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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17년 8월 11일 | |
전라도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 (現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 | ||
1475년 8월 1일 (향년 57세) |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 53-7 | ||
본관 | ||
재임기간 | 제28대 영의정부사 → 영의정 | |
1462년 6월 26일 ~ 1466년 6월 9일 | ||
제40대 영의정 | ||
1471년 12월 13일 ~ 1475년 8월 1일 | ||
이름 | 호 | 보한재, 희현당 |
자 | 범옹 | |
봉호 | 고령군 → 고령부원군 | |
시호 | 문충 | |
학력 | 1439년 친시문과 을과 급제 1447년 중시문과 급제 | |
가족 | 아버지 신장, 어머니 나주 정씨 정유의 딸 형 신맹주, 신중주 남동생 신송주, 신말주 여동생 창녕 조씨 조효문의 처, 화순 최씨 최선복의 처 배우자 무송 윤씨 자녀 9남 2녀 | |
유교 (성리학) |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본관은 고령(高靈), 자(字)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장(申檣)의 아들이자 윤회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사육신과 함께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결국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 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회, 정인지의 문인이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사육신과 함께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결국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 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회, 정인지의 문인이다.
3. 생애[편집]
1417년(태종 17년) 음력 6월 20일 희현당 신숙주는 고령신씨 신포시의 손자이며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의 아들로 그의 외가가 있던 전라남도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주 정씨는 지성주군사를 지낸 정유의 딸이다. 위로 형 신맹주, 신중주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인 신송주·신말주가 태어났다. 또한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인 부부인 신씨는 신숙주의 삼촌 신평의 딸로, 신숙주는 연산군에게는 외외재종조부가 된다.
그의 조상들은 본래 경상북도 고령현의 향리였으나 신숙주의 7대조가 되는 신성용이 처음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 벼슬이 검교 군기감에 이르렀다. 증조부 신덕린은 전의 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신포시는 공조참의를 지냈다.
아버지 신장은 남에게 맞서기를 싫어하는 온화한 성품의 문인이었으나 술을 좋아하였는데 동료 문인인 허조는 "이런 어진 사람을 오직 술이 해쳤다."며 한탄할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사람됨이 온후하고 공순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사장(詞章)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므로, 임금이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가도록 친히 명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신장은 아들들의 이름에 술을 뜻하는 의미의 주 자를 붙였는데, 다섯 아들들의 이름이 신맹주·신중주·신숙주·신송주·신말주였다. 아버지가 관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고향 나주를 떠나 본가인 한성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신장은 글씨를 잘 썼는데 숭례문의 현판 글씨 중 하나는 그의 글씨체라는 전설이 전한다.
동생 신말주의 손자 신공섭은 조선후기의 유명한 화가 신윤복의 선조로, 신윤복은 신공섭의 서자 신수진의 7대손이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의 직계 18대손이 된다.
신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기억력이 남달랐다. 자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는 했다. 성격은 침착하여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 말을 하였다. 신숙주는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는데, 글재주에 뛰어났다. 뒤에 윤회와 정인지의 문인이 되어 그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첫 스승인 윤회는 하륜과 정도전의 문인으로, 그를 통해 이색과 백이정, 안향의 학통을 사사하였다. 뒤에 그는 스승 윤회의 손녀사위가 되는데, 신숙주는 윤회의 아들인 증 영의정부사 윤경연의 딸 무송윤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뒤이어 정인지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는데 그를 통해 정몽주의 학문도 계승하였다.
그는 학문을 연마하면서도 동리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서당을 열고 천자문과 소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독서와 학문을 좋아하여 천하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시문을 잘 지어서 묘사를 잘 하고 분방하였다. 그는 일찍이 탐진강과 영산강의 강물이 황해로 흐르는 것을 보며 바다는 산골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든 말과 소를 씻은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다라고 하였다.
1438년(세종 20년) 21세의 나이에 시와 부로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가 그해의 진사시에도 모두 합격하여 바로 진사가 되었다. 그 뒤 초시에 장원한 뒤, 복시에도 장원하였다.
그의 조상들은 본래 경상북도 고령현의 향리였으나 신숙주의 7대조가 되는 신성용이 처음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 벼슬이 검교 군기감에 이르렀다. 증조부 신덕린은 전의 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신포시는 공조참의를 지냈다.
아버지 신장은 남에게 맞서기를 싫어하는 온화한 성품의 문인이었으나 술을 좋아하였는데 동료 문인인 허조는 "이런 어진 사람을 오직 술이 해쳤다."며 한탄할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사람됨이 온후하고 공순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사장(詞章)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므로, 임금이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가도록 친히 명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신장은 아들들의 이름에 술을 뜻하는 의미의 주 자를 붙였는데, 다섯 아들들의 이름이 신맹주·신중주·신숙주·신송주·신말주였다. 아버지가 관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고향 나주를 떠나 본가인 한성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신장은 글씨를 잘 썼는데 숭례문의 현판 글씨 중 하나는 그의 글씨체라는 전설이 전한다.
