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Nigeria | ||
국기 | 국장 | |
Unity and Faith, Peace and Progress 통일과 신념, 평화와 진보 | ||
기본 정보 | ||
국가 | 나이지리아 | |
수도 | 아부자 | |
언어 | 영어 | |
면적 | 9,237만 7천㏊ (31위) | |
인구 | 2억 2,380만 4,632명 (6위) | |
군대 | ||
시간대 | UTC+1 | |
종교 | 이슬람교 51.1% 기독교 46.9% 토속신앙 1.5% | |
상징 | ||
국기 | ||
국가 | 일어나라 동포들이여(Arise, O Compatriots) | |
정치 | ||
정치체제 | ||
대통령 | 볼라 티누부 (2023년 5월 29일 ~ 현재) | |
부통령 | 카심 셰티마 | |
외교 | ||
가입 국제기구 | 유엔, OPEC | |
국가 코드 | ||
NGA | ||
국제 전화 | ||
+234 | ||
여행경보 | ||
전 지역 여행자제 |
1. 개요[편집]
나이지리아 연방공화국, 약칭 나이지리아는 서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다. 총 면적은 923,769 km2로 북쪽으로는 니제르 공화국, 북동쪽으로는 차드 공화국, 동쪽으로는 카메룬 공화국, 서쪽으로는 베냉 공화국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서양의 기니만을 면하고 있다. 36개의 주와 1개의 연방 수도 지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이지리아에 있는 라고스는 아프리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권이다.
2. 상세[편집]
기원전 제2천년기 이래로 다양한 토착 국가와 왕국이 나타났으며, 기원전 15세기에 녹 문화를 바탕으로 나타난 국가가 최초로 통일 국가를 세웠다. 19세기에 이르러 대영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1914년에 대영제국의 식민 행정가 프레더릭 루가드가 남나이지리아 보호령과 북나이지리아 보호령을 병합하면서 오늘날 나이지리아의 영토가 만들어졌다. 대영제국은 행정과 사법 제도를 구성하는 한편 전통 군장국가들을 통해 간접통치를 했다. 1960년 10월 1일에 정식으로 독립했으며, 1967년부터 1970년까지 나이지리아의 내전인 비아프라 전쟁을 겪었고 1999년에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전까지 여러 차례의 군사 독재를 겪었다. 2015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서는 현직 대통령이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했다.
나이지리아는 250개가 넘는 민족이 살면서 500개가 넘는 언어가 쓰이는 다민족 국가다. 주요 민족으로는 북부의 하우사풀라인, 서부의 요루바족, 동부의 이보족이 있으며 이 세 민족이 전체 인구의 약 60%를 차지한다. 공용어는 영어로 국가 수준에서 언어적 단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채택했다. 인구의 약 절반은 무슬림으로 주로 북부에 살고, 나머지 절반은 기독교인으로 주로 남쪽에 산다. 나이지리아는 2015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5번째로 무슬림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6번째로 기독교인 인구가 많은 나라로, 일부 소수는 토착 종교를 믿는다. 나이지리아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자 세계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로, 2019년 말 기준 추정 인구는 2억 6백만 명이다.[8] 나이지리아의 경제 규모는 2020년 기준으로 명목 국내 총생산이 4,430억 달러,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이 1조 달러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크며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으로는 세계에서 24번째로 크다. 나이지리아를 많은 인구와 큰 경제 규모 때문에 '아프리카의 거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아프리카의 지역 강국, 국제 사회의 미들 파워, 신흥국, 신흥 시장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인간 개발 지수는 2019년 기준으로 세계 161위로 하위국에 속하며, 일인당 명목 국민 총소득은 2,030 달러로 하위 중간소득국에 속한다.
