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일본국 제102대 내각총리대신
이시바 시게루
石破茂 | Ishiba Shigeru
파일:이시바 시게루 사진.jpg
기본 정보
출생
1957년 2월 4일 (67세)
돗토리현 야즈군 야즈정
국적
학력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 법률학과 (졸업)
종교
소속 정당
일본의 제102대 내각총리대신
임기
2024년 10월 1일 ~ 현직
전임
기시다 후미오 (제100•101대)
1. 개요2. 상세3. 생애4. 정치
4.1. 고이즈미 정권4.2. 후쿠다 정권4.3. 아소 정권4.4. 야당 기간4.5. 자민당 간사장4.6. 제2차 아베 정권4.7. 내각총리대신
5. 정책
5.1. 외교, 안보5.2. 농업5.3. 경제5.4. 선택적 부부 별성 법안5.5. 인권침해 구제 기관5.6. 이민
6. 정치적 입장
6.1. 교육6.2. 역사 인식6.3. 외국인 참정권6.4. 자녀 수당6.5. 간접 흡연 문제
7. 여담8.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이시바 시게루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2. 상세[편집]

제102대 내각총리대신, 제28대 자유민주당 총재,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12선)이다.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역임했으며 지역구는 돗토리현 제1구이다.

2024년 9월 27일,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1일, 내각총리대신에 선출되었다.

3. 생애[편집]

이시바 시게루는 1957년 2월 4일, 건설 관료였던 이시바 지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돗토리현 야즈군 야즈정 출생설, 도쿄도 출생설이 있다. 다만 공식 프로필에서는 돗토리현 출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출생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난 지 1년밖에 안 되어 아버지 이시바 지로가 돗토리현 지사가 되어 돗토리현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이시바 시게루는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돗토리현에서 보냈다.

이시바의 어머니는 국어 교사였으며,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소학교(초등학교) 시절에는 매일 밤 1시간 정도 위인전을 읽었다. 이후 돗토리 대학 교육학부 부속 중학교를 거쳐 게이오기주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1979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는 전(全)일본 학생 법률 토론회에서 1등을 했다.

1979년 미쓰이 은행(현재의 미쓰이스미토모 은행)에 입사했다. 이 시기 미쓰이 신탁은행 사장을 지냈던 돗토리현 출신의 도이 쇼자부로는 "1978년 초여름 경에 이시바 지로 씨가 아들 시게루 군의 취업 상담을 하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본인이 지망하는 회사에 취업할 것을 조언했고, 우연히 시게루 군이 입사를 지망했던 회사의 인사 담당 직원이 저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기에 이시바 지로 씨와 함께 방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시게루 군의 학업 클럽 활동 성적이 매우 우수했기 때문에 채용이 쉽게 확정되었는데, 그때 시게루 군의 부모님인 이시바 지로 씨 부부가 크게 안도하던 모습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라고 말했다. 이시바는 도쿄도 주오구에 있는 혼마치 지점에 발령을 받았다.

4. 정치[편집]

1981년 아버지 이시바 지로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의 친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로부터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가라"는 권유를 받고 정계에 입문했다. 1983년 미쓰이 은행에서 퇴직하여 다나카 가쿠에이가 수장인 "목요 클럽"의 사무국에서 근무했다. 이후 1986년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돗토리현 전현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시 나이는 28세로, 전국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이후 내리 11선에 성공했다. 1990년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1위로 당선됐으며, 1990년 중의원 농림수산위원회 이사에 취임했다. 1992년 미야자와 개조 내각에서 농림수산성 정무차관을 맡았다. 1993년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 투표에서는 여당인 자민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찬성표를 던졌다. 이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자민당 당적은 유지한 채 무소속 자격으로 출마, 다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 선거를 통해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며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이시바는 호소카와 정권이 추진한 정치 개혁 관련 4대 법안에 대한 자민당의 반대 당론에 반하여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으며, 이 때문에 자민당 집행부로부터 징계 처분을 받아 탈당하게 되었다. 이시바는 같은 이유로 당의 징계를 받아 탈당한 니시오카 다케오 등과 함께 "개혁회"를 결성했다. 이후 자유개혁연합을 거쳐 신진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1995년 오자와 이치로가 신진당 당수로 선출되자, 안보 정책을 둘러싼 갈등으로 1996년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탈당, 신설된 돗토리현 제1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과반을 넘는 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돗토리현 제1구에서 이시바에 밀려 낙선한 후보들 중 석패율제를 통한 비례대표 부활에 성공한 후보가 단 한 명도 없을 만큼 이시바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견고한 지지를 유지했다. 이시바는 1997년 3월 자민당에 복당하였다. 이후 2000년 제1차 모리 내각에서 또다시 농림수산성 정무차관에 임명되었고, 2001년 제2차 모리 내각에서는 방위청 부장관에 임명되었다.