동생 신말주의 손자 신공섭은 조선후기의 유명한 화가 신윤복의 선조로, 신윤복은 신공섭의 서자 신수진의 7대손이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의 직계 18대손이 된다.
신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기억력이 남달랐다. 자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는 했다. 성격은 침착하여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 말을 하였다. 신숙주는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는데, 글재주에 뛰어났다. 뒤에 윤회와 정인지의 문인이 되어 그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첫 스승인 윤회는 하륜과 정도전의 문인으로, 그를 통해 이색과 백이정, 안향의 학통을 사사하였다. 뒤에 그는 스승 윤회의 손녀사위가 되는데, 신숙주는 윤회의 아들인 증 영의정부사 윤경연의 딸 무송윤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뒤이어 정인지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는데 그를 통해 정몽주의 학문도 계승하였다.
그는 학문을 연마하면서도 동리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서당을 열고 천자문과 소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독서와 학문을 좋아하여 천하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시문을 잘 지어서 묘사를 잘 하고 분방하였다. 그는 일찍이 탐진강과 영산강의 강물이 황해로 흐르는 것을 보며 바다는 산골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든 말과 소를 씻은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다라고 하였다.
1438년(세종 20년) 21세의 나이에 시와 부로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가 그해의 진사시에도 모두 합격하여 바로 진사가 되었다. 그 뒤 초시에 장원한 뒤, 복시에도 장원하였다.
3.1. 외교 활동[편집]
그 무렵 신숙주는 과로로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그 무렵 병이 나아 일어난 직후였다. 형제나 친구들이 여위고 피곤한 몸으로 어찌 먼 곳을 가겠느냐며 감당 못하리라 하여 힘써 말리고 저지하였으나 그는 자청해서 가겠다고 하였다.
“신하된 사람에게는 평탄하거나 험한 것이 한 가지이다. 어찌 제 몸이 편안할 것만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먼 길을 일가친척이 모두 말렸으나 신하된 사람으로 험하고 편한 것을 가릴 수 없다 하고 스스로 나섰다. 세종이 인견하면서 병이 들었다 하는데 갈 수 있겠느냐고 염려하자 그는 나아졌다며 어찌 회피하겠느냐며 일본으로 가기를 자청하였다.
1443년 2월 21일에 부사직이던 그는 다시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어 조선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 겸 종사관으로 선발, 통신사가 파견되자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고, 언어와 한자, 유학을 가르쳤다. 일본을 여행할 때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들 감탄하였다.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되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을 50척, 세사미두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을 50척, 세사미두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신하된 사람에게는 평탄하거나 험한 것이 한 가지이다. 어찌 제 몸이 편안할 것만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먼 길을 일가친척이 모두 말렸으나 신하된 사람으로 험하고 편한 것을 가릴 수 없다 하고 스스로 나섰다. 세종이 인견하면서 병이 들었다 하는데 갈 수 있겠느냐고 염려하자 그는 나아졌다며 어찌 회피하겠느냐며 일본으로 가기를 자청하였다.
1443년 2월 21일에 부사직이던 그는 다시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어 조선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 겸 종사관으로 선발, 통신사가 파견되자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고, 언어와 한자, 유학을 가르쳤다. 일본을 여행할 때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들 감탄하였다.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되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을 50척, 세사미두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을 50척, 세사미두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3.2. 한글 창제[편집]
집현전수찬을 지내면서 그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던 그는, 세종의 명으로 성균관 주부인 성삼문, 행사용 손수산 등과 함께 당시 죄를 짓고 만주의 요동에 귀양을 와 있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을 찾아갔고, 황찬을 만나 음운론과 인간의 발음, 언어에 대한 주요한 지식을 얻었고, 이후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면서 황찬을 찾아가 음운과 어휘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총명한 인물이었다.
신숙주는 집현전 내에서 새로운 글 연구를 찬성, 지지하는 입장에 섰으며 같은 편에는 신숙주와 그의 스승의 한 사람인 정인지, 신숙주의 동료인 성삼문, 정창손, 박팽년 등이 있었다.
또한 명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도 태평관에 친히 왕래하면서 사신으로 온 명나라학자에게 운서에 대해 질문하여 그 음을 정확하게 하는 등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음운을 연구했다. 그의 학문열에 감격받은 명나라의 사신은 조선인 기생도 마다하고 그와 토론, 담론하며 연구하였다 한다. 그는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를 두루 구사하였는데,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들 언어를 비교 분석하고 조선인의 발음과 비교 분석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려냈다.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종대왕이 기획했던 말글정책을 충실히 보필하였으며,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을 완료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집현전 부응교가 되었다가 그 해, 문과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통훈대부로 승진하고 집현전 응교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어 사헌부장령, 집의를 지냈으며 겸경연시강관과 춘추관수찬관을 겸임하였고, 세자시강원필선도 겸임하여 세자를 보도하였으며 직제학과 부제학 등을 두루 역임한다. 그는 또한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신숙주는 외국어만 잘한 사람이 아니라 풍부한 독서로 교양을 쌓은 지식인이기도 했다. 1448년부터는 세자시강원필선 자격으로 세자인 문종의 대리청정에도 참여하였다.