나이지리아는 250개가 넘는 민족이 살면서 500개가 넘는 언어가 쓰이는 다민족 국가다. 주요 민족으로는 북부의 하우사풀라인, 서부의 요루바족, 동부의 이보족이 있으며 이 세 민족이 전체 인구의 약 60%를 차지한다. 공용어는 영어로 국가 수준에서 언어적 단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채택했다. 인구의 약 절반은 무슬림으로 주로 북부에 살고, 나머지 절반은 기독교인으로 주로 남쪽에 산다. 나이지리아는 2015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5번째로 무슬림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6번째로 기독교인 인구가 많은 나라로, 일부 소수는 토착 종교를 믿는다. 나이지리아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자 세계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로, 2019년 말 기준 추정 인구는 2억 6백만 명이다.[8] 나이지리아의 경제 규모는 2020년 기준으로 명목 국내 총생산이 4,430억 달러,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이 1조 달러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크며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으로는 세계에서 24번째로 크다. 나이지리아를 많은 인구와 큰 경제 규모 때문에 '아프리카의 거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아프리카의 지역 강국, 국제 사회의 미들 파워, 신흥국, 신흥 시장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인간 개발 지수는 2019년 기준으로 세계 161위로 하위국에 속하며, 일인당 명목 국민 총소득은 2,030 달러로 하위 중간소득국에 속한다.
3. 어원[편집]
나이지리아의 나라 이름은 나이지리아를 통과하는 나이저강에서 유래했다. 나이저강의 이름은 투아레그인들이 나이저강을 큰 강들이라는 뜻의 '니게레웬(n-igerewen)'이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4. 역사[편집]
1999년 5월 29일에 아부바카르는 1999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의 승자이자 전 대통령 올루세군 오바산조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비록 1999년과 2003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 시기에 나이지리아 정부는 부패를 해소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개선에 힘썼다. 2007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우마루 야르아두아가 승리를 거두었고, 국제 사회는 선거에 흠이 있었다고 비판했다. 당시 대통령 오바산조는 선거에서 과실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선거 결과가 여론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오바산조는 또한 텔레비전 연설에서 국민들이 후임자의 승리를 좋아하지 않으면 4년 뒤에 또 투표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르아두아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도중 2010년 5월 5일에 죽었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굿럭 조너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조너선은 2011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국제 사회는 폭력 사태나 선거 사기가 비교적 적어 잘 진행됐다고 평가했다.
2015년 나이지리아 총선거를 앞두고 세 주요 야당인 나이지리아 행동의회와 진보변혁회의, 범나이지리아인민당, 그리고 일부 정파가 모여 범진보의회당을 창당했다. 2015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전 국가원수 모하마두 부하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현직 대통령이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했다. 선거는 공정했다고 평가를 받았으며 조너선은 패배를 인정하고 소요의 위험을 줄인 공로를 인정받았다. 한편, 보코 하람은 선거 기간에도 투표소에 가는 유권자에게 총격을 가하거나 투표소를 파괴하는 등의 테러를 했고, 이로 인해 41명이 죽었다. 부하리는 2019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2015년 나이지리아 총선거를 앞두고 세 주요 야당인 나이지리아 행동의회와 진보변혁회의, 범나이지리아인민당, 그리고 일부 정파가 모여 범진보의회당을 창당했다. 2015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전 국가원수 모하마두 부하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현직 대통령이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했다. 선거는 공정했다고 평가를 받았으며 조너선은 패배를 인정하고 소요의 위험을 줄인 공로를 인정받았다. 한편, 보코 하람은 선거 기간에도 투표소에 가는 유권자에게 총격을 가하거나 투표소를 파괴하는 등의 테러를 했고, 이로 인해 41명이 죽었다. 부하리는 2019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5. 자연환경[편집]
나이지리아의 총면적은 923,769 km2로 세계에서 32번째로 크다. 가장 높은 곳은 차팔와디산으로 높이는 해발 2,419 m이다. 주요 강으로는 나이저강과 베누에강이 있으며 나이저강 삼각주를 이룬다. 나이저강 삼각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삼각주 가운데 하나고, 중앙아프리카의 대규모 맹그로브 삼림 지역이기도 하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나이저강 유역과 해안 평야, 동부의 산지, 북부의 하우사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 지대는 열대우림이고 내륙부는 열대 사바나로 북쪽으로 갈수록 강우량이 줄어든다.