4.1. 고이즈미 정권[편집]

원래 이시바는 농업, 수산업 분야에 정통하여 그 분야를 통해 자신의 기반을 쌓아 왔지만, 이시바 자신이 "국방이 나의 취미 분야"라고 말했듯 "신 국방족"으로 불리며 외교, 안보 분야에도 정통한 정책통으로 알려져 왔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관한 의원 연맹 회장을 맡았으며, 2002년 제1차 고이즈미 제1차 개조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입각했다. 방위청 장관 재임 기간 동안 테러 방지를 위한 법률 제정, 육상·항공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4.2. 후쿠다 정권[편집]

아베 신조의 퇴진에 따른 2007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하였고 실제로 후쿠다가 총재에 선출되었다. 이렇게 출범한 후쿠다 야스오 내각에서는 2007년 청에서 성으로 승격된 방위성의 수장인 방위대신에 취임하였다. 이후 2008년 후쿠다의 퇴진에 따른 총재 선거에는 본인이 직접 출마하여 25표를 얻어 전체 5명의 입후보자 중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4.3. 아소 정권[편집]

2008년 출범한 아소 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에 임명되었다. 이시바의 전임 농림수산대신들 중에는 마쓰오카 도시카쓰(자살), 아카기 노리히코(스캔들에 휩쓸려 경질), 오타 세이이치(쌀 부정 거래 의혹으로 사퇴) 등 상당수가 불상사를 겪었지만, 이시바는 딱히 이렇다 할 불상사는 일으키지 않고 약 1년간 무난히 재임하였다. 그러나 2009년 7월 12일에 실시된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에 패배하는 등 당내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에서 총선거가 다가오자 요사노 가오루 재무대신 등과 함께 당내에서 아소 다로 총리에 대한 퇴진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렇게 8월 30일에 실시된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의 돌풍에도 불구하고 60%가 넘는 득표를 하며 8선에 성공하였다. 이후 정권 교체에 따른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의 출범에 따라 농림수산대신에서 퇴임하였다.

4.4. 야당 기간[편집]

2009년 9월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한 이후 열린 200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요사노 가오루로부터 출마를 권유받았고 언론들도 일찌감치 이시바의 출마를 예상했으나, 지난 총재 선거에서 본인의 후보 추천인 명단에 올랐던 20명의 의원 중 13명이 총선거에서 낙선하면서 추천인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출마를 포기하였다. 대신 다니가키 사다카즈 전 재무대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고 실제로 다니가키가 총재에 선출되며 이시바는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정조회장)에 기용되었다. 정조회장 취임과 함께 소속 파벌인 누카가파에서 이탈하였다.

2010년 4월 22일, 기자 회견에서는 자민당을 탈당한 요사노 가오루, 소노다 히로유키 등이 참여하는 신당인 일어나라 일본에 대해 "신당 일어나라 일본에 참가한 요사노 가오루와 소노다 히로유키와는 정책적으로 매우 가까운 입장에 있다. 두 사람은 자민당에서 중요 정책의 입안을 함께했고, 앞으로도 같이 가야하는 건 당연하다. 일어나라 일본은 민주당의 과반수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공통되는 만큼 향후 정책 면에서 공동 보조를 취할 일은 많을 것이다"라며 자민당과 일어나라 일본이 함께할 가능성을 시사하였고, 이후 강연에서도 "모두 민주당을 깨부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 욕설이나 '배신자'라는 말을 퍼부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맞서 싸울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8] 같은 해 9월에는 자민당 정조회장에 유임되었다.

