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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제4대 국무령 안창호[1] 安昌浩 | Ahn Chang-ho | ||
출생 | 1878년 11월 9일 | |
사망 | 1938년 3월 10일 (향년 59세) | |
묘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 |
사인 | 폐결핵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 | |
국적 | ||
학력 |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 (졸업) | |
가족 | 아버지 : 안흥국 어머니 : 제안 황씨 배우자 : 이혜련 아들 : 안필립, 안필선, 안필영 딸 : 안수산, 안수라 | |
종교 | 유교 (성리학) → 개신교 |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6대 국무령 | ||
임기 | 1926년 5월 3일~1926년 5월 16일 | |
전임 | 이동녕 (제5대) | |
후임 | 이동녕 (제7대) |
1. 개요[편집]
안창호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2. 상세[편집]
그의 사후 1988년 3월 21, 24일, 안창호가 공부한 구세학당 , 즉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에 소속한 장로교회 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졸업장이 추서됐다.
평안남도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해 1899년(광무 2년) 점진학교, 1908년(융희 2년) 대성학교, 1926년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과는 동성동본 친족척이기도 하며 1938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간경화를 비롯한 폐렴과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 복막염 및 피부염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타계한 그는 생전에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소화불량과 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한다.
평안남도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해 1899년(광무 2년) 점진학교, 1908년(융희 2년) 대성학교, 1926년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과는 동성동본 친족척이기도 하며 1938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간경화를 비롯한 폐렴과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 복막염 및 피부염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타계한 그는 생전에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소화불량과 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한다.
3. 생애[편집]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江西) 초리면 7리 봉상도(도롱섬)에서 1878년 11월 9일 농부인 순흥 안씨 안흥국(安興國, 족보상 이름은 안교진(安敎晋)과 제남 황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안치호(安致昊)와 형이 한명 더 있었고, 아래로는 그가 6세 때 여동생 안신호(安信浩)가 태어났다. 선대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공조참의를 지낸 안종검의 17대손으로, 세조 때의 재상 안지귀, 중종대의 정승 안당은 그의 방계 선조들이었다.[4] 안중근, 안공근 일가는 안종검의 형제인 전라도관찰사 증 병조참판 안종신의 후손으로 역시 그의 먼 친족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계는 몰락하여 평안남도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의 처음 이름은 치삼이었다. 그러나 10세가 되어 학교에 다닐 무렵 이름을 창호로 개명하였다.
할아버지 안태열(安泰烈)은 관직이 통덕랑에 머물렀고, 가세는 더 기울어서 아버지 안흥국은 관직을 지내지 못하고 가난한 농부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12세 때 아버지 안흥국을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안태열의 손에 자랐다. 9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조숙했던 그는 서당에 함께 다니며 공부하던 몇년 연상의 필대은(畢大殷) 등과 함께 국내·외의 이런 저런 문제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목동 생활을 하며 1890년 전후 황해도 구월산을 돌아다녔다.
공조참의를 지낸 안종검의 17대손으로, 세조 때의 재상 안지귀, 중종대의 정승 안당은 그의 방계 선조들이었다.[4] 안중근, 안공근 일가는 안종검의 형제인 전라도관찰사 증 병조참판 안종신의 후손으로 역시 그의 먼 친족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계는 몰락하여 평안남도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의 처음 이름은 치삼이었다. 그러나 10세가 되어 학교에 다닐 무렵 이름을 창호로 개명하였다.
할아버지 안태열(安泰烈)은 관직이 통덕랑에 머물렀고, 가세는 더 기울어서 아버지 안흥국은 관직을 지내지 못하고 가난한 농부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12세 때 아버지 안흥국을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안태열의 손에 자랐다. 9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조숙했던 그는 서당에 함께 다니며 공부하던 몇년 연상의 필대은(畢大殷) 등과 함께 국내·외의 이런 저런 문제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목동 생활을 하며 1890년 전후 황해도 구월산을 돌아다녔다.
3.1. 유년기와 수학문제[편집]
1892년(고종 29년) 평안남도 대동군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사하면서, 그는 노남리댁 셋째라고 불리었다. 이때 안창호는 저명한 성리학자인 김현진에게 한학과 성리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16세때 안창호는 평양이 청일전쟁으로 파괴당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을 겪으며 청나라와 일본군의 진입을 보고 자신이 구국의 대열에 나서야 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할아버지 안태열이 반대했고 온 집안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는 홀로 경성부로 가려 했다. 결국 삼촌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가출하여 차를 타고 경성부로 올라갔다. 이어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구세학당 보통부에 입학하였다.