나이저강 삼각주는 석유 산업이 발달한 곳으로 심각한 기름 유출과 같은 환경 문제들이 여러 번 일어나 갈등을 일으켰다. 나이지리아의 주요 환경 문제로는 하수 처리와 같은 폐기물 관리, 탈산림화와 토양 열화, 기후 변화 등이 있다. 주요 도시에서 폐기물 관리 문제가 심각하게 일어나는 원인으로는 도시화, 빈곤, 지방 정부의 미숙함, 계획성이 없는 산업 계획 등이 꼽힌다. 일부 해결책은 환경에 더 나쁜 영향을 미쳐 수로와 지하수가 오염될 수도 있는 곳에 처리하지 않은 폐기물을 쌓아두는 결과를 낳았다.
2005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는 전 세계에서 탈산림화 비율이 가장 높았다. 1990년부터 2010년 사이에 나이지리아에서는 8,193,000 헥타르의 지피 식생이 파괴됐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나이저강 유역과 해안 평야, 동부의 산지, 북부의 하우사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 지대는 열대우림이고 내륙부는 열대 사바나로 북쪽으로 갈수록 강우량이 줄어든다.
나이저강 삼각주는 석유 산업이 발달한 곳으로 심각한 기름 유출과 같은 환경 문제들이 여러 번 일어나 갈등을 일으켰다. 나이지리아의 주요 환경 문제로는 하수 처리와 같은 폐기물 관리, 탈산림화와 토양 열화, 기후 변화 등이 있다. 주요 도시에서 폐기물 관리 문제가 심각하게 일어나는 원인으로는 도시화, 빈곤, 지방 정부의 미숙함, 계획성이 없는 산업 계획 등이 꼽힌다. 일부 해결책은 환경에 더 나쁜 영향을 미쳐 수로와 지하수가 오염될 수도 있는 곳에 처리하지 않은 폐기물을 쌓아두는 결과를 낳았다.
2005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는 전 세계에서 탈산림화 비율이 가장 높았다. 1990년부터 2010년 사이에 나이지리아에서는 8,193,000 헥타르의 지피 식생이 파괴됐다.
6. 인문환경[편집]
6.1. 민족[편집]
나이지리아에는 250개가 넘는 민족이 있으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한다. 주요 민족으로는 하우사인과 요루바족, 이보족이 있으며, 하우사인이 전체 인구의 30%, 요루바족이 15.5%, 이보족이 15.2% 정도를 차지한다.
19세기 중엽에 아프리카계 쿠바인 및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해방 노예들과 시에라리온 출신 이민자들이 라고스와 다른 지역에 공동체를 형성했다.시에라리온 이민자는 사로(Saro), 브라질 해방 노예는 아마로(Amaro)라고 불렀으며, 이민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상업에 종사하거나 선교사가 됐다.
19세기 중엽에 아프리카계 쿠바인 및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해방 노예들과 시에라리온 출신 이민자들이 라고스와 다른 지역에 공동체를 형성했다.시에라리온 이민자는 사로(Saro), 브라질 해방 노예는 아마로(Amaro)라고 불렀으며, 이민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상업에 종사하거나 선교사가 됐다.
6.2. 언어[편집]
나이지리아에서는 500개가 넘는 언어가 쓰인다. 나이지리아의 공용어는 영어로, 2003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약 6,000만 명이 제2언어로 영어를 썼으며 2005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영어에서 파생된 나이지리아 피진 화자도 3,000만 명이었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시골보다는 도시에서 영어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다.
나이지리아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로는 6,300만 명이 쓰는 하우사어와 4,000만 명이 쓰는 요루바어, 2,700만 명이 쓰는 이보어, 1,400만 명이 쓰는 풀라어, 800만 명이 쓰는 카누리어, 400만 명이 쓰는 티브어 등이 있다. 프랑스어를 쓰는 나라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나이지리아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로는 6,300만 명이 쓰는 하우사어와 4,000만 명이 쓰는 요루바어, 2,700만 명이 쓰는 이보어, 1,400만 명이 쓰는 풀라어, 800만 명이 쓰는 카누리어, 400만 명이 쓰는 티브어 등이 있다. 프랑스어를 쓰는 나라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6.3. 종교[편집]
나이지리아의 주요 종교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로 신자의 수가 엇비슷하며 일부 소수는 전통 신앙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다. 1952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에서 무슬림은 47.4%, 기독교인은 21.1%, 기타 신자는 31.6%였고, 1963년 인구 조사에서 무슬림은 47.2%, 기독교인은 34.3%, 기타 신자는 18.5%였다. 퓨 연구소가 2010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구의 49.3%는 기독교인, 48.8%는 무슬림이었으며 1.9%는 다른 종교를 믿거나 종교를 믿지 않았다. 같은 기관에서 2015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인구의 50%는 무슬림이었고 48.1%는 기독교인이었다.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인구의 53.5%는 무슬림이고 45.9%는 기독교인이었다. 주요 민족별로 보면 하우사인은 주로 이슬람교를 믿고, 이보족은 주로 기독교를 믿으며 요루바족은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모두 많다.