2011년 9월 당직 개편에 따라 자민당 정조회장에서 퇴임하였다. 후임으로는 모테기 도시미쓰가 임명되었다. 정조회장 퇴임 후에는 소속 파벌인 누카가파에는 복귀하지 않고 같은 해 12월에 파벌을 초월한 정책 연구회인 "사와라비회"를 만들었다. 이후 중의원 예산위원회 자민당 간사, 자민당 안전보장조사회장에 취임하였다.

2012년 9월 10일,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출마를 표명하였다. 9월 26일 실시된 선거에서는 1차 투표에서 입후보자 5명 중 총 199표를 획득하며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 득표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국회의원들만의 투표로 치러진 2차 투표에서는 89표를 얻었지만 주요 파벌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아베 신조의 108표에 못 미쳐 결국 총재 당선에 실패했다.

4.5. 자민당 간사장[편집]

2013년,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에서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된 아베 신조에 의해 어느 파벌에도 소속되지 않은 이시바가 간사장에 발탁되었다. 이시바는 국정에 전념한 아베를 대신해 당무를 도맡으며 2012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13년 제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진두지휘했다.

4.6. 제2차 아베 정권[편집]

2014년 9월 3일 제2차 아베 신조 개조내각 출범에 앞서 아베 총리는 이시바를 신설되는 안보 법제 담당 대신에 임명할 것을 타진했으나, 이시바는 8월 25일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이를 사양할 뜻을 밝히고 개각 후에도 계속 간사장 직에 머물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일본 정계에서 간사장 등 하위 직책이 임명권자의 인사에 제동을 거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에, 닛칸스포츠가 "간사장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인사에 대한 본인의 희망을 말하는 전대미문의 일이 일어났다"라고 보도하였으며, 당내에서도 이시바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인 와키 마사시는 "개인의 의견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내각 및 당 조직의 임명권자의 의향에 따르는 것이 상식이다"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당내 갈등을 막기 위해 본인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에 있는 이시바를 반드시 입각시키기를 원했고, 결국 이시바의 의견에 따라 안보 법제 담당 대신이 아닌 다른 직책으로 입각시킬 것을 타진, 8월 29일에 이시바와 회담한 자리에서 이를 정식 확정했다. 결국 9월 3일에 출범한 제2차 아베 신조 개조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국가 전략 특별 구역) 및 지방 교정 담당 대신 (지방창생담당상)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30일, 당내 무파벌 의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무파벌 연락회에 참여하였고, 2일 후에 고문으로 취임했다. 이 모임은 2012년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를 지지한 의원들이 핵심이기 때문에 일부 언론이나 자민당 의원들이 "사실상 이시바파"로 간주했지만, 이시바 본인은 "무파벌 의원의 공조가 모임의 취지다"라며 이를 부인했다.

같은 해 12월 24일에 출범한 제3차 아베 신조 내각에서 지방 창생 담당 대신 겸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국가 전략 특별 구역)에 연임되었다.

2015년 9월 8일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각료이기 때문에 출마하지 못했고 결과는 아베 신조 단독 후보로써 아베가 총재에 재선됐다. 이시바는 이후 "각료나 당직자로 있을 때는 총재 선거에 나서지 않는 것이 맞고, 아베 정권의 지지율이 비교적 높은 상황에서 출마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인 9월 9일에는 자신의 파벌을 결성할 뜻을 표명했다. 9월 28일에 "수월회"를 명칭으로 하는 파벌이 결성, 이시바를 포함한 20명의 의원이 참가했다. 이시바는 파벌 출범과 함께 가진 회견에서 자신이 각료를 지내고 있는 아베 내각을 지탱하는 것과 동시에 아베 신조의 자민당 총재 임기 2기 6년의 기간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갖고 정책 및 집권 구상을 가다듬겠다는 뜻을 내비치며 "나 같은 사람도 만약 정권을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그것을 목표로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같은 해 10월 7일에 단행된 제3차 아베 신조 제1차 개조내각에서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지방 창생 담당) 겸 마을·사람·일 창생 담당 대신으로 취임했다.

이후 2016년 8월 3일 단행된 제2차 개조내각에서 모든 각료 직책에서 물러났다.[22] 이시바는 이후의 인터뷰에서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정권은 없다. 2년 후, 3년 후, 5년 후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럴 때는 누군가가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베 총리를 지지하는 것은 물론, 그 다음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도 자민당이 완수해야 할 책임이다"라고 말했다.

