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학교 慶北大學校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
분류 | ||
표어 | 세계를 주도하는 첨성인, 미래를 선도하는 경북대 | |
건학이념 | 진리·긍지·봉사 | |
설립 | 설립국가 | |
개교일 | 1946년 5월 28일 (78주년) | |
위치 | 대구 | 대구광역시 북구 대학로 80 |
상주 |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대로 2559 | |
총장 | 서창교 (직무대리 / 2024년 10월 21일 ~ 현재) | |
대학병원 | 경북대학교병원 칠곡경북대학교병원 경북대학교치과병원 | |
학사통계 | 학생수 | 28,855명 (2024년 기준) |
평균평점 | 3.25점 (4.3점 만점) | |
경쟁률 | 11.8:1 (5,578명 모집 | 63,943명 지원) | |
취업률 | 60.8% (2023년 기준) | |
대학기관평가인증 인증대학(2024) |
경북대학교 대구캠퍼스 전경 | |||
1. 개요[편집]
경북대학교는 1951년 10월 6일 사범대학, 의과대학, 농과대학, 문이과대학, 5개로 구성된 종합대학교로 설립됐다.
2. 상세[편집]
3. 설립 경위[편집]
8·15 광복은 우리에게 일제로부터 빼앗긴 것을 광복할 기회를 제공했다. 잃어버린 36년간의 역사를 되찾고 박탈당한 국권, 말살되려던 민족, 사라지는 민족문화를 되찾았다. 세계사 발전에 맞추어 잃었던 왕조 대신 민주공화국을 세웠으며, 구미 선진문화와 접촉함으로 민주주의 제도와 가치체계를 받아들였다. 8·15 광복은 광복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우리 민족에게 감당키 어려운 역사적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국토의 남북 분단(38선)과 민족 분열, 정치적·사회경제적 혼란이다. 시대적 상황에 우리 민족 최대의 과업은 해방의 국제적 타율성을 극복할 민족역량을 함양하는 것이었다. 이는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한 걸음씩 추진됐다. 국가가 필요한 인재 양성은 초미의 급무로서 교육 분야, 특히 대학교육이 담당해야 할 문제다.
1945년 9월 16일 미군정청 학무국은 교육에 관한 제반 문제를 심의·결정으로 7명의 위원(김성달(초등교육), 현상충(중등교육), 유덕겸(전문교육), 백낙준(교육 전반), 김활란(여자교육), 김성수(고등교육), 최규동(일반교육))으로 구성한 한국 교육위원회를 자문기관으로 설치하였다. 이는 한국 민주교육의 정초작업을 담당한 기구였다. 이는 해방 후 교육의 공백을 시급히 메꾸며, 일제가 남기고 간 학문적 후진성을 극복하고 민족교육을 부활시킴으로써 국가유위의 인재 양성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각급 학교의 책임자가 임명되고 기존 전문학교가 승격 혹은 개편되었다. 미군정청 학무국은 일반명령 제4호로써 당해 10월 1일을 기하여 중학교 이상 각급 학교의 개교를 지시하였다. (9.28) 대구의학전문학교가 대구의과대학으로 승격되어 개교했다. 민주교육의 실현으로 교육심의회를 구성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의 교육이념과 새로운 교육(학교)제도를 연구,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교육심의회는 1946년 3월 7일 새로운 교육제도를 채택하여 9월 1일부터 시행키로 하였다. 한국 교육사상 국민 의무교육과 남녀공학 제의 원칙이 도입되어 부분적으로 교육의 민주화가 실현된 것도 채택된 교육제도에 의해서다. 일제 이래의 3학기 제도는 2학기 제로 바뀌었다. 8월에는 국립대학 설치령이 발포되었다.