나이지리아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로, 무슬림은 북서쪽과 북동쪽에 많으며 남서쪽에도 많은 수가 있다. 나이지리아 무슬림의 대부분은 수니파의 말리크파에 속하나 샤피이파와 시아파에 속하는 소수도 있다. 북쪽에 있는 주에서는 샤리아를 적용하는데 이를 두고 논란이 있다.
기독교인은 주로 남쪽에 많은데, 개신교와 토착 기독교인은 서쪽에 많으며 가톨릭교 신자는 남동부에 많다. 신자 수가 가장 많은 교회는 나이지리아 성공회다.
나이지리아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로, 무슬림은 북서쪽과 북동쪽에 많으며 남서쪽에도 많은 수가 있다. 나이지리아 무슬림의 대부분은 수니파의 말리크파에 속하나 샤피이파와 시아파에 속하는 소수도 있다. 북쪽에 있는 주에서는 샤리아를 적용하는데 이를 두고 논란이 있다.
기독교인은 주로 남쪽에 많은데, 개신교와 토착 기독교인은 서쪽에 많으며 가톨릭교 신자는 남동부에 많다. 신자 수가 가장 많은 교회는 나이지리아 성공회다.
6.4. 내부 갈등[편집]
나이지리아는 독립 이래로 파벌간 긴장과 폭력에 봉착했으며, 특히 석유가 나는 나이저강 삼각주 지대에서 석유의 통제권을 얻기 위한 갈등이 잦아 나이저강 삼각주 분쟁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오고니족과 같은 일부 민족은 석유 생산으로 심각한 환경 피해를 보았다.
2002년에는 미스 월드 대회가 아부자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일부 보수적인 무슬림들이 대회 개최에 반대했고, 나이지리아 여성 아미나 라왈이 간통 혐의로 샤리아에 따라 투석형을 선고받자 일부 대회 참가자들이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며, 투석형은 취소됐지만 그 뒤 일간지 《디스데이》에서 "무함마드가 살아있었더라면 대회 참가자 가운데 한 명을 아내로 삼았을 것이다."라는 사설을 실어 카두나 등지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나 약 250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다. 2006년에는 윌란스 포스텐 무함마드 만평 논란이 나이지리아에서도 이어져 폭동이 일어나 수십 명이 죽고 교회가 불탔다. 2010년에는 조스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져 500여 명이 죽었다.
2002년부터는 보코 하람이 샤리아에 입각한 나라를 세우고자 활동을 시작했다. 보코 하람은 2011년부터 2018년 사이에 37,000명 이상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보코 하람은 2014년 치복 납치 사건, 2015년 바가 학살 등을 일으켰으며, 나이지리아는 베냉, 차드, 카메룬, 니제르와 합동 군사 작전을 펼쳐 보코 하람 소탕에 나섰다.
2016년 4월에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베누에주의 아가투에서 풀라족 목동들이 마을 10곳에서 수백 명을 살해했다. 또한 학교와 병원, 종교 시설, 경찰서 등이 파괴됐고, 유엔 난민 기구 나이지리아 대표는 이 정도의 파괴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2019년 2월에는 카두나주의 카주루에서 풀라인 130명이 살해됐다.
