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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17년 8월 11일 | |
전라도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 (現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 | ||
1475년 8월 1일 (향년 57세) |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 53-7 | ||
본관 | ||
재임기간 | 제28대 영의정부사 → 영의정 | |
1462년 6월 26일 ~ 1466년 6월 9일 | ||
제40대 영의정 | ||
1471년 12월 13일 ~ 1475년 8월 1일 | ||
이름 | 호 | 보한재, 희현당 |
자 | 범옹 | |
봉호 | 고령군 → 고령부원군 | |
시호 | 문충 | |
학력 | 1439년 친시문과 을과 급제 1447년 중시문과 급제 | |
가족 | 아버지 신장, 어머니 나주 정씨 정유의 딸 형 신맹주, 신중주 남동생 신송주, 신말주 여동생 창녕 조씨 조효문의 처, 화순 최씨 최선복의 처 배우자 무송 윤씨 자녀 9남 2녀 | |
유교 (성리학) |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본관은 고령(高靈), 자(字)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장(申檣)의 아들이자 윤회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사육신과 함께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결국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 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회, 정인지의 문인이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사육신과 함께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결국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 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회, 정인지의 문인이다.
3. 사망[편집]
1473년 충훈부 당상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1474년(성종 5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하였다.
1474년 4월 24일 공혜왕후의 국상 시 국장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그해 6월까지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1475년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계속 영의정직에 있었다. 왕이 그에게 특별히 궤장과 안대를 하사하려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궤장을 받을 나이는 아니라며 조용히 사양하였다. 한편으로 일본과 여진을 경계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주력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임종 직전에 문병 온 성종이 조언을 묻자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하였다. 그러고는 병으로 죽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서예로도 재능을 발휘해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그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고 등의 작품을 남겼다.
많은 시와 다양한 저작과 작품을 남겼으나 후일 사림파에 의해 역적으로 단죄되면서 그의 저서와 작품, 시, 글씨들 중에는 중종 때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다수 소각되거나 인멸되었다. 또한 그가 사후 변절자, 배신자로 매도당하면서 그의 작품과 저서, 시, 그림 등은 대부분 외면당하고 말았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저서인 보한재집, 북정록, 사성통고, 농산축목서, 해동제국기 등이 있고, 글씨로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의 찬문과 해서체의 작품 화명사예겸시고 등이 현전한다. 특히 보한재집은 1644년(인조 22년) 신숙주의 6대손인 신숙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문집의 완질을 빌려서 모사한 것이 전한다.
사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현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에 안장되었으며 부인 무송군부인 무송윤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후일 그의 자손들 묘소도 근처에 조성되면서 묘역이 되었다. 묘비문은 이승소가 썼고, 신도비문은 정난종이 찬하였다. 이후 종의 묘정에 종사되고, 문충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충북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 청주시 낭성면 관정리의 묵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보사공신, 좌리공신 등에 책록되었으므로 성종은 그에게 부조지전을 내려 불천지위가 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1445년경 명나라 화공에 의해 그려진 저본설색에 견장족자로 된 영정과 15세기 후반, 사망 직후에 그려진 영정, 1445년 명나라화가본 및 기타 영정들을 참고로 그린 1749년본 영정 등이 전한다. 1445년경 명나라 화공본 영정은 현 청주시에 위치한 구봉영당에 봉안되어 있다가 1970년 이후 공개되었고, 모사본은 묵정영당과 고잔묘 등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 중 1445년에 명나라 화가가 그린 원본 신숙주 영정은 1977년 11월 15일 대한민국 보물 제 613호로 지정되었다.
1474년 4월 24일 공혜왕후의 국상 시 국장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그해 6월까지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1475년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계속 영의정직에 있었다. 왕이 그에게 특별히 궤장과 안대를 하사하려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궤장을 받을 나이는 아니라며 조용히 사양하였다. 한편으로 일본과 여진을 경계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주력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임종 직전에 문병 온 성종이 조언을 묻자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하였다. 그러고는 병으로 죽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서예로도 재능을 발휘해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그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고 등의 작품을 남겼다.