이 교육제도와 국립대학 설치령에 따라 9월 신학기부터 고장 대구에서도 처음 현대적 국립대학이 설립되었다. 9월 5일에 대구농업전문대학교가 '국립대구농과대학'으로, 10월 15일에는 대구사범학교가 '국립대구사범대학'으로 각각 승격, 개편하였다. 경북대학교 역사의 첫걸음은 전년도에 승격된 대구의과대학과 함께 3개의 단과대학으로 시작한다. 이들은 개교하자 10.1 사건(1946)에 휘말려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으며, 6·25 동란으로 교사가 군용화되자 이동식 강의를 하도록 시련을 겪었다. 이는 당시의 사회·정치 상황이 학원에 미친 영향이었다. 교육이념의 부재, 교수 부족, 교육 여건의 빈약이 겹쳐 이들 대학이 국립대학의 기능과 사명을 수행하기에는 성장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요람 속의 대학'들이었다. 그런데도 불구 이들이 가지는 의의와 사명만은 막중했다. 고대 국학의 부활, 민족문화의 재건과 창달, 인재양성 등을 담당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개의 단과대학으로 만족할 수 없던 경북도민의 고등교육 열성은 나아가 종합대학교 건설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지역에 종합대학교 건설 운동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쳤다. 즉, 1945년 11월에 종합대학교 기성회가 조직됐는데 1946년 8월 27일 군정청 학무국이 '국립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자, 자극을 받아 경북에서도 관민 합동으로 설립기금을 마련해 1946년 11월 종합대학교 설립 인가를 신청하기 이른게 그 첫 번째다. 이 허가신청은 1947년 3월 7일에 기각되었다. 유지재단이 불충분하다는 이유였다.
두 번째 종합대학교 설립 운동은 6.25 동란 중 1951년 4월부터 일어났다. 동란 중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대학시설이 파괴되자 부산에 피난 중이던 정부는 각 도에 국립종합대학교 설립 계획을 세워 당국에 교지 등 설립기금을 자체 조달토록 권장하게 되었다.
이에 경북에서도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기존 국·사립 단과대학이 합동하여 '국립종합대구대학교건설위원회'를 만들어 종합대학교 설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전 경북도민이 참여한 구도적인 운동이었다. 고병간(의대), 손계술(사대), 김인식(농대, 후에 이의배) 등 3개 대학장과 국립종합대학교 건설위원회(위원장은 경북도지사)가 주역을 담당했으며 경북도 당국은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전도민의 설립 기금을 각출로 헌신했다. 미8군 당국은 교사 신축 자재 등을 조달하면서 본교 건설을 지원했다. 실로 경북대학교는 상기 4자의 합동산파역으로 비로소 탄생했다. 1951년 10월 6일 '국립경북대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45년 9월 16일 미군정청 학무국은 교육에 관한 제반 문제를 심의·결정으로 7명의 위원(김성달(초등교육), 현상충(중등교육), 유덕겸(전문교육), 백낙준(교육 전반), 김활란(여자교육), 김성수(고등교육), 최규동(일반교육))으로 구성한 한국 교육위원회를 자문기관으로 설치하였다. 이는 한국 민주교육의 정초작업을 담당한 기구였다. 이는 해방 후 교육의 공백을 시급히 메꾸며, 일제가 남기고 간 학문적 후진성을 극복하고 민족교육을 부활시킴으로써 국가유위의 인재 양성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각급 학교의 책임자가 임명되고 기존 전문학교가 승격 혹은 개편되었다. 미군정청 학무국은 일반명령 제4호로써 당해 10월 1일을 기하여 중학교 이상 각급 학교의 개교를 지시하였다. (9.28) 대구의학전문학교가 대구의과대학으로 승격되어 개교했다. 민주교육의 실현으로 교육심의회를 구성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의 교육이념과 새로운 교육(학교)제도를 연구,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교육심의회는 1946년 3월 7일 새로운 교육제도를 채택하여 9월 1일부터 시행키로 하였다. 한국 교육사상 국민 의무교육과 남녀공학 제의 원칙이 도입되어 부분적으로 교육의 민주화가 실현된 것도 채택된 교육제도에 의해서다. 일제 이래의 3학기 제도는 2학기 제로 바뀌었다. 8월에는 국립대학 설치령이 발포되었다.