2002년에는 미스 월드 대회가 아부자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일부 보수적인 무슬림들이 대회 개최에 반대했고, 나이지리아 여성 아미나 라왈이 간통 혐의로 샤리아에 따라 투석형을 선고받자 일부 대회 참가자들이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며, 투석형은 취소됐지만 그 뒤 일간지 《디스데이》에서 "무함마드가 살아있었더라면 대회 참가자 가운데 한 명을 아내로 삼았을 것이다."라는 사설을 실어 카두나 등지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나 약 250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다. 2006년에는 윌란스 포스텐 무함마드 만평 논란이 나이지리아에서도 이어져 폭동이 일어나 수십 명이 죽고 교회가 불탔다. 2010년에는 조스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져 500여 명이 죽었다.
2002년부터는 보코 하람이 샤리아에 입각한 나라를 세우고자 활동을 시작했다. 보코 하람은 2011년부터 2018년 사이에 37,000명 이상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보코 하람은 2014년 치복 납치 사건, 2015년 바가 학살 등을 일으켰으며, 나이지리아는 베냉, 차드, 카메룬, 니제르와 합동 군사 작전을 펼쳐 보코 하람 소탕에 나섰다.
2016년 4월에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베누에주의 아가투에서 풀라족 목동들이 마을 10곳에서 수백 명을 살해했다. 또한 학교와 병원, 종교 시설, 경찰서 등이 파괴됐고, 유엔 난민 기구 나이지리아 대표는 이 정도의 파괴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2019년 2월에는 카두나주의 카주루에서 풀라인 130명이 살해됐다.
6.5. 범죄[편집]
나이지리아에는 상당한 조직범죄 연결망이 있다. 나이지리아의 범죄 조직은 헤로인과 코카인 밀수와 강한 연관이 있다. 기니만에는 선박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해적들이 있다. 2013년 1월부터 6월 사이에 납치된 선원 30명 가운데 28명은 나이지리아에서 납치됐다. 또한 419 사기(419 scam), 나이지리아 사기(Nigerian scam)라고 부르는 신용 사기가 유명하다.[102] 이 사기는 사기꾼과 은행이 공모하며 피해자에게는 많은 돈을 송금해 줄 것이라고 속이면서 은행 계좌 정보를 요구하고, 피해자의 은행 계좌에서 돈을 인출한 뒤 수수료를 부과하는 수법을 쓴다.
7. 경제[편집]
나이지리아는 혼합 경제 신흥 시장으로 분류한다. 세계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하위 중간소득국에 속한다.
나이지리아의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은 2020년 기준으로 1조 달러로 세계에서 24번째로 크다. 1970년에 석유 붐이 일어났을 때 나이지리아는 기반 시설에 투자할 자본을 마련하고자 많은 외채를 졌는데, 1980년대 석유 공급과잉으로 유가가 떨어지자 외채를 갚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채무 상환 불이행을 선언했다. 군부 통치와 부패, 잘못된 행정이 경제 발전을 저해했는데, 민주화와 경제 개혁이 이루어지며 경제가 성장했다.
외화 수입은 석유 수출이 가장 많이 차지하며 그다음은 외국의 나이지리아인 노동자가 보내는 송금액이다.
나이지리아의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은 2020년 기준으로 1조 달러로 세계에서 24번째로 크다. 1970년에 석유 붐이 일어났을 때 나이지리아는 기반 시설에 투자할 자본을 마련하고자 많은 외채를 졌는데, 1980년대 석유 공급과잉으로 유가가 떨어지자 외채를 갚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채무 상환 불이행을 선언했다. 군부 통치와 부패, 잘못된 행정이 경제 발전을 저해했는데, 민주화와 경제 개혁이 이루어지며 경제가 성장했다.
외화 수입은 석유 수출이 가장 많이 차지하며 그다음은 외국의 나이지리아인 노동자가 보내는 송금액이다.
7.1. 농업[편집]
주요 작물로는 옥수수, 서곡, 수수, 마, 카사바, 쌀, 외, 토란, 참깨, 코코아콩, 고무 등이 있다.
7.2. 석유 산업과 광업[편집]
나이지리아는 세계에서 12번째로 석유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며 8번째로 많이 수출하는 나라다.
나이지리아 석유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로 나이저강 삼각주 일대에서 석유 기업과 현지인들 사이의 갈등, 석유 시설의 훼손, 심각한 환경 손상, 치안 문제가 있다.