각료 퇴임 후에는 중의원 주코쿠 블록 대표로서 당 총무가 되었지만,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이시바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전직 총무회장 호소다 히로유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8월 29일에 물러났다. 이시바의 후임에는 같은 이시바파 소속인 아카자와 료세가 임명됐다.

2018년 8월 10일에는 9월에 열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표명하였다. 이시바는 반아베 노선을 내세우며 아베에 맞섰지만, 결국 당선되지 못했다.

2020년 6월 요미우리 신문에 의하면, 아베 신조의 지지율이 근래에 떨어졌고, 이시바의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차기 총리의 적임자는 아베를 제외하고 이시바가 1위, 고이즈미 신지로가 2위, 고노 다로가 3위, 기시다 후미오가 4위다.

2020년 9월 1일에는 아베 신조가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의 재발을 이유로 사임할 것을 발표하자 2년 만에 다시 열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공식 표명했다. 선거 결과 이시바는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에게도 밀린 3위의 득표를 하며 낙선했다.

4.7. 내각총리대신[편집]

2024년 9월 27일,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되어 사실상 차기 내각총리대신직을 보장 받았다.

5. 정책[편집]

5.1. 외교, 안보[편집]

시민 사회와 군대가 동떨어진 존재가 되지 않도록, 시민이 군대라는 조직을 실감하고 이해하게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징병제의 이점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징병제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부 견해와 마찬가지로 국회 답변에서 일본국 헌법 제13조의 "행복 추구권", 제18조의 "뜻에 반하는 고역 금지" 등의 규정에 비추어 위헌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자위대를 기동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법 개정을 거듭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유사시에 북한에서 일본인을 구출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00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입후보했을 때는 "동란이 일어나 북한에 있는 일본 국민이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도 자위대는 (국내법의 제약에 의해)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런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라고 말했다. 2013년 1월 27일에는 일본인이 포함된 알제리 인질 사건을 보면서 "일본인의 생명, 재산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이다. 필요한 한도 내에서 최소한의 무기 사용은 (헌법이 금지하는) 무력 행사는 아니다"라며 긴급 상황 발생시 재외 일본인을 자위대가 구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무기 사용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0년 5월 23일, TV 방송에 출연해 "장기적으로 보아 일본 같은 섬 나라에 해병대가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일본도 해병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일본이 해병대를 가질 경우, 일본 해병대가 미국 해병대와 공동으로 활동할 가능성도 언급했다.

2015년 11월에 발생한 파리 동시 다발 테러 사건을 지켜보며 공모죄를 포함한 일본 국내 테러 대책법 정비에 관해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일본이 테러 활동의 샛길, 구멍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제 조직범죄 방지 조약을 일본이 비준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북한과 이라크 등 몇 개국 뿐이다. 일본이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고 말해 공모죄의 신설과 조약의 조기 비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2016년 6월 19일, STV 라디오의 대담 프로그램인 "나카무라 요시히코의 일요 칼럼"에 출연해 "북한은 곧 무너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30년 전에도 있었고, 20년 전이나 10년 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북한이 앞으로도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련이 무너지고, 루마니아가 무너지고, 이라크가 무너지는 과정을 북한은 모두 지켜봐 왔기에 이러한 학습 효과로 국가가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5.2. 농업[편집]

첫 입각 당시 직책이 방위청 장관이었고 이후에도 방위대신을 맡는 등 국방 분야 각료를 맡아왔고, 자민당 정조회장 취임 후에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는 주로 외교, 안보 정책을 중심으로 질의를 해왔기에 이시바를 외교, 안보 정책통으로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원래 이시바는 농림수산성 정무차관을 2번이나 역임할 정도의 농업, 수산업 분야 전문가이다. 이에 대해 이시바는 "농가를 방문하면 농민들로부터 '방위 전문가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농업, 수산업 문제를 아무리 말해도 미디어가 보도해 주지 않는다"며 답답함을 드러냈다.

