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r1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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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도공(文度公) 정약용 丁若鏞 | Chŏng Yagyong | ||
출생 | 1762년 8월 5일 | |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 ||
사망 | 1836년 4월 7일 (향년 73세) (사망 190주기) | |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본가 (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 ||
묘소 | ||
본관 | 나주 정씨 (羅州 丁氏) | |
국적 | ||
이름 | 성 | 정 |
이름 | 약용 | |
시호 | 문도 | |
자 | 미용 | |
호 | 다산, 여유당 | |
신체 | 약 161cm | |
학력 | 성균관 | |
가족 | ||
직계 | ||
종교 | 미상 | |
직업 | 학자, 정치인 | |
1. 개요[편집]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정치인이다.
2. 상세[편집]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 호는 다산·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철마산인·문암일인, 당호는 여유당이며, 시호는 문도이다.
3. 생애[편집]
→ 자세한 내용은 정약용/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망[편집]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텨라"는 것이었다.
1910년(융희 4) 7월 18일에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고 시호 '문도(文度)'가 내려졌다.
1910년(융희 4) 7월 18일에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고 시호 '문도(文度)'가 내려졌다.
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1751~1821[2] 1758년생으로 조선의 성리학자, 실학자로 수산학자, 해양학자, 생물학자이다. 유배지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섬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다가 1816년 우이도에서 사망했다. 묘지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성지에 있다.[3] 1760년생으로 조선의 실학자, 가톨릭의 복자이다. 신육박해 때 큰아들 정철상과 함께 순교했다. 정약종이 순교할 무렵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서 배교하고 살아남았지만 정약용은 배교를 거부하여 1801년 한성부 반송방 서소문 처형장에서 사형당했다. 향년 40세.[4] 정씨, 정효순, 정씨[5] 정학연 (사망 167주기), 정학유 (사망 171주기), 정구장 (사망 235주기), 정삼동 (사망 228주기), 정씨, 정농장 (사망 224주기)[6] 정약용의 차남 정학유의 후손.