석유 이외의 자원으로는 천연가스, 석탄, 철반석, 탄탈석, 금, 주석, 철광석, 석회암, 나이오븀, 납, 아연 등이 있다.
=== 제조업 ==
나이지리아는 카노와 아베오쿠타, 오니차, 라고스를 중심으로 가죽과 방직 산업이 발달했고, 은네위에는 나이지리아의 자동차 기업인 이노슨 모터스가 있다. 오군주에는 공장이 많이 있어 라고스와 함께 나이지리아 산업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나이지리아 석유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로 나이저강 삼각주 일대에서 석유 기업과 현지인들 사이의 갈등, 석유 시설의 훼손, 심각한 환경 손상, 치안 문제가 있다.
석유 이외의 자원으로는 천연가스, 석탄, 철반석, 탄탈석, 금, 주석, 철광석, 석회암, 나이오븀, 납, 아연 등이 있다.
=== 제조업 ==
나이지리아는 카노와 아베오쿠타, 오니차, 라고스를 중심으로 가죽과 방직 산업이 발달했고, 은네위에는 나이지리아의 자동차 기업인 이노슨 모터스가 있다. 오군주에는 공장이 많이 있어 라고스와 함께 나이지리아 산업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8. 정치[편집]
나이지리아는 미국을 본따 연방 공화국 제도를 채택했으며 행정권은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으로 선거를 통해 4년의 임기를 두 번 지낼 수 있다. 대통령의 권력은 나이지리아 국민의회를 이루는 상원과 하원이 견제한다. 상원은 109석으로 각 주에서 세 명, 아부자에서 한 명을 뽑으며 4년에 한 번씩 선거로 뽑는다. 하원은 360석으로 각 주에서 인구 비례에 따라 뽑는다.
자민족 중심주의와 부족 중심주의, 종교 박해, 보답 차원의 후견주의는 독립 이전과 이후 모두에 정치의 발전을 막았다. 모든 주요 정당들은 선거에서 이기고자 부정 선거나 탄압에 관여한 바 있다. 국립 정책 전략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1983년 이전에 있었던 선거에서는 오직 1959년과 1979년에 있었던 선거만이 조직적인 부정이 없었다. 세계은행의 아프리카지역 부행장을 지낸 오비 에제크웨실리는 2012년에 나이지리아는 독립 이후로 부패로 4천억 달러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하우사풀라인과 요루바족, 이보족은 나이지리아의 주요 민족으로, 역사상으로 정치에서 우위를 차지했고 세 민족 사이의 경쟁은 적대감을 키웠다. 비아프라 전쟁 이후 남부에서는 민족주의가 힘을 얻어 분리주의 운동 단체가 일부 나타났지만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자민족 중심주의와 부족 중심주의, 종교 박해, 보답 차원의 후견주의는 독립 이전과 이후 모두에 정치의 발전을 막았다. 모든 주요 정당들은 선거에서 이기고자 부정 선거나 탄압에 관여한 바 있다. 국립 정책 전략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1983년 이전에 있었던 선거에서는 오직 1959년과 1979년에 있었던 선거만이 조직적인 부정이 없었다. 세계은행의 아프리카지역 부행장을 지낸 오비 에제크웨실리는 2012년에 나이지리아는 독립 이후로 부패로 4천억 달러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하우사풀라인과 요루바족, 이보족은 나이지리아의 주요 민족으로, 역사상으로 정치에서 우위를 차지했고 세 민족 사이의 경쟁은 적대감을 키웠다. 비아프라 전쟁 이후 남부에서는 민족주의가 힘을 얻어 분리주의 운동 단체가 일부 나타났지만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8.1. 법[편집]
나이지리아에는 세 종류의 법체계가 있다. 영미법은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유래했으며 독립한 뒤로 독자적으로 발전했고, 관습법은 전통 가치와 관습에서 유래했으며, 샤리아는 무슬림이 많은 북부 지역에서만 쓰인다. 샤리아는 곰베주와 나이저주, 바우치주, 보르노주, 소코토주, 요베주, 잠파라주, 지가와주, 카노주, 카두나주, 케비주, 카치나주에서만 쓰인다.