5.3. 경제[편집]

경제 성장보다는 재정 재건을 중시하는 재정 재건론자로 꼽힌다.[39] 경제학자인 다나카 히데토미는 "이시바는 재무성의 소비세율 인상 노선이나 그 배경에 있는 재정 재건주의에 친화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시바는 2017년 11월의 강연에서 "세수 이상의 돈을 쓰면 빚이 늘고 다음 세대는 힘들어진다"고 발언한 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 재정 운영에 의문을 나타냈다. "재정 건전화"를 헌법에 명기할 것을 제안했다.소비세율 인상에 찬성했으며, 자신의 경제 구상에 대해 묻자 "소비세율을 10%로 올리는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답했다. 영국의 투자자인 피터 태스커는 "이시바가 만약 집권할 경우 경제 문제에 있어 관료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없으므로, (아베노믹스를 대체할) "이시바노믹스"는 결코 탄생할 수 없다"며 이시바를 비판했다.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교섭에 대해 "참가하지 않는다는 선택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해 교섭 참가에 찬성하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또 2011년 11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총선거 때 '우리 당이 집권한다면 TPP 교섭에서 즉시 이탈할 것이다'라고 공약할 것인가. TPP 반대파들이 그 정도의 각오가 되어 있는 거라면 별 상관이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공약을 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국익을 해치고, 주요 산업을 괴멸시키면서까지 (TPP 교섭을) 해야 할 필요성은 없다. 안이한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5.4. 선택적 부부 별성 법안[편집]

2010년 3월 3일,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이 목표로 하는 선택적 부부 별성제의 도입을 비롯한 민법 개정안에 대해 "이것을 바라는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자면 이 법안에는 반대라는 입장을 표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자민당 내에서 선택적 부부 별성제 도입에 동참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당내에 (민주당이 추진하는 선택적 부부 별성제의)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해서 '뭐, 괜찮잖아'라는 풍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말했지만, 이후 입장을 바꾸어 2018년 10월 22일에는 선택적 부부 별성 소송의 변호인단과 회담을 갖고 선택적 부부 별성제의 도입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5.5. 인권침해 구제 기관[편집]

2011년 3월 3일 "부락 해방 동맹"의 전국 대회에 내빈으로 참석했을 때, 이시바는 부락 해방 동맹이 요구하는 인권 구제 기관을 창설하기 위한 법 규정 정비에 의욕을 보이면서 "법을 제정하는 데는 여당도 야당도 없다"고 말했다. 한편 2012년 자민당 총재 선거 때는 민주당이 법안 제출을 준비하던 인권 침해 구제 법안에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올바른 인권 보호 조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5.6. 이민[편집]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 속에서, 장기적으로 한정된 범위 내에서 외국인의 일본 이민을 진행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바탕에 '일본인이 싫어하는 일을 외국인에게 시킨다'고 하는 인식을 가져서는 안 되며, 일본인과 같은 양의 일을 했다면 임금도 일본인과 같은 수준으로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이들에 대한 의료나 연금 등의 사회 보장 정책을 고려하고, 언어나 습관 차이로 인해 서로가 위화감을 가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6. 정치적 입장[편집]

6.1. 교육[편집]

"애국심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개정된 교육기본법에 애국심을 명문화한 것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6.2. 역사 인식[편집]