세종 때에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했을 때 많은 조선의 대신들이 학문이 짧다고 무시하였다가, 막상 한강을 유람하면서 시문을 주고 받을 때는 그를 당할 자가 없어서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신숙주가 성삼문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예겸을 상대하게 되었고 신숙주는 예겸과 서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
1451년(문종 1) 예겸이 다시 조선에 오자 그는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신숙주는 집현전 내에서 새로운 글 연구를 찬성, 지지하는 입장에 섰으며 같은 편에는 신숙주와 그의 스승의 한 사람인 정인지, 신숙주의 동료인 성삼문, 정창손, 박팽년 등이 있었다.
또한 명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도 태평관에 친히 왕래하면서 사신으로 온 명나라학자에게 운서에 대해 질문하여 그 음을 정확하게 하는 등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음운을 연구했다. 그의 학문열에 감격받은 명나라의 사신은 조선인 기생도 마다하고 그와 토론, 담론하며 연구하였다 한다. 그는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를 두루 구사하였는데,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들 언어를 비교 분석하고 조선인의 발음과 비교 분석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려냈다.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종대왕이 기획했던 말글정책을 충실히 보필하였으며,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을 완료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집현전 부응교가 되었다가 그 해, 문과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통훈대부로 승진하고 집현전 응교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어 사헌부장령, 집의를 지냈으며 겸경연시강관과 춘추관수찬관을 겸임하였고, 세자시강원필선도 겸임하여 세자를 보도하였으며 직제학과 부제학 등을 두루 역임한다. 그는 또한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신숙주는 외국어만 잘한 사람이 아니라 풍부한 독서로 교양을 쌓은 지식인이기도 했다. 1448년부터는 세자시강원필선 자격으로 세자인 문종의 대리청정에도 참여하였다.
세종 때에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했을 때 많은 조선의 대신들이 학문이 짧다고 무시하였다가, 막상 한강을 유람하면서 시문을 주고 받을 때는 그를 당할 자가 없어서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신숙주가 성삼문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예겸을 상대하게 되었고 신숙주는 예겸과 서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
1451년(문종 1) 예겸이 다시 조선에 오자 그는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3.3.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편집]
1453년 3월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그해 10월 수양대군이 한명회, 권람 등과 계유정난의 거사를 모의할 때 참여하여 어린 단종의 뒤에서 실력을 행사하는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는데 동참한다. 이때 그는 수양대군에게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할 것을 건의한다. 성삼문, 박팽년, 성승 등은 수양대군을 못마땅히 여겼으나 그의 회유와 권고로 정난공신의 지위를 일단 수용했다.
그해 10월 우승지를 거쳐 계유정난이 성공하고 집현전의 학사들까지 포섭하여 반발을 무마시킨 공로로 그는 수충협책정난공신 1등관에 오르고 이듬해 승정원도승지로 승진했다. 신숙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도승지의 위치에 있으면서 우부승지 권람, 동부승지 구치관과 함께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감시, 관찰하여 세조에게 보고했다. 반정 직후 그는 유언비어를 일소하는 한편, 어린 왕의 치세기간 중 일부 권신들과 재상들이 어린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정사를 마음대로 독단적으로 행사하였으며 민심이 바로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였다며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을 선언,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해 7월 경희전 고 동가제의 찬례관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부종묘 추향 대제의 아헌관 이하의 관료를 포상할 때 채단초 각각 1필을 하사받았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 1등에 고령군(高靈君)으로 봉군된 뒤 예문관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동년 그는 새 왕의 즉위를 알리는 책봉 주청사의 소임을 띠고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을 받아들고 귀국길에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1456년 귀국하였다.
명나라에 있을 당시 대명회통과 송서, 한서, 수서 등의 중국 역사책을 탐독하였고 중국의 문인들을 만나 시문을 주고받기도 했다. 귀국 후, 그는 세조의 책봉 고명을 성사시킨 공으로 그는 많은 양의 황금과 토지, 노비, 안마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세조의 총애를 얻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해 병조판서로 재직 중 전라남도와 다도해 해안가를 침략하는 왜구를 토벌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10월 우승지를 거쳐 계유정난이 성공하고 집현전의 학사들까지 포섭하여 반발을 무마시킨 공로로 그는 수충협책정난공신 1등관에 오르고 이듬해 승정원도승지로 승진했다. 신숙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도승지의 위치에 있으면서 우부승지 권람, 동부승지 구치관과 함께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감시, 관찰하여 세조에게 보고했다. 반정 직후 그는 유언비어를 일소하는 한편, 어린 왕의 치세기간 중 일부 권신들과 재상들이 어린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정사를 마음대로 독단적으로 행사하였으며 민심이 바로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였다며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을 선언,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해 7월 경희전 고 동가제의 찬례관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부종묘 추향 대제의 아헌관 이하의 관료를 포상할 때 채단초 각각 1필을 하사받았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 1등에 고령군(高靈君)으로 봉군된 뒤 예문관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동년 그는 새 왕의 즉위를 알리는 책봉 주청사의 소임을 띠고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을 받아들고 귀국길에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1456년 귀국하였다.