8.2. 외교[편집]
나이지리아는 독립한 뒤로 아프리카의 통합을 외교정책의 중심으로 삼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다.[64] 1960년대에는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했는데, 이스라엘은 나이지리아 국회의사당을 짓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이지리아의 외교 정책은 1970년대에 비아프라 전쟁이 끝난 뒤 시험대에 올랐다. 나이지리아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백인 소수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지원했다.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인 아프리카 단결 기구의 창설 회원국이며,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 활동을 지원했고,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를 주도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중심주의의 입장을 취하며 콩고 위기 당시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엔의 요청으로 군병력을 파견했다. 또한 1970년대에 범아프리카주의 및 독립 단체들을 지지하며 앙골라 해방인민운동과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등을 지원했고,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와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에 도움을 주었다.
나이지리아는 비동맹 운동의 회원국으로, 2006년 11월에 아부자에서 다양한 분야에서의 남-남 결합을 증진하기 위한 아프리카-남아메리카 회담을 열었다. 나이지리아는 또한 국제형사재판소 협약을 비준했으며 영연방의 회원국이다. 사니 아바차가 집권하던 때인 1995년에 영연방 회원국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1999년에 해제됐다.
나이지리아는 1970년대 이래로 국제 석유 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71년 7월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나라로는 처음으로 석유 수출국 기구에 가입했다. 주요 석유 생산국으로서의 입지 때문에 국제 관계에서 때때로 선진국 및 개발도상국들과 불안한 관계를 빚기도 한다.
2000년 이후로 나이지리아와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의 교역이 크게 늘었다. 2000년부터 2016년 사이에 두 나라 사이의 총교역량이 104억 달러가량 늘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전체 교역량의 80%가 중국의 수출이 차지하고, 나이지리아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양이 중국에 수출하는 양보다 열 배가 더 많아 심각한 무역수지 불균형이 일어나 나이지리아에서 주요 정치 문제로 떠올랐고, 나이지리아의 경제는 값싼 수입품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자국 산업에 큰 손해를 입었다.
나이지리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6년에, 대한민국과는 1980년에 수교했다. 1960년 7월에 당시 주서독 대한민국 대사였던 손원일이 나이지리아를 친선 방문하고, 상호 간의 이해 증진과 외교 관계 수립과 관련해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1980년 2월 22일에 나이지리아와 대한민국은 국교 수립에 합의해 3월 24일에 이코이 호텔에 공관을 개설했고, 7월 1일에 공관을 임차해 영사 업무를 개시했으며, 1982년 12월에 청사 부지를 확보한 뒤 1984년 8월 13일에 청사를 준공하고 입주했다. 1996년 3월에 아부자에 사무소를 열었다. 나이지리아는 1987년 12월에 서울특별시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중심주의의 입장을 취하며 콩고 위기 당시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엔의 요청으로 군병력을 파견했다. 또한 1970년대에 범아프리카주의 및 독립 단체들을 지지하며 앙골라 해방인민운동과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등을 지원했고,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와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에 도움을 주었다.
나이지리아는 비동맹 운동의 회원국으로, 2006년 11월에 아부자에서 다양한 분야에서의 남-남 결합을 증진하기 위한 아프리카-남아메리카 회담을 열었다. 나이지리아는 또한 국제형사재판소 협약을 비준했으며 영연방의 회원국이다. 사니 아바차가 집권하던 때인 1995년에 영연방 회원국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1999년에 해제됐다.
나이지리아는 1970년대 이래로 국제 석유 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71년 7월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나라로는 처음으로 석유 수출국 기구에 가입했다. 주요 석유 생산국으로서의 입지 때문에 국제 관계에서 때때로 선진국 및 개발도상국들과 불안한 관계를 빚기도 한다.
2000년 이후로 나이지리아와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의 교역이 크게 늘었다. 2000년부터 2016년 사이에 두 나라 사이의 총교역량이 104억 달러가량 늘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전체 교역량의 80%가 중국의 수출이 차지하고, 나이지리아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양이 중국에 수출하는 양보다 열 배가 더 많아 심각한 무역수지 불균형이 일어나 나이지리아에서 주요 정치 문제로 떠올랐고, 나이지리아의 경제는 값싼 수입품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자국 산업에 큰 손해를 입었다.