많은 시와 다양한 저작과 작품을 남겼으나 후일 사림파에 의해 역적으로 단죄되면서 그의 저서와 작품, 시, 글씨들 중에는 중종 때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다수 소각되거나 인멸되었다. 또한 그가 사후 변절자, 배신자로 매도당하면서 그의 작품과 저서, 시, 그림 등은 대부분 외면당하고 말았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저서인 보한재집, 북정록, 사성통고, 농산축목서, 해동제국기 등이 있고, 글씨로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의 찬문과 해서체의 작품 화명사예겸시고 등이 현전한다. 특히 보한재집은 1644년(인조 22년) 신숙주의 6대손인 신숙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문집의 완질을 빌려서 모사한 것이 전한다.
사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현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에 안장되었으며 부인 무송군부인 무송윤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후일 그의 자손들 묘소도 근처에 조성되면서 묘역이 되었다. 묘비문은 이승소가 썼고, 신도비문은 정난종이 찬하였다. 이후 종의 묘정에 종사되고, 문충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충북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 청주시 낭성면 관정리의 묵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보사공신, 좌리공신 등에 책록되었으므로 성종은 그에게 부조지전을 내려 불천지위가 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1445년경 명나라 화공에 의해 그려진 저본설색에 견장족자로 된 영정과 15세기 후반, 사망 직후에 그려진 영정, 1445년 명나라화가본 및 기타 영정들을 참고로 그린 1749년본 영정 등이 전한다. 1445년경 명나라 화공본 영정은 현 청주시에 위치한 구봉영당에 봉안되어 있다가 1970년 이후 공개되었고, 모사본은 묵정영당과 고잔묘 등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 중 1445년에 명나라 화가가 그린 원본 신숙주 영정은 1977년 11월 15일 대한민국 보물 제 613호로 지정되었다.
4. 업적[편집]
그는 다국어에 능하였고, 탁월한 학식과 문재로써 다양한 책을 편찬하고 역사적, 학문적 소양이 깊어 학문 교육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는 유교의 사서육경 외에도 풍수지리학과 노장 사상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세조의 문화 통치를 위해 왕들의 귀감이 될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하였으며, 사서 오경의 구결을 새로이 만들었다. 또한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동국통감의 편찬을 총괄하였고, 동국정운, 영모록 등을 찬수하였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일본에 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 온 후 몇번 일본을 왕래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 이를 토대로 일본의 풍물과 관습, 언어, 정치 세력, 일본의 기후, 자연 조건, 일본과의 외교시 필요한 사항 등을 상세하게 밝혀 놓은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여 향후 일본과의 교린외교에 참고가 되게 하였다. 또 신숙주는 그림을 잘 그려서 일본과 여진의 지도, 베이징의 지도를 만들었으나 후에 모두 실전되었다.
그의 저서 중 사성통고는 후대에 실전되었지만, 중종 때의 한어 통역관이자 언어학자인 최세진이 그의 사성통고를 참조하여 사성통해를 짓기도 했다.
그는 퇴청 후에도 별도의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길러냈다. 세조 때에 과거 시험의 주시관을 13회나 과거 시험을 하여 합격자들을 선발하여, 좌주 문생관계를 형성하니 직접 길러낸 제자들 외에도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다.
또한 훈민정음의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 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저서 중 사성통고는 후대에 실전되었지만, 중종 때의 한어 통역관이자 언어학자인 최세진이 그의 사성통고를 참조하여 사성통해를 짓기도 했다.
그는 퇴청 후에도 별도의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길러냈다. 세조 때에 과거 시험의 주시관을 13회나 과거 시험을 하여 합격자들을 선발하여, 좌주 문생관계를 형성하니 직접 길러낸 제자들 외에도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다.
또한 훈민정음의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 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