명나라에 있을 당시 대명회통과 송서, 한서, 수서 등의 중국 역사책을 탐독하였고 중국의 문인들을 만나 시문을 주고받기도 했다. 귀국 후, 그는 세조의 책봉 고명을 성사시킨 공으로 그는 많은 양의 황금과 토지, 노비, 안마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세조의 총애를 얻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해 병조판서로 재직 중 전라남도와 다도해 해안가를 침략하는 왜구를 토벌하고 되돌아왔다.
3.4. 사육신의 난과 단종복위운동[편집]
귀국 직후 신숙주는 성삼문 등과 재회했다. 이때 사육신으로부터 세조 3부자 처형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명분상으로는 옳지만,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실현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명회나 권람 등에게는 이 사실을 고변하지 않았는데, 뒤에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김시습 등은 그를 추한 배신자와 변절자로 규탄하였고, 사림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아내의 장례 후 큰아들 신주가 22살로 세상을 떠나고 큰며느리 한명회의 딸이 손자 신종호(세째)를 낳았으니 어린 손자들을 생각하면 그때의 심경을 헤아려 볼 만하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사육신과는 결별을 결심했다.
한편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또한 사육신의 동정론과 함께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에 대해 단종 즉위 후 권신들이 어린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며 반박하였고, 하위지 등이 세종의 한글창제 당시 이를 반대, 비판한 점을 들어 문맹을 구하려던 세종의 의지를 반대하던 신하들과 사육신을 비유, 맹목적인 보수성을 비판하였다.
1456년(세조 2년) 성삼문, 하위지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고 사육신과 그 관련자들이 처형되었다. 신숙주는 정승들과 함께 입조하여 단종을 강등시키고 서인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사육신인 성삼문과 박팽년은 형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신숙주를 향해 반역자, 배신자라고 규탄하였는데 이때 신숙주는 그들에게 그들은 단종의 충신이지만 금상(세조)의 충신은 아니라며 항변하였다. 신숙주는 세조 옆에서 그들의 고문 장면을 지켜봤으며 성삼문의 질타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사육신의 처형 직후 그는 변방의 축성을 강화하고 남해 해안가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하게 하였으며, 대마도 도주에게 조약문의 사본을 보내 경고하였다. 곧 이어 경상북도 지역에서 이보흠과 금성대군 등의 거사로 단종 복위 운동이 다시 발생하자, 탄핵 상소를 올려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는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관철시켰다. 이때 그는 노산군의 부인 송씨를 자신의 노비로 내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세조도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는 신분만 비일 뿐 노비로서 사역시킬 수 없다 하여 정업원에 혼자 살게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산림에 은둔중인 학자들은 그가 다른 뜻을 품지 않았는가 하며 의혹과 조소를 퍼부었다. 김시습은 그가 행차할 때마다 나타나서 면박을 주거나 변절자라는 말로 조롱하기도 하였다.
1456년(세조 2년)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도 관장하였다. 1456년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원사가 되어 판병조사를 겸하였으며, 그해 여름 의정부우찬성이 되어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뒤 1457년 가을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 그 뒤 신숙주는 세조의 명을 받아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농업과 목축에 대한 간단한 백서인 농산축목서를 찬하기도 했다.
아내의 장례 후 큰아들 신주가 22살로 세상을 떠나고 큰며느리 한명회의 딸이 손자 신종호(세째)를 낳았으니 어린 손자들을 생각하면 그때의 심경을 헤아려 볼 만하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사육신과는 결별을 결심했다.
한편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또한 사육신의 동정론과 함께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에 대해 단종 즉위 후 권신들이 어린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며 반박하였고, 하위지 등이 세종의 한글창제 당시 이를 반대, 비판한 점을 들어 문맹을 구하려던 세종의 의지를 반대하던 신하들과 사육신을 비유, 맹목적인 보수성을 비판하였다.
1456년(세조 2년) 성삼문, 하위지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고 사육신과 그 관련자들이 처형되었다. 신숙주는 정승들과 함께 입조하여 단종을 강등시키고 서인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사육신인 성삼문과 박팽년은 형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신숙주를 향해 반역자, 배신자라고 규탄하였는데 이때 신숙주는 그들에게 그들은 단종의 충신이지만 금상(세조)의 충신은 아니라며 항변하였다. 신숙주는 세조 옆에서 그들의 고문 장면을 지켜봤으며 성삼문의 질타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사육신의 처형 직후 그는 변방의 축성을 강화하고 남해 해안가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하게 하였으며, 대마도 도주에게 조약문의 사본을 보내 경고하였다. 곧 이어 경상북도 지역에서 이보흠과 금성대군 등의 거사로 단종 복위 운동이 다시 발생하자, 탄핵 상소를 올려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는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관철시켰다. 이때 그는 노산군의 부인 송씨를 자신의 노비로 내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세조도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는 신분만 비일 뿐 노비로서 사역시킬 수 없다 하여 정업원에 혼자 살게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산림에 은둔중인 학자들은 그가 다른 뜻을 품지 않았는가 하며 의혹과 조소를 퍼부었다. 김시습은 그가 행차할 때마다 나타나서 면박을 주거나 변절자라는 말로 조롱하기도 하였다.