무작정 경성에 올라온 안창호는 어느 날 경성 정동제일교회가 있는 골목을 지나치다가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먹고 자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으니 우리 학교로 오라' 고 권하는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를 만난 것을 계기로 장로교에서 설립한 구세학당(求世學堂)에 들어가 공부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산수, 지리, 세계사, 과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또한 구세학당 재학 중 송순명의 전도로 장로교에 입교하였다. 장로교로 개종하면서 자신에게 개화 사상을 준 필대은에게도 기독교를 소개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16세때 안창호는 평양이 청일전쟁으로 파괴당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을 겪으며 청나라와 일본군의 진입을 보고 자신이 구국의 대열에 나서야 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할아버지 안태열이 반대했고 온 집안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는 홀로 경성부로 가려 했다. 결국 삼촌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가출하여 차를 타고 경성부로 올라갔다. 이어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구세학당 보통부에 입학하였다.
무작정 경성에 올라온 안창호는 어느 날 경성 정동제일교회가 있는 골목을 지나치다가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먹고 자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으니 우리 학교로 오라' 고 권하는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를 만난 것을 계기로 장로교에서 설립한 구세학당(求世學堂)에 들어가 공부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산수, 지리, 세계사, 과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또한 구세학당 재학 중 송순명의 전도로 장로교에 입교하였다. 장로교로 개종하면서 자신에게 개화 사상을 준 필대은에게도 기독교를 소개하였다.
3.2. 교육 계몽 운동[편집]
1897년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였는데, 상급 학부로 진학하지 않고 보통부의 조교로 취직하였다. 그해 고향으로 잠깐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 안태열은 안성 이씨 이석관(李錫寶)의 장녀 이혜련(李惠練, 당시 13세)여사와 성혼시켰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인 약혼이 되었음을 알고 할아버지에게 파혼을 주장했으나 관철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파혼하지 못하고 다시 경성부로 되돌아와야 했다.
1897년, 서재필·이승만·유길준·윤치호 등이 주관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였으며, 이상재, 윤치호, 이동녕, 이승만, 양기탁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곧 만민공동회 관서지방 발기회에도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이후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평양부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회를 개최하여 강연에 연사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는데, 이 때 그는 청년 웅변가로 명성이 알려졌다. 이후 안창호는 곳곳에 순회강연을 다니기도 했고, 연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1898년(광무 1년) 11월 경성부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7대신을 탄핵, 성토하였고, 6개조의 정치혁신안(政治革新案)을 건의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가 황국협회의 무고와 습격으로 해산되자, 안창호는 은신해 있다가 고향으로 되돌아가 교육과 기독교 전도운동에 뛰어들었다. 1899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였고, 인근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간척 사업을 추진하였다. 1902년(광무 5년) 이혜련과 결혼하였고 그 해 11월 4일 아내 이혜련과 함께 배편으로 출국, 일본 동경에서 1주일을 체류한 후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일몰 중에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을 본 안창호는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이라고 지었다.
1897년, 서재필·이승만·유길준·윤치호 등이 주관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였으며, 이상재, 윤치호, 이동녕, 이승만, 양기탁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곧 만민공동회 관서지방 발기회에도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이후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평양부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회를 개최하여 강연에 연사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는데, 이 때 그는 청년 웅변가로 명성이 알려졌다. 이후 안창호는 곳곳에 순회강연을 다니기도 했고, 연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1898년(광무 1년) 11월 경성부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7대신을 탄핵, 성토하였고, 6개조의 정치혁신안(政治革新案)을 건의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가 황국협회의 무고와 습격으로 해산되자, 안창호는 은신해 있다가 고향으로 되돌아가 교육과 기독교 전도운동에 뛰어들었다. 1899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였고, 인근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간척 사업을 추진하였다. 1902년(광무 5년) 이혜련과 결혼하였고 그 해 11월 4일 아내 이혜련과 함께 배편으로 출국, 일본 동경에서 1주일을 체류한 후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일몰 중에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을 본 안창호는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이라고 지었다.
4. 활동가로서의 의의[편집]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무력투쟁론,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으로 나뉠 때 민족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민족개조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여 경제적, 사회적인 실력을 길러야만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교육 입국론을 제창하여 각종 학교의 설립과 양성에 노력하였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그의 실력 양성론은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송진우, 안호상, 조병옥, 김성수 등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다.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연설과 웅변에 두루 능통하였다. 여러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한편 그는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유길준을 지목했다. 다른 이름은 창호(昌鎬)이고, 자는 치삼, 호인 도산(島山),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별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연설과 웅변에 두루 능통하였다. 여러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한편 그는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유길준을 지목했다. 다른 이름은 창호(昌鎬)이고, 자는 치삼, 호인 도산(島山),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별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5. 본 문서 정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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