나이지리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6년에, 대한민국과는 1980년에 수교했다. 1960년 7월에 당시 주서독 대한민국 대사였던 손원일이 나이지리아를 친선 방문하고, 상호 간의 이해 증진과 외교 관계 수립과 관련해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1980년 2월 22일에 나이지리아와 대한민국은 국교 수립에 합의해 3월 24일에 이코이 호텔에 공관을 개설했고, 7월 1일에 공관을 임차해 영사 업무를 개시했으며, 1982년 12월에 청사 부지를 확보한 뒤 1984년 8월 13일에 청사를 준공하고 입주했다. 1996년 3월에 아부자에 사무소를 열었다. 나이지리아는 1987년 12월에 서울특별시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8.3. 행정 구역[편집]
나이지리아는 36개 주와 1개의 연방 수도 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지정학적 관점에 따라 각 주를 북서 지역, 북동 지역, 중북 지역, 남서 지역, 남동 지역, 남남 지역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9. 문화[편집]
9.1. 요리[편집]
나이지리아 요리는 소스를 만들 때 팜유나 땅콩유와 함께 다양한 향신료와 향미료를 쓰며 고추로 매운맛을 내기도 한다. 만찬을 열 때는 화려하고 풍성하게 차리며 시장이나 노점에서도 다양한 음식을 제공한다.
=== 문학 ==
나이지리아 출신의 유명한 작가로는 아프리카 출신으로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월레 소잉카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쓴 치누아 아체베가 있다. 다른 유명 작가로는 맨부커상 수상 작가 벤 오크리, 아동문학가 시프리안 에크웬시, 아프리카계 영국인 작가 부치 에메체타, 《보랏빛 히비스커스》를 쓴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환경운동가 켄 사로위와, 네뷸러상과 휴고상을 받은 은네디 오코라포르 등이 있다.
=== 문학 ==
나이지리아 출신의 유명한 작가로는 아프리카 출신으로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월레 소잉카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쓴 치누아 아체베가 있다. 다른 유명 작가로는 맨부커상 수상 작가 벤 오크리, 아동문학가 시프리안 에크웬시, 아프리카계 영국인 작가 부치 에메체타, 《보랏빛 히비스커스》를 쓴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환경운동가 켄 사로위와, 네뷸러상과 휴고상을 받은 은네디 오코라포르 등이 있다.
9.2. 스포츠[편집]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포츠는 축구다. 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명은 '수퍼 이글스(Super Eagles)'로 FIFA 랭킹은 1994년 4월에 아프리카 대표팀 가운데에서는 가장 높은 순위인 5위를 기록한 적이 있으며 나이지리아 U-23 축구 국가대표팀은 1996년 하계 올림픽 축구 남자에서 금메달을 얻어 아프리카 대표팀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축구에서 금메달을 얻은 대표팀이 됐다.
나이지리아 농구 국가대표팀은 2012년 하계 올림픽 농구 예선에서 그리스 농구 국가대표팀과 리투아니아 농구 국가대표팀을 꺾고 본선에 진출해 관심을 끌었다.[105] 유명한 선수로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하킴 올라주원이 있다.
2018년 동계 올림픽 봅슬레이에서는 나이지리아 여자 2인승 대표팀이 아프리카의 대표팀으로는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권투도 인기가 있다. 유명 권투 선수로는 세계 타이틀 보유자 딕 타이거와 새뮤얼 피터 등이 있다.
나이지리아 농구 국가대표팀은 2012년 하계 올림픽 농구 예선에서 그리스 농구 국가대표팀과 리투아니아 농구 국가대표팀을 꺾고 본선에 진출해 관심을 끌었다.[105] 유명한 선수로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하킴 올라주원이 있다.
2018년 동계 올림픽 봅슬레이에서는 나이지리아 여자 2인승 대표팀이 아프리카의 대표팀으로는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권투도 인기가 있다. 유명 권투 선수로는 세계 타이틀 보유자 딕 타이거와 새뮤얼 피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