태평양 전쟁에 대해, "당시 정부 소속의 '총력전 연구소'가 미·일 전쟁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 일본이 필패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정부 고위층에도 결과를 보고했는데, 이러한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해 수백만 명의 국민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은 엄중히 물어야 한다. 천황의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지 않고,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으면서 결국 일본을 패전으로 이끈 사람들이 왜 죽으면 모두 '영령'으로 간주되며 불문에 부쳐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당시 일본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극동국제군사재판에 대해서는 "절차상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평화에 대한 죄'를 물은 재판을 우리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일본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전쟁 전에 일본이 한 일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쿄 전범재판이 법적으로 무효라고 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로부터는 전쟁 전의 일본에 전혀 오류가 없었는지에 대한 논의를 찾아볼 수 없다"며 "전쟁 시기는 물론 전쟁 이전의 일본의 행동도 모두 잘못"이라는 극단적인 자학 사관과 "일본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는 일부 보수파의 사관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난징 대학살에 대해 "적어도 포로 처리의 방법을 잘못한 것은 사실인데, 이것은 군기와 군율 모두 문란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인 희생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지만, "대학살"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으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군과 관헌에 의한 강제 연행이 있었다는 취지의 발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총리를 비롯한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는 것이나, "도쿄 전범재판은 무효", "대학살은 없었다", "위안부 연행의 강제성은 없었다"라는 발언 등을 통해 드러나는 우익 정치인들의 역사 인식에 대해 이시바는 "정치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과연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말하고, 실제로 이런 발언 때문에 외교상 문제가 된 예를 들며 의문을 제기하였으며, "일본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나라를 늘려 국익을 지키는 것이 정치인의 임무"라고 말했다. 이에 덧붙여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천황이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건 문제가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쳐도, 정치인이 참배한다는 것이 문제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또한 "야스쿠니를 참배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는 법률가나 역사학자가 판단할 문제이며, 정치인의 역할은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진지한 논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시바는 2002년 방위청 장관으로 처음 입각한 이후 야스쿠니 신사에는 참배하지 않았다. 대신 현지의 호국 신사에 매년 8월 15일 참배하고 있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서 논란이 되어 온 A급 전범의 분사를 주장하고 있다. 다모가미 도시오 항공막료장(항공자위대의 수장)의 논문 문제에 관해 "현직 자위대 간부가 자신의 사상을 내세워 정치를 바로잡겠다는 것은 헌법 정신에 반한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블로그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밝혔다. 2013년 5월,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정조회장이 "무라야마 담화에 위화감을 느꼈다"고 발언하자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이시바는 "잘못된 발언은 엄격히 삼가기 바란다"며 경고했다.

6.3. 외국인 참정권[편집]

2010년 자민당 당대회에서 영주 외국인에 대한 지방 선거권 부여에 대해 "헌법상 논란이 많고 국민적 논의도 성숙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졸속한 법안 성립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말해 당 차원에서 법안에 반대할 입장을 표명하였고, 또한 "(헌법 상의) 주민은 일본 국민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부분에 많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의 형태 그 자체와 관련된 문제이다. 헌법 상으로 볼 때 졸속 법안 통과에는 단호히 반대하겠다"고 말했다.

6.4. 자녀 수당[편집]

민주당 정권이 추진했던 자녀 수당 지급 대상에 아이가 모국에 있는 재일 외국인이 포함된 것을 언급하며 "(재일 외국인이지만) 자녀는 국외에 있다. 그리고 아이는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한 분들에게 일본 국민의 세금을 사용해 수당을 지급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6.5. 간접 흡연 문제[편집]

2017년 1월 12일, 간접 흡연 방지 강화에 관한 긴급 집회에서 "강화 방안이 시행되면 그동안 담배를 팔아 온 개인 사업주는 확실히 손해를 본다. 전국에 마이너스 4000억 엔의 경제 위축 효과를 일으킨다는 추산도 나왔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개인의 가치관이나 즐거움까지 부정하는 사회가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간접 흡연 방지를 목표로 하는 건강증진법 개정안에 반대했다.

7. 여담[편집]

  • 일본에서 보기 드문 기독교 신자이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있다. 아버지는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고향인 돗토리현에 있을 때는 조상의 묘를 찾는 일을 거르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증조부 때부터 이어져 온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교회 부속 유치원에 다녔으며, 18살 때 일본 내 기독교계 최대 조직인 일본기독교단에 속한 돗토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시바는 "평생 기독교와 가까이 하며 신앙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본 CBMC의 초청으로 국가 만찬 기도회의 내빈으로 참가했다.
  • 산케이 신문이 발행하는 잡지 "정론" 및 분게이슌주가 발행하는 잡지 "제군!"을 고등학교 시절부터 구독하고 있다. 이 두 잡지는 모두 보수 성향의 논조를 보이기 때문에 이시바는 "반대의 관점이나 논리를 모르면, 나 자신의 논리도 제대로 갖출 수 없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방위청 장관 재임 때부터 일본공산당 기관지인 "신문 아카하타" 및 "전위"를 읽고 있다. 이시바는 "양 극단의 논조를 모두 보고 비교하는 일에 푹 빠져, 상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언론 인터뷰 도중 양해를 구하고 담배를 피울 정도의 애연가이다.
  • 자민당에서 손꼽히는 외교, 안보 논객, 정책통으로 알려져 있다.
  • 군사 애호가이면서 동시에 철도 애호가이기도 하다. 지금도 돗토리-도쿄 간 왕복 열차의 침대 칸을 이용하는 모습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8.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