |
부주석 | 김규식 | |
전임 | 이동녕 (제17대) | |
후임 | 이승만 (제21대)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백범이라는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 자를 따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창암이었으며 19세 때 이름을 창수로 바꾸었다가, 36세(1912년)에 거북 '구'였던 이름을 아홉 '구'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내륙으로 피난했던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 장진구도 있었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7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생활을 하였으며,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사회에 일제강점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외교적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되고 일제에 의해 국내 연결조직인 연통제가 와해되어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고 임시정부 내 노선 갈등이 격화되면서 일부 독립 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이탈하는 등 임시정부가 어려움에 처하자 김구는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독립 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가평의회 의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뤄지자 정치와 거리를 두고 건국실천원양성소 등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9년 6월 26일에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고 7월 5일 자신이 순국선역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하며 조성하였던 용산구 효창동 애국선열묘역에 모셔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7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생활을 하였으며,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사회에 일제강점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외교적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되고 일제에 의해 국내 연결조직인 연통제가 와해되어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고 임시정부 내 노선 갈등이 격화되면서 일부 독립 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이탈하는 등 임시정부가 어려움에 처하자 김구는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독립 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가평의회 의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뤄지자 정치와 거리를 두고 건국실천원양성소 등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9년 6월 26일에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고 7월 5일 자신이 순국선역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하며 조성하였던 용산구 효창동 애국선열묘역에 모셔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3. 생애[편집]
김구는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아명은 창암이며, 본명은 김창수이다. 개명하여 김구로 알려져 있다. 호는 백범아다. 한때 출가하여 원종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환속 후에는 김두래로 고쳤다.
인조 때 문신 김자점이 방조인 김순영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4세부터 역사서와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한학 수업에 정진하였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벼슬자리를 사고파는 부패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제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났다. 동학군으로 활동하며 안중근과 인연이 닿기도 했다.
1895년 발생한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21세에 안악 치하포에서 쓰치다를 맨손으로 처단하였다. 사형이 확정되었지만,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구해 탈옥하였다. 삼남 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이란 법명을 받았다. 평양 근교 대보산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계몽 · 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일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이동녕 · 이준 · 전덕기 등과 을사늑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였다.
이후 교육 계몽 사업을 벌이다 1909년 비밀단체 신민회의 회원으로 구국 운동에 가담하였다. 1919년 3 · 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30년 이동녕 ·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1 · 8 이봉창 의거와 4 · 29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였다.
1933년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을 만나 중국 낙양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보는 등 한 · 중간 외교적 성과를 이루었다.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였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 · 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을 설치하면서 미국과 합동작전을 추진하였지만,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환국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 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결정되자, 남한 단독정부 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해 2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 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해 4월 19일 평양에서 김구 · 김규식 · 김일성 · 김두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 통일 정부 수립에 실패하였다. 그 뒤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으며, 4 · 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를 남겼다.
인조 때 문신 김자점이 방조인 김순영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4세부터 역사서와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한학 수업에 정진하였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벼슬자리를 사고파는 부패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제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났다. 동학군으로 활동하며 안중근과 인연이 닿기도 했다.
1895년 발생한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21세에 안악 치하포에서 쓰치다를 맨손으로 처단하였다. 사형이 확정되었지만,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구해 탈옥하였다. 삼남 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이란 법명을 받았다. 평양 근교 대보산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계몽 · 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일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이동녕 · 이준 · 전덕기 등과 을사늑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였다.
이후 교육 계몽 사업을 벌이다 1909년 비밀단체 신민회의 회원으로 구국 운동에 가담하였다. 1919년 3 · 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30년 이동녕 ·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1 · 8 이봉창 의거와 4 · 29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였다.
1933년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을 만나 중국 낙양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보는 등 한 · 중간 외교적 성과를 이루었다.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였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 · 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을 설치하면서 미국과 합동작전을 추진하였지만,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환국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 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결정되자, 남한 단독정부 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해 2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 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해 4월 19일 평양에서 김구 · 김규식 · 김일성 · 김두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 통일 정부 수립에 실패하였다. 그 뒤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으며, 4 · 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를 남겼다.
