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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조선 제1·3대 삼도수군통제사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李舜臣 | Yi Sunshin
파일:이순신 어진.jpg
출생
1545년 4월 28일
한성부 남부 건천동 이정 자택
(現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598년 12월 16일 (향년 53세)
(사망 427주기)
경상도 남해현 군내면 관음포 인근
(現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7)
덕수 이씨
재임기간
정읍 겸 태인현감
1590년 1월 6일 ~ 1591년 2월 24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1591년 3월 8일 ~ 1597년 4월 12일
1593년 9월 12일 ~ 1597년 3월 14일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이름
여해
기계, 덕암
덕풍부원군
충무
신체
약 168 ~ 190cm
가족
아버지 이정, 어머니 초계 변씨
형 이희신, 이요신
남동생 이우신
배우자 방수진, 해주 오씨
자녀 5남 3녀
유교 (성리학)
1. 개요2. 상세3. 생애4. 사망5. 주요 참전6. 이순신이 등장하는 방송7. 평가8.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이순신은 조선 중기 한국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며 한성 출신이다.

2. 상세[편집]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종8품), 충청병사 군관, 전라도 발포진 수군만호(종4품), 훈련원 봉사(종8품), 함경남병사 군관, 훈련원 참군(정7품), 사복시 주부(종6품), 함경도 조산보 병마만호(종4품), 전라감사 조방장, 선전관,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태인현감 겸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를 거쳐 정헌대부(정2품상계)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에 이르렀다.

함경도 동구비보권관, 1581년 발포 수군만호가 되었다가 전라남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절하여 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이후 1584년 남병사의 군관과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 1586년 사복시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로 부임했다. 조산만호 겸 녹둔도사의 재직 중 1587년(선조 20년) 9월의 여진족의 사전 기습공격으로 벌어진 녹둔도전투에서 이겼지만 피해가 커서, 북병사 이일의 탄핵을 받고 백의종군 했다. 그 뒤 두 번째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승전, 복직하였다. 그 뒤 전라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 등을 역임했다. 1589년 정읍현감 재직 중 류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리가 되고, 절충장군, 만포진첨사, 진도군수 등을 거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임진왜란에 참전하게 되었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직후 조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로 잡혀가 문초 받았다. 그러나 그해 7월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되어 조선 수군을 복구하고, 그해 9월 13척의 배로 왜군 133척 중 31척을 격파했으며, 이듬해 3월 고금도로 영을 옮기고, 둔전을 마련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는 적선을 추격하다 유탄에 맞고 사망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해 나라를 구한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3. 생애[편집]

→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망[편집]

1598년 음력 11월 18일에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 6천명이었다. 11월 19일 새벽 2시 경 일본군을 만나 전투가 벌어져 계속하여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했다. 그는 선두로 북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남해 근처에서 일본군이 명나라 군대를 만나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과 함께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54세. 낙안군수 방덕룡, 가리포첨사 이영남과 명의 장수 등자룡도 함께 전사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은 끝나게 되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들 이회 등이 시신을 아산으로 운구, 반장하였다.

이순신이 전사한 직후 1598년(선조 31) 12월에 정1품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경연영사에 증직되었다. 1604년 6월에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으로 추봉하고 그해 7월에 증 좌의정 겸 경연영사를 가증했다. 또한 선조는 명나라에 건의했는데 '이순신은 경천위지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 하늘을 돕고 해를 목욕시킴)의 공로가 있습니다.라 했으며, 명나라 황제에게 건의해 도독의 인수를 내리게 했다.

또한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에게도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와 덕연부원군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 3월에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해남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7월에 정조는 증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5. 주요 참전[편집]

→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주요 참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이순신이 등장하는 방송[편집]

→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이 등장하는 방송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평가[편집]

사후(사망 이후)부터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걸쳐 이순신은 신분과 시대를 막론하고 존경과 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각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이다.
  • 선조 : 졸서후사제문(卒逝後賜祭文)에서도 똑같이 그 잘못을 사죄하는 듯한 말을 남기며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라고 추켜세웠다.
  • 류성룡 : 징비록에서 류성룡은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평하였다.
  • 효종 : 효종이 경연 자리에서,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순신의 재능은 악비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고 하였.
  • 정조 : 정조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순신은 무인이지만 또한 '선정'으로 일컬었고 보면 선정을 꼭 유현에게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 김육 : 효종 임금에게, "조정에서 현재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은전을 시행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에서 충신으로 드러나 칭송할 만한 이는 고 통제사 이순신만한 이가 없는데도, 묘소에 아직까지 조그만 표석조차도 없으니, 이는 자손들이 미약한 소치입니다."고 아뢰었다.
  • 오윤겸 : 제문에서 그는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황천에서 다시 일으켜올 수 없음을 생각하고 백 명을 대신 바치고도 몰려올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고 평하였다.
  • 홍석주 :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관음포의 이충무공전몰유허에서 홍석주는 이순신을 중국의 제갈량에 빗대어 칭송하고, 제갈량이 병사한 뒤에는 촉한이 위태롭게 된 것과는 달리 이순신은 오히려 그가 남긴 공적 덕분에 지금(홍석주가 살아 있었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직이 남아 있을 수 있다며 이순신의 공적을 치켜세우고 있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천관우) 등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았다.

8.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