1456년(세조 2년)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도 관장하였다. 1456년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원사가 되어 판병조사를 겸하였으며, 그해 여름 의정부우찬성이 되어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뒤 1457년 가을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 그 뒤 신숙주는 세조의 명을 받아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농업과 목축에 대한 간단한 백서인 농산축목서를 찬하기도 했다.
3.5. 영의정 임명[편집]
1462년(세조 8년) 5월 20일 영의정부사로 승진하였다. 그의 영의정부사 임명 직후 사육신과 갈라선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나자 일단 사임하였다가 다시 복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1464년 영의정부사직을 사직했다. 세조는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는 거듭 사직하여 물러났다. 1464년(세조 10년) 영춘추관사가 됐다.
1464년 7월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가 되어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7월 19일 일본 국왕 고하나조노가 병으로 죽었으므로 일본측의 대접은 소홀하였고 그해 12월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1466년 9월 외직에 오래 머물렀던 공신 양정이 임기가 차서 중앙에 소환되면서 세조가 북방에서 오래 근무한 일로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양정은 취중에 세조에게 '상감께서도 오랫동안 왕위에 계셨으니 이제 편히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떠냐'며 왕위를 선위하라고 진언하였다. 신숙주 등은 그의 발언을 말렸으나 사태는 확대되었다. 양정의 취중 발언에 화가 난 세조는 승지를 불러 그 뜻을 말하고 황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려 하니 승지들은 한사코 이에 응하려 하지 않고 기세가 매우 험악하였다. 신숙주는 죽음을 각오하고 양위 사태를 말려서 무마하였다.
1467년에는 이시애의 난 때 난에 협력했다는 무고를 당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467년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그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성곽을 쌓고, 각 군에도 성곽을 개보수하게 하여 미구에 있을 여진족과 몽골족 등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1467년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464년 7월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가 되어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7월 19일 일본 국왕 고하나조노가 병으로 죽었으므로 일본측의 대접은 소홀하였고 그해 12월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1466년 9월 외직에 오래 머물렀던 공신 양정이 임기가 차서 중앙에 소환되면서 세조가 북방에서 오래 근무한 일로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양정은 취중에 세조에게 '상감께서도 오랫동안 왕위에 계셨으니 이제 편히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떠냐'며 왕위를 선위하라고 진언하였다. 신숙주 등은 그의 발언을 말렸으나 사태는 확대되었다. 양정의 취중 발언에 화가 난 세조는 승지를 불러 그 뜻을 말하고 황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려 하니 승지들은 한사코 이에 응하려 하지 않고 기세가 매우 험악하였다. 신숙주는 죽음을 각오하고 양위 사태를 말려서 무마하였다.
1467년에는 이시애의 난 때 난에 협력했다는 무고를 당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467년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그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성곽을 쌓고, 각 군에도 성곽을 개보수하게 하여 미구에 있을 여진족과 몽골족 등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1467년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3.6. 성종 즉위 직후[편집]
1469년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죽자 그는 정희왕후에게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 혈을 왕으로 추천했다. 정희왕후가 자을산군으로 후계자를 결정하였을 때 귀성군을 추천하는 반대 의견이 나오자 그는“속히 상주를 정하여서 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여 정희왕후의 결정을 적극 지지한다. 1469년 예조판서 대리, 겸 춘추관 영사를 지냈다.
그는 1467년부터 오래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그는 사대교린을 자신의 신념처럼 여겼다 한다. 명나라와 여진족, 일본, 유구국 등에 보내는 표전과 사명 문건을 모두 그가 직접 최종 검토를 하였다. 외교업무를 맡으면서도 오히려 주는 것은 후하고 받는 것은 적어서 국내 사람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상대 외교국으로부터는 언제나 환심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를 외교의 달인이라며 칭찬하였지만, 그는 사람을 사귀는 것과 비위를 맞추는 것을 예로 들며 외교든 대인 접빈이든 쉽지 않음을 토로하였다.
1469년(성종 1년) 12월 29일 왕명으로 한명회, 구치관, 최항, 조석문, 김질 등과 함께 경연청 영사를 겸임하였다.
그는 1467년부터 오래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그는 사대교린을 자신의 신념처럼 여겼다 한다. 명나라와 여진족, 일본, 유구국 등에 보내는 표전과 사명 문건을 모두 그가 직접 최종 검토를 하였다. 외교업무를 맡으면서도 오히려 주는 것은 후하고 받는 것은 적어서 국내 사람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상대 외교국으로부터는 언제나 환심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를 외교의 달인이라며 칭찬하였지만, 그는 사람을 사귀는 것과 비위를 맞추는 것을 예로 들며 외교든 대인 접빈이든 쉽지 않음을 토로하였다.
1469년(성종 1년) 12월 29일 왕명으로 한명회, 구치관, 최항, 조석문, 김질 등과 함께 경연청 영사를 겸임하였다.
4. 사망[편집]
1473년 충훈부 당상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1474년(성종 5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하였다.