이 교육제도와 국립대학 설치령에 따라 9월 신학기부터 고장 대구에서도 처음 현대적 국립대학이 설립되었다. 9월 5일에 대구농업전문대학교가 '국립대구농과대학'으로, 10월 15일에는 대구사범학교가 '국립대구사범대학'으로 각각 승격, 개편하였다. 경북대학교 역사의 첫걸음은 전년도에 승격된 대구의과대학과 함께 3개의 단과대학으로 시작한다. 이들은 개교하자 10.1 사건(1946)에 휘말려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으며, 6·25 동란으로 교사가 군용화되자 이동식 강의를 하도록 시련을 겪었다. 이는 당시의 사회·정치 상황이 학원에 미친 영향이었다. 교육이념의 부재, 교수 부족, 교육 여건의 빈약이 겹쳐 이들 대학이 국립대학의 기능과 사명을 수행하기에는 성장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요람 속의 대학'들이었다. 그런데도 불구 이들이 가지는 의의와 사명만은 막중했다. 고대 국학의 부활, 민족문화의 재건과 창달, 인재양성 등을 담당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개의 단과대학으로 만족할 수 없던 경북도민의 고등교육 열성은 나아가 종합대학교 건설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지역에 종합대학교 건설 운동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쳤다. 즉, 1945년 11월에 종합대학교 기성회가 조직됐는데 1946년 8월 27일 군정청 학무국이 '국립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자, 자극을 받아 경북에서도 관민 합동으로 설립기금을 마련해 1946년 11월 종합대학교 설립 인가를 신청하기 이른게 그 첫 번째다. 이 허가신청은 1947년 3월 7일에 기각되었다. 유지재단이 불충분하다는 이유였다.
두 번째 종합대학교 설립 운동은 6.25 동란 중 1951년 4월부터 일어났다. 동란 중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대학시설이 파괴되자 부산에 피난 중이던 정부는 각 도에 국립종합대학교 설립 계획을 세워 당국에 교지 등 설립기금을 자체 조달토록 권장하게 되었다.
이에 경북에서도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기존 국·사립 단과대학이 합동하여 '국립종합대구대학교건설위원회'를 만들어 종합대학교 설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전 경북도민이 참여한 구도적인 운동이었다. 고병간(의대), 손계술(사대), 김인식(농대, 후에 이의배) 등 3개 대학장과 국립종합대학교 건설위원회(위원장은 경북도지사)가 주역을 담당했으며 경북도 당국은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전도민의 설립 기금을 각출로 헌신했다. 미8군 당국은 교사 신축 자재 등을 조달하면서 본교 건설을 지원했다. 실로 경북대학교는 상기 4자의 합동산파역으로 비로소 탄생했다. 1951년 10월 6일 '국립경북대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4. 역사[편집]
- 1946년 : 국립대학 승격(대구사범대학,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
- 1951년 : 국립 경북대학교로 개편(사범대학, 의과대학, 농과대학, 문리과대학, 법정대학)
- 1979년 : 치과대학 설치
- 2005년 : 치의학전문대학원으로 체제 전환(치과대학 폐지)
- 2006년 :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체제 전환(의과대학 폐지)
- 2008년 : 경북대학교 - 상주대학교 통합
- 2011년 : 약학대학 설치
- 2015년 : 치과대학으로 체제 전환(치의학전문대학원 폐지), 의과대학으로 체제 전환(의학전문대학원 폐지)
- 2024년 : 첨단기술융합대학 설치
5. 역대 총장[편집]
경북대학교 역대 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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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학부[편집]
7. 캠퍼스[편집]
8. 대학생활&학생활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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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학교 위상[편집]
경북대학교는 거점국립대학교, 지방 대학 중 가장 우수한 대학 중 하나이다. 경상도 지역 학생들에게는 인서울대학 중상위권과 주로 비교된다.
