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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마지막 편집·0
분류
문도공(文度公)
정약용
丁若鏞 | Chŏng Yagyong
출생
1762년 8월 5일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사망
1836년 4월 7일 (향년 73세)
(사망 190주기)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본가
(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묘소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7)
본관
나주 정씨 (羅州 丁氏)
국적
이름
이름
약용
시호
문도
미용
다산, 여유당
신체
약 161cm
학력
성균관
가족
부친 정재원 (사망 234주기)
모친 윤소온 (사망 256주기)
형 정약현[1], 정약전[2], 정약종[3]
동생 정약횡 (사망 197주기)
배우자 홍혜완 (사망 188주기)
딸 3명[4]
아들 6명[5]
직계
종교
미상
직업
학자, 정치인
1. 개요2. 상세3. 생애4. 사망5. 평가6.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정치인이다.

2. 상세[편집]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 호는 다산·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철마산인·문암일인, 당호는 여유당이며, 시호는 문도이다.

3. 생애[편집]

→ 자세한 내용은 정약용/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망[편집]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텨라"는 것이었다.

1910년(융희 4) 7월 18일에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고 시호 '문도(文度)'가 내려졌다.

5. 평가[편집]

조선 근대 공학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유형원·성호 이익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했다. 한국 근세에서 남인학파의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인 태도에 비하여, 다산은 남인학파 중에서도 다분히 실제적인 경험을 지녔다. 정조 시기 중앙 관리로서의 경력, 지방행정의 경험, 연천 방면의 암행어사 행각, 청년 시절의 왕환과 부친의 임소 견문 등을 바탕으로 강진 다산초당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자신의 학문·사상을 체계화해 정리할 수 있었다. 다른 실학자들처럼 성리학·천문·지리·역상·산학·의복에 관련된 저서는 물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은 모두 ‘다산학’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박명절하며 탁견이 아님이 없다.

이러한 사상이 급속도로 붕괴해 가던 조선사회에 적절히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다산이야말로 조선조 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학풍을 한 몸으로 총괄·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인 것이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선생 1인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의 명예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 라고까지 평하여 그의 학문·저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정약용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나 대부분을 한문으로 썼으며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도 한문을 사용했다. 국어교육학 박사인 김슬옹은 '우리문화신문'에 기고를 통해, 정약용이 철저히 한글을 외면했음을 지적하며, 사상의 위대함이 표현과 소통의 위대함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또한 정약용 역시 성리학과 실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양반 사대부였음을 비판하였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1751~1821[2] 1758년생으로 조선의 성리학자, 실학자로 수산학자, 해양학자, 생물학자이다. 유배지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섬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다가 1816년 우이도에서 사망했다. 묘지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성지에 있다.[3] 1760년생으로 조선의 실학자, 가톨릭의 복자이다. 신육박해 때 큰아들 정철상과 함께 순교했다. 정약종이 순교할 무렵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서 배교하고 살아남았지만 정약용은 배교를 거부하여 1801년 한성부 반송방 서소문 처형장에서 사형당했다. 향년 40세.[4] 정씨, 정효순, 정씨[5] 정학연 (사망 167주기), 정학유 (사망 171주기), 정구장 (사망 235주기), 정삼동 (사망 228주기), 정씨, 정농장 (사망 224주기)[6] 정약용의 차남 정학유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