1474년 4월 24일 공혜왕후의 국상 시 국장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그해 6월까지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1475년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계속 영의정직에 있었다. 왕이 그에게 특별히 궤장과 안대를 하사하려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궤장을 받을 나이는 아니라며 조용히 사양하였다. 한편으로 일본과 여진을 경계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주력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임종 직전에 문병 온 성종이 조언을 묻자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하였다. 그러고는 병으로 죽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서예로도 재능을 발휘해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그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고 등의 작품을 남겼다.
많은 시와 다양한 저작과 작품을 남겼으나 후일 사림파에 의해 역적으로 단죄되면서 그의 저서와 작품, 시, 글씨들 중에는 중종 때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다수 소각되거나 인멸되었다. 또한 그가 사후 변절자, 배신자로 매도당하면서 그의 작품과 저서, 시, 그림 등은 대부분 외면당하고 말았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저서인 보한재집, 북정록, 사성통고, 농산축목서, 해동제국기 등이 있고, 글씨로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의 찬문과 해서체의 작품 화명사예겸시고 등이 현전한다. 특히 보한재집은 1644년(인조 22년) 신숙주의 6대손인 신숙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문집의 완질을 빌려서 모사한 것이 전한다.
사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현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에 안장되었으며 부인 무송군부인 무송윤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후일 그의 자손들 묘소도 근처에 조성되면서 묘역이 되었다. 묘비문은 이승소가 썼고, 신도비문은 정난종이 찬하였다. 이후 종의 묘정에 종사되고, 문충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충북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 청주시 낭성면 관정리의 묵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보사공신, 좌리공신 등에 책록되었으므로 성종은 그에게 부조지전을 내려 불천지위가 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1445년경 명나라 화공에 의해 그려진 저본설색에 견장족자로 된 영정과 15세기 후반, 사망 직후에 그려진 영정, 1445년 명나라화가본 및 기타 영정들을 참고로 그린 1749년본 영정 등이 전한다. 1445년경 명나라 화공본 영정은 현 청주시에 위치한 구봉영당에 봉안되어 있다가 1970년 이후 공개되었고, 모사본은 묵정영당과 고잔묘 등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 중 1445년에 명나라 화가가 그린 원본 신숙주 영정은 1977년 11월 15일 대한민국 보물 제 613호로 지정되었다.
1474년 4월 24일 공혜왕후의 국상 시 국장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그해 6월까지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1475년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계속 영의정직에 있었다. 왕이 그에게 특별히 궤장과 안대를 하사하려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궤장을 받을 나이는 아니라며 조용히 사양하였다. 한편으로 일본과 여진을 경계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주력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임종 직전에 문병 온 성종이 조언을 묻자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하였다. 그러고는 병으로 죽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서예로도 재능을 발휘해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그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고 등의 작품을 남겼다.
많은 시와 다양한 저작과 작품을 남겼으나 후일 사림파에 의해 역적으로 단죄되면서 그의 저서와 작품, 시, 글씨들 중에는 중종 때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다수 소각되거나 인멸되었다. 또한 그가 사후 변절자, 배신자로 매도당하면서 그의 작품과 저서, 시, 그림 등은 대부분 외면당하고 말았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저서인 보한재집, 북정록, 사성통고, 농산축목서, 해동제국기 등이 있고, 글씨로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의 찬문과 해서체의 작품 화명사예겸시고 등이 현전한다. 특히 보한재집은 1644년(인조 22년) 신숙주의 6대손인 신숙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문집의 완질을 빌려서 모사한 것이 전한다.
사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현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에 안장되었으며 부인 무송군부인 무송윤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후일 그의 자손들 묘소도 근처에 조성되면서 묘역이 되었다. 묘비문은 이승소가 썼고, 신도비문은 정난종이 찬하였다. 이후 종의 묘정에 종사되고, 문충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충북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 청주시 낭성면 관정리의 묵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보사공신, 좌리공신 등에 책록되었으므로 성종은 그에게 부조지전을 내려 불천지위가 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1445년경 명나라 화공에 의해 그려진 저본설색에 견장족자로 된 영정과 15세기 후반, 사망 직후에 그려진 영정, 1445년 명나라화가본 및 기타 영정들을 참고로 그린 1749년본 영정 등이 전한다. 1445년경 명나라 화공본 영정은 현 청주시에 위치한 구봉영당에 봉안되어 있다가 1970년 이후 공개되었고, 모사본은 묵정영당과 고잔묘 등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 중 1445년에 명나라 화가가 그린 원본 신숙주 영정은 1977년 11월 15일 대한민국 보물 제 613호로 지정되었다.
5. 업적[편집]
그는 다국어에 능하였고, 탁월한 학식과 문재로써 다양한 책을 편찬하고 역사적, 학문적 소양이 깊어 학문 교육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는 유교의 사서육경 외에도 풍수지리학과 노장 사상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세조의 문화 통치를 위해 왕들의 귀감이 될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하였으며, 사서 오경의 구결을 새로이 만들었다. 또한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동국통감의 편찬을 총괄하였고, 동국정운, 영모록 등을 찬수하였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일본에 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 온 후 몇번 일본을 왕래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 이를 토대로 일본의 풍물과 관습, 언어, 정치 세력, 일본의 기후, 자연 조건, 일본과의 외교시 필요한 사항 등을 상세하게 밝혀 놓은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여 향후 일본과의 교린외교에 참고가 되게 하였다. 또 신숙주는 그림을 잘 그려서 일본과 여진의 지도, 베이징의 지도를 만들었으나 후에 모두 실전되었다.