10. 학교 축제 및 명소[편집]
대동제 |
매년 5월이면, 학교 최대의 축제인 대동제가 열린다. 대동제 기간에는 백양로에서부터 법대 주차장까지 학과 및 동아리에서 주막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2018년에는 교육부의‘대학생 주류 판매 관련 주세법령 준수 안내 협조’ 공문에 따라 주막을 설치하지 않고, 대동제 기간을 이달 23~25일 사흘에서 24~25일 이틀로 단축해서 운영했다. |
러브로드 |
러브로드는 일청담과 정문을 잇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우거진 길이다. “사시에 합격한 법대 남학생이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했던 여학생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여학=생이 러브로드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그때부터 이 길을 함께 걷는 커플들은 헤어지게 된다”라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러브로드 남쪽 학생주차장 옆에는 벚꽃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1975년에 도로망 확충과 함께 길을 따라 벚나무를 심으면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4월에는 벚꽃이 만개해 캠퍼스 내에 지역주민과 관광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
일청담 |
일청담은 1960년대 초 기존에 있던 농대 실습장이 옮겨가면서 만들어졌다. 연못은 교화인 감꽃모양이며, 못 중간에 분수탑이 있다. 일청담 주변으로는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이 되면 벚꽃이 만개한다. 학생 및 지역주민들이 많이 찾는 벚꽃 명소 중 하나이다. 일청담에는 생일을 맞은 학생들을 못에 빠뜨리는 전통이 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술에 취한 학생이 일청담에서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도 발생했었다. |
만오원 |
만오원은 제1과학관 앞에 위치한 연못이다. 정자와 아치형 다리가 놓여져 있다. 원래 늪이던 곳에 자연대학이 세워지면서 근처 물이 고여서 생긴 연못이다. 자연대(생물학과, 물리학과 등) 학생들이 실험 때 사용한 물이나 실험용 박테리아를 못에 버려 수질이 나빠졌다는 소문이 있으며, 이로 인해 경북대학교 학생들은 만오원이라는 명칭 대신, '박테리아 연못'이라는 별명으로 이 연못을 부른다. |
11. 여담[편집]
- 공사가 끊이질 않는다. 단순 시설 유지보수 공사부터 옛 건물을 철거하고 아예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는 큰 공사까지 작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군 입대나 긴 기간 휴학으로 학교를 떠나있다가 복학하게 되면, 새로운 건물이 생기거나 리모델링으로 완전히 바뀌어있는 등의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 에브리타임 게시판에 재미있는 게시글과 드립들이 종종 올라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중 반응이 좋은 게시물들은 타 커뮤니티나 다른 학교 에브리타임으로 수출되기도 하고, 이렇게 수출된 글들이 모여 "싱글벙글 경북대학교 에타 모음.jpg" 시리즈가 되었다.
- 영화•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하다. 드라마 사랑비는 2011년 9월 29일부터 촬영을 시작했으나, 10월 17일부터 백양로가 재포장공사에 들어가면서 계명대학교로 촬영지가 옮겨졌다. 그리고 영화 서울의 봄은 경북대학교 본관이 육군본부 건물로 등장했다.
- 대구·경북지역의 연락학군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문으로 가는 운동장 쪽에 학군단이 있다.
- 정문에서 불과 800m 거리에 한국장학재단 본부가 있다. 원래 서울역 건너편에 있다가 대구신서혁신도시로 이전할 예정이었으나 이전비용 문제로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 경북대학교 출신들은 전통적으로 대학원에 진학할 때 경북대학교, 서울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공학계열 한정), 포항공과대학교(공학계열 한정)를 많이 선택한다.
- 광역시 이상 도시에 있는 거점국립대학교[2] 중 두 번째로 지하철역에서 거리가 먼 학교다. 1위는 전남대학교 광주캠퍼스로 광주 1호선 양동시장역에서 직선거리로 2.58km이다. 경북대학교 대구캠퍼스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1.18km 거리에 떨어진 1호선 신천역이다. 2028년에 경대북문역, 복현오거리역 개통이 예정되어 있다.
- 의외로 국립대학임에도 개신교를 믿는 경북대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이자 교회인 경북대학교 기독센터가 존재한다. 역사도 정말 오래되었는데, 고병간 초대 총장 때부터 있어 왔다. 테크노문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기독센터에 재관 중인 경북대 재학생들은 기독센터에서 요구하는 시간표에 따라야 하며, 예배도 성실히 참여해야 한다. 기독센터 소속이 아닌 경북대 재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는 예배가 존재한다. 학기 중에는 평일 8시부터 9시까지 영어 예배가 있으며, 예배가 끝나면 아침 식사 시간이 주어지니 개신교를 믿는 경북대 재학생들은 참고할 것. 특히 영어 예배를 알고 싶은 경북대 재학생들은 참고할 것.
- 2016년 더 지니어스를 패러디한 오프라인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 옛날에 교내에 있던 캔류 분리수거 쓰레기통의 두 글자 사이에 누군가 vs.를 써서, 스트리트 파이터의 ‘켄 vs 류’를 표현했다.
12.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