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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준비위원회 초대 위원장 여운형 呂運亨 | Lyuh Woon-hyung | |
출생 | 1886년 5월 25일 |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묘곡리 (묘골) (現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 |
사망 | 1947년 7월 19일 (향년 61세) / (사망 78주기) |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56) | |
묘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서울 여운형 묘소 |
국적 | |
본관 | 함양 여씨 |
가족 | 아버지 여정현 어머니 경주 이씨 부인 부인 강릉 유씨 (사별), 진상하 (재혼) 자녀 4남 3녀 |
직업 | 독립운동가 겸 저술가 |
종교 | |
소속 정당 | 근로인민당 |
상훈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1990년 추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2005년 추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2008년 추서)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3. 생애[편집]
→ 자세한 내용은 여운형/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망[편집]
미군정은 정치적인 필요성 때문에 여운형을 중시하고 가까이 하였지만, 그를 신뢰하지는 않았다. 1947년 7월 19일 아침, 여운형은 김용중에게 영문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엔 죽음을 예견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구심점을 잃게 된다. 제2차 미소공위는 추진하던 중 이후 중재자가 없어지자 극좌,극우 양극단 세력의 갈등이 표출하였고, 끝내 미국-소련의 입장만 확인한 채 1947년 10월에 제2차 미소공위는 완전히 결렬되어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함으로써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에 공식 해체된다. 결국,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은 좌절되어 실패로 끝났고 한반도는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피습, 절명하여 암살되었을 당시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47년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발인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영결식은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에 약 60여만명의 수많은 추모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이는 광복 이후 최다 인파가 모인 것인데, 민중들이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흰 옷을 입어서 서울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 영구는 결식장인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으로 향해 서서히 갔고, 장례 행렬은 11시 40분에 서울운동장에 도착하여 영결식이 치러졌다. 서울 운동장에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선수 김성집 등 체육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
그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처리되어 쇠로 만들어진 관에 안치되었다. 통일이 되는 날에 다시 장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그가 죽자 미 군정장관 하지가 육각수은관을 미국에서 특별 주문해 가져왔다고 한다.
여운형의 묘소는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에 안치되었으며 강북구 수유동에서 멀지 않은 솔밭공원 근처에 있다. 한 때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우이동 묘소 땅이 채윤혁 개인에게 불하받게 되어 여운형 시신이 오갈 데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법적으로 어떻게 해볼 길이 없으니 대통령 박정희한테 직접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그 분 사상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면서 좋게 해결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5년 7월 19일에 공식적인 추모식이 열렸다.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2007년 항일독립운동가단체 협의회로부터 신간회창립80주년을 기념하는 민족공동체 상이 추서되었다. 양평군에서는 생가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5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 여운형집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암살 사건 당시 경찰은 범행 발생 나흘 후인 1947년 7월 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필형)이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체포 후 한지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애국투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배후는 밝히지 않았다. 1974년 2월 공소시효가 지나자 유순필, 김흥성, 김훈, 김영성이라는 사람들이 서울지검에 출두해 "자신들이 몽양 암살에 가담했다."고 자백한다. 이들은 "민족분열의 책임자는 여운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극우 테러단체인 혁신탐정사와 비밀결사 백의사로부터 입수한 권총 2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한지근은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와 친분이 있는 사이이고, 사건 발생후 권총과 실탄 10발을 한현우 집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배후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여운형의 암살 배경과 그 배후는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피습, 절명하여 암살되었을 당시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47년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발인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영결식은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에 약 60여만명의 수많은 추모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이는 광복 이후 최다 인파가 모인 것인데, 민중들이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흰 옷을 입어서 서울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 영구는 결식장인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으로 향해 서서히 갔고, 장례 행렬은 11시 40분에 서울운동장에 도착하여 영결식이 치러졌다. 서울 운동장에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선수 김성집 등 체육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
그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처리되어 쇠로 만들어진 관에 안치되었다. 통일이 되는 날에 다시 장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그가 죽자 미 군정장관 하지가 육각수은관을 미국에서 특별 주문해 가져왔다고 한다.
여운형의 묘소는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에 안치되었으며 강북구 수유동에서 멀지 않은 솔밭공원 근처에 있다. 한 때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우이동 묘소 땅이 채윤혁 개인에게 불하받게 되어 여운형 시신이 오갈 데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법적으로 어떻게 해볼 길이 없으니 대통령 박정희한테 직접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그 분 사상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면서 좋게 해결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5년 7월 19일에 공식적인 추모식이 열렸다.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2007년 항일독립운동가단체 협의회로부터 신간회창립80주년을 기념하는 민족공동체 상이 추서되었다. 양평군에서는 생가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5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 여운형집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암살 사건 당시 경찰은 범행 발생 나흘 후인 1947년 7월 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필형)이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체포 후 한지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애국투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배후는 밝히지 않았다. 1974년 2월 공소시효가 지나자 유순필, 김흥성, 김훈, 김영성이라는 사람들이 서울지검에 출두해 "자신들이 몽양 암살에 가담했다."고 자백한다. 이들은 "민족분열의 책임자는 여운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극우 테러단체인 혁신탐정사와 비밀결사 백의사로부터 입수한 권총 2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한지근은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와 친분이 있는 사이이고, 사건 발생후 권총과 실탄 10발을 한현우 집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배후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여운형의 암살 배경과 그 배후는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