그의 저서 중 사성통고는 후대에 실전되었지만, 중종 때의 한어 통역관이자 언어학자인 최세진이 그의 사성통고를 참조하여 사성통해를 짓기도 했다.
그는 퇴청 후에도 별도의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길러냈다. 세조 때에 과거 시험의 주시관을 13회나 과거 시험을 하여 합격자들을 선발하여, 좌주 문생관계를 형성하니 직접 길러낸 제자들 외에도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다.
또한 훈민정음의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 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저서 중 사성통고는 후대에 실전되었지만, 중종 때의 한어 통역관이자 언어학자인 최세진이 그의 사성통고를 참조하여 사성통해를 짓기도 했다.
그는 퇴청 후에도 별도의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길러냈다. 세조 때에 과거 시험의 주시관을 13회나 과거 시험을 하여 합격자들을 선발하여, 좌주 문생관계를 형성하니 직접 길러낸 제자들 외에도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다.
또한 훈민정음의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 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6. 평가[편집]
6.1. 긍정적[편집]
사돈이기도 한 용재 이행은 그를 많은 지식을 집대성하고 실전, 실무에 적용시키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연구에 오래 참여하였고 집현전에 근무하는 동안 퇴근도 잊고 독서실에서 연구로 밤을 새는 일이 허다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당직을 자청하였고 당직이 아니라도 서고에서 날을 새는 그의 열정을 세종은 높이 평가했다. 세종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신숙주는 문무에 두루 능하여 국사를 부탁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고,[2] 세조를 만나서는 계책이 행해지고 말은 받아들여졌다. 세종과 세조는 그를 각별히 신뢰하여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렀다.
건국 초기 불편했던 조일 관계를 정상화시켰고, 강원도와 함길도의 체찰사로 파견되어 여진]의 침략을 막았으며, 몇 십 년 동안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 국가에 봉사하는 등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어학자, 외교가, 저술가, 번역가, 경륜가, 군사전문가, 명재상으로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세조의 반정공신이라는 이유로 사림파에 의해 그 공로가 폄하되었다. 왕정의 비능률성이 인위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신숙주가 일신의 영달 만을 도모했다고 보기는 어렵는 견해도 있다. 사후 50년 뒤에 편찬된 1525년의 용재총화에는 신숙주를 가리켜 '그 문장과 도덕에서 모두 일대의 존경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정난에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아 한글 연구와 보급, 전승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대의를 따른 과감한 인사라는 평가도 있다. 그는 세조가 즉위하는 것을 돕고 많은 중요한 직책에 올랐기 때문에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가장 위대한 신하 중 하나였고, 훈민정음을 창조할 때 크게 공헌한 신하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에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의 공이 있다는 얘기는 어떤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건국 초기 불편했던 조일 관계를 정상화시켰고, 강원도와 함길도의 체찰사로 파견되어 여진]의 침략을 막았으며, 몇 십 년 동안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 국가에 봉사하는 등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어학자, 외교가, 저술가, 번역가, 경륜가, 군사전문가, 명재상으로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세조의 반정공신이라는 이유로 사림파에 의해 그 공로가 폄하되었다. 왕정의 비능률성이 인위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신숙주가 일신의 영달 만을 도모했다고 보기는 어렵는 견해도 있다. 사후 50년 뒤에 편찬된 1525년의 용재총화에는 신숙주를 가리켜 '그 문장과 도덕에서 모두 일대의 존경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정난에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아 한글 연구와 보급, 전승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대의를 따른 과감한 인사라는 평가도 있다. 그는 세조가 즉위하는 것을 돕고 많은 중요한 직책에 올랐기 때문에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가장 위대한 신하 중 하나였고, 훈민정음을 창조할 때 크게 공헌한 신하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에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의 공이 있다는 얘기는 어떤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6.2. 부정적[편집]
성종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신숙주는 세종의 유언을 저버린 배신자, 동료들을 배신한 변절자로 지목되어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이라는 용어는 중종 이후 사림파가 만들었다. 이는 사림파의 대의 명분이라는 가치관에 입각한 폄하였다. 또한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출처불명의 소문이 돌면서 김시습 등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세조의 공신으로 있을 때는 왕의 뜻에만 편승하여 승순만을 힘썼고, 예종 때에는 형벌을 내릴 때 공정함을 잃었으며, 남이와 강순의 억울함을 구제하지 않았다 하여 당대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유자광 등이 남이를 처형할 때 동조한 점 역시, 남이에 대한 동정론과 함께 맞물려서 그에 대한 비난의 소재의 하나로 활용됐다. 민족적 절의를 고양시킬 필요가 절실했던 일제강점기에는 쓰여진 일종의 비공식 역사서인 김택영의 한사경에는 세조 즉위 전후의 생사를 오가는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신숙주가 미모에 끌려 단종비 송씨를 노비로 들이겠다고 청했다는 허구적이면서도 다소 선정적인 이야기가 등장할 정도였다.