4. 암살[편집]
김구의 암살 배후는 미궁이다. 한때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의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한편 안두희는 초기 진술에서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한편 안두희가 자신의 군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는 정보를 접한 것은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의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한편 안두희는 초기 진술에서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한편 안두희가 자신의 군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는 정보를 접한 것은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5. 사망 이후[편집]
- 김구가 암살당한 지 정확하게 1년 후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등이 있다.
- 그의 사후에도 둘째 아들 김신은 계속 대한민국 공군으로 복무하였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공군 중장으로 퇴역한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맏며느리 안미생은 미국인과 재혼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행방은 미상이다. 안미생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한 손녀딸 김효자 역시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 '백범김구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60년, 고정훈 등에 의해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에 의한 암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암살범 안두희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1998년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다.
-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명박은 집권 후 이승만이 또 다른 후보로 등록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10만원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
6. 가족[편집]
- 아버지 김순영 : 1852년 김만묵과 결성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1876년 8월 29일 곽낙원과의 사이에서 김구를 출생했다. 여담으로 김구가 태어났을 때 김순영의 모친,즉 김구의 친할머니 장씨가 죽었다.그 뒤 부친 김만묵,즉 김구의 친할아버지가 1888년 죽고 뇌줄증을 앓아 쓰러지기도 했다.치하포 사건 때 아들 김구가 탈옥해 탈옥수의 부모라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됐다. 그 후유증으로 1901년 2월 사망했다.
- 어머니 곽낙원 : 백범 김구의 어머니로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삼각혼이라는 황해도 전통적 겹사돈 혼례 풍습에 따라 (6촌아주버님)의 6촌 아우가 되는 김순영에게 시집왔다. 아들 김구를 성장시키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천자문을 가르치고 동몽선습 · 사서삼경 등을 읽혔다. 그 뒤 아들 김구의 옥바라지에 힘썼으며, 후에 중국으로 망명, 82세로 중경에서 인후염과 폐병 등의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치료하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199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 배우자 최준례
- 장남 김인 : 김인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의 독립운동가 겸 군인이었다. 본관(관향)은 안동이며 아호는 동산·입언이고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아직 그의 생후 1년도 안 되어 할머니(곽낙원)와 어머니(최준례)를 따라 황해도 안악을 거쳐 황해도 벽성에서 간이 거주하며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0년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로 다시 건너가서 그곳에서 고국에 대한 대한제국 애국 관련 교육을 받고 자란 후 젊은 나이에 대한독립군 감독관이 되었으나 폐렴을 앓다가 1945년 3월 29일, 중화민국 쓰촨성 청두에서 병사했다.
- 차남 김신 : 김신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제21대 교통부 장관이었다. 본관은 안동이다.
- 장녀 김씨
- 차녀 김화경
- 삼녀 김은경
7. 여담[편집]
- 아들 김신이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후손들은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손녀사위인 김호연 역시 공군 장교 출신이다. 여담으로 김신에게 '미래의 전쟁은 항공 전력이 우선'이라며 공군사관학교의 전신 격인 공군 군관학교 입학을 권유한 게 바로 김구다.
- 김구가 일본 순사 시험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는 일부 극우 세력의 날조가 있다. 이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1919년 안창호에게 임시정부 경무국장직을 제안받은 김구가 예전에 순사 시험 문제를 우연히 보고 답안지를 써냈으나 불합격했다는 일화를 말하며 자신은 경무국장을 맡을 자질이 부족하다고 사양한 것이다. 당연히 진짜 순사가 될 생각으로 시험에 응시한 게 아니다.
- 2007년 한국은행에서 오만원권 지폐와 함께 발행할 10만원 지폐의 모델로 백범을 선정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발행이 취소되면서 지폐 모델은 백지화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부 정책이나 한국은행 관례상 10만 원권이 발행되더라도 지폐 모델 선정작업을 재차 진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가명은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 초명은 창암·창수·구(龜)였다.
- 학생부터 노년층까지 전 연령대 막론하고 인지도가 굉장히 높은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
- <백범일지> 1부 말미에 따르면 스페인 독감에 감염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 김구의 생일은 양력 8월 29일로 경술국치와 날짜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