한때 신숙주는 지조와 의리가 강조되던 시대에 쓰여진 이광수의 단종애사 나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 목메이는 여자 등의 작품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단종애사는 널리 읽히는 소설이었고 이는 광복 이후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단종애사의 유행 역시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는 사람들이 드라마와 야사,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만을 신뢰하여 신숙주를 일방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보았다.
또한 소설 단종애사 속에서 절개를 지키지 않은 남편을 부끄러워해 부인 윤씨가 자살했다는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윤씨는 자연사로 죽었으며 사망 시기도 신숙주가 사신으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이었다.
유자광 등이 남이를 처형할 때 동조한 점 역시, 남이에 대한 동정론과 함께 맞물려서 그에 대한 비난의 소재의 하나로 활용됐다. 민족적 절의를 고양시킬 필요가 절실했던 일제강점기에는 쓰여진 일종의 비공식 역사서인 김택영의 한사경에는 세조 즉위 전후의 생사를 오가는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신숙주가 미모에 끌려 단종비 송씨를 노비로 들이겠다고 청했다는 허구적이면서도 다소 선정적인 이야기가 등장할 정도였다.
한때 신숙주는 지조와 의리가 강조되던 시대에 쓰여진 이광수의 단종애사 나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 목메이는 여자 등의 작품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단종애사는 널리 읽히는 소설이었고 이는 광복 이후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단종애사의 유행 역시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는 사람들이 드라마와 야사,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만을 신뢰하여 신숙주를 일방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보았다.
또한 소설 단종애사 속에서 절개를 지키지 않은 남편을 부끄러워해 부인 윤씨가 자살했다는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윤씨는 자연사로 죽었으며 사망 시기도 신숙주가 사신으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이었다.
6.3. 현대[편집]
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한 후로 그에 대한 비판은 다소 수그러들었고,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조명 여론도 나타났다. 그의 묘소인 경기도 의정부의 신숙주 묘는 1970년대까지도 버려졌다가 1980년 이후부터 신숙주의 역할에 대한 조명과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면서 비로소 사료와 신숙주의 작품, 저서들도 정리, 재출간되고 버려져 있던 묘소도 정비되었다. 전남 나주군 오룡동에 있던 그의 외가와 생가도 대한민국 수립 이후 1980년대부터 성역화와 재정비가 시작되었다.
한글학회에서는 1971년 10월 9일 한글날에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53번지에 위치한 신숙주 묘정에다 ‘한글 창제 사적비’를 건립했다. 충북 청원군(현재는 청주시로 승격)에서는 신숙주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 등을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 하였다. 문화관광부는 2002년도 10월의 문화인물로 신숙주를 선정했다. 2007년 9월 15일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고잔리에 신숙주 문학비가 세워졌다.
묘소는 의정부 교도소 건너편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에 있다.
한글학회에서는 1971년 10월 9일 한글날에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53번지에 위치한 신숙주 묘정에다 ‘한글 창제 사적비’를 건립했다. 충북 청원군(현재는 청주시로 승격)에서는 신숙주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 등을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 하였다. 문화관광부는 2002년도 10월의 문화인물로 신숙주를 선정했다. 2007년 9월 15일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고잔리에 신숙주 문학비가 세워졌다.
묘소는 의정부 교도소 건너편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에 있다.
7. 여담[편집]
- 신숙주에게는 평생 그를 주변에서 호위하며 미래를 예지해준 청의동자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 세조는 그를 놀려줄 생각으로 구치관을 불러서 구정승이라 불렀다. 그러자 구치관이 대답하자 구 정승을 불렀는데 왜 새 정승이 대답하느냐며 구치관, 신숙주에게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신정승을 부르자 신숙주가 대답했는데 새 정승을 불렀는데 신숙주가 대답했다며 벌주를 내렸다. 구정승을 부르자 신숙주가 대답하자 구 정승을 불렀는데 신숙주가 대답했다며 벌주를 내렸고, 신정승을 찾아 구치관이 답하자 신 정승을 찾았는데 구정승이 답한다며 벌주를 내렸다.
- 한번은 신숙주가 술좌석에서 세조의 비위를 건드리는 발언을 하였다. 화가 난 세조는 참고 있었는데, 그는 평소 새벽에도 일어나 책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한명회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왕이 사람을 보낼 것이니 불을 끄고 자라고 일러주었다. 그 날 새벽 그는 책을 읽지 않고 불을 끄고 있었고, 세조가 보낸 승지와 내관은 그가 취해서 자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 야사에 의하면 그는 노비가 된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를 자신의 집 노비로 달라고 세조에게 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이는 소문으로만 전해지다가 후에 김택영은 자신의 저서 한사경에 이 야사를 기록해두었고, 후일 일제강점기 때 문인 춘원 이광수는 자신의 작품 단종애사에 이 야사를 수